[그때 그 인터뷰] "3.1운동 때 '제2의 유관순' 60명 활동했다"
[그때 그 인터뷰] "3.1운동 때 '제2의 유관순' 60명 활동했다"
  • 김두호
  • 승인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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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민족대표 이갑성 선생이 병상에서 들려준 비화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 인물의 증언
-43년 전 감회 되살려 본 ‘그 때 그 인터뷰’
1976년 병상에서 일어나 단정한 옷차림으로 기자와 마주했던 연당(硏堂) 이갑성 선생의 모습.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 인물이었다. 필자가 이 선생을 만났을 당시는 3.1 독립만세 사건으로부터 57년이 지난 1976년 2월 말이었다. 당시 이 선생은 3.1운동 전후 당시 생생했던 현장 비화를 들려줬다./사진=서울신문사 보도자료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3월 1일은 봄의 절기지만 예나 지금이나 산자락에 잔설이 녹지 않은 겨울 냉기의 차가운 날씨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월 1일,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지축을 흔들며 일시에 터져 나온 그날로부터 100주년을 맞이해 인터뷰365가 역사적인 3.1운동의 중심인물이 고백한 생생한 3.1운동 전후 현장 비화를 43년 만에 되살렸다.

다음은 기자가 서울신문사에 재직할 때인 1976년 3.1절을 앞두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 인물인 연당(硏堂) 이갑성(李甲成 1886∼1981) 선생을 단독으로 만나게 된 당시 극적인 상황과 인터뷰한 기사를 1976년 2월 28일자 선데이서울 톱기사로 소개한 내용을 정리했다.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중 최연소 인물인 이갑성 선생을 만난 것은 3.1 독립만세 사건으로부터 57년이 지난 1976년 2월 말이다. 지병으로 치료차 입원 중인 병원에서였다. 면회불가로 문병 온 사람도 만나지 않을 때인데 오래전부터의 끈질긴 단독 인터뷰 요청을 그해 3.1절을 앞두고 선뜻 받아들였다.

90세의 연세로 거동이 불편하고 대화도 힘들어 보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분명했다.

“3.1만세 후 7년간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 본적이 없고 그 후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면 이야기를 자세하게 드러낸 적이 없지만 이제 언제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느냐”면서 무겁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곁에는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미국서 귀국한 부인 최마리 여사가 지켜보았고 주치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환자복을 입지 않고 단정한 정장차림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샤락스 목사가 전해준 이승만의 독려

-1919년 3월 1일로부터 57년이 지났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15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세브란스 병원에 재직하실 때 학생시위 조직에 깊이 참여하시고 전단지 배포 등을 주도하신 역사적인 사건기록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석 달 전이었어요. 내가 서른두 살 때인데 평안북도 선천교회에 계시는 샤락스 목사가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으로 근무하던 나를 찾아왔어요. 명목상으로는 약을 구입하기 위해서였지만 내막은 미국을 다녀오면서 이승만 박사의 은밀한 전달 사항을 전해주는데 있었지요.

-샤락스 목사가 밀사 역할을 하신 거군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미국의 한인들은 한데 뭉쳐서 파리 만국평화회의로 법석인데 왜 내 나라에서는 조용한가, 나라 안에서 독립을 찾기 위한 소리가 나오면 해외에서 우리도 활동하기가 매우 유리해진다면서 본국에서도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보여 달라는 요청과 독려였어요.

-3.1 독립운동은 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었지요?

나는 샤락스 목사에게 말했어요. 우리도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계시는 함태영 목사에게 그 사실을 알렸어요. 함목사도 무릎을 치며 우리도 일어날 시기가 되었다면서 비로소 이승훈 선생 등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과 샤락스 목사의 만남이 독립만세운동의 시기를 앞당기게 된 불씨로 볼 수 있겠군요. 국내에서도 준비는 하고 있으나 시기를 정하지 못하던 중에 샤락스 목사를 통한 이승만 박사의 촉구 전갈이 온 것이군요.

3.1운동을 천도교·기독교·불교가 처음부터 뜻이 모여 3종교가 합동으로 일시에 주도해 일어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주로 일본문서만 참고로 해서 알려진 잘못된 기록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무렵 천도교의 손병희 선생도 별도로 3.1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때여서 시위계획을 기독교와 함께 추진 한 것이 근거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3종교 합동밀회 현장에 있었던 사람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합동결의가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나라 안 독립운동을 두고 긴박했던 시기에 이승훈 선생이 봉기시기와 협력방안을 의논하기 위해 손병희 선생을 찾아갔다가 면담 거부를 당해 한동안 기독교 단독으로 시위준비를 해야겠다는 말이 나왔어요. 이어서 나와 함태영 목사, 이승훈 선생 셋이서 다시 찾아 갔더니 이승훈 선생을 만나지 않은 이유가 감시대상으로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고 그랬다는 속 깊은 말씀을 하셨어요.

■생리대로 봉기 비밀문서 전국 배포

-33인 민족대표가 중심이 되어 3.1일로 독립만세 항쟁봉기 날짜를 정하고 통신수단이 편지와 인편에 의존하는 시대에 그 실행 날짜를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전국에 전달하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1919년 2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거사 일자와 방법을 기록한 비밀문서를 사전에 탄로 나지 않게 전국에 전달하는 과정이야말로 목숨을 건 사생결단의 각오와 용기가 필요했어요. 나의 임무는 발이 되어주는 핵심 하부 조직을 뒷바라지 하고 연락망을 조직하는 일이었지요.

주력 임무를 맡은 동지들과 비밀리에 지원자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서울 정동교회 지하실에 남녀학생 200명이 모여들었어요. 그중에 추리고 추려 여학생만 66명을 선발해 이들에게 거즈로 만든 생리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안에 배포할 비밀 계획서를 감추게 한 것이지요.

-발각되거나 실패한 학생이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계획에 차질이 일어났겠지요.

기차를 타면 일제경찰의 검문검색이 심해 가능하면 먼 거리도 걸어서 이동하는 방법을 권했어요. 1개도에 2∼3명씩 파견된 극비활동참여자들이 모두 3일 이내 임무를 마치고 귀환토록 했습니다.

-단 한명도, 민족의 마음이 통한 것이라 비밀이 누설되거나 전달도중에 장애나 탈이 없었군요.

전국에 파견된 조직망을 체크하는 업무의 본부가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있는 나의 숙소였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 나타나지 않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구나 하고 불안에 쌓여 있을 때 5일 만에 자정이 넘은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요. 나는 마침내 일제 경찰이 비밀을 알고 왔구나 하고 체념하며 문을 열었지요.

그런데 시커먼 작은 사람 하나가 대문 앞에서 나무둥치 넘어지듯 힘없이 푹 주저앉아요. 처참하게 지친 몸을 이끌고 마지막 한 명이 나타났어요. 헤진 옷에 먹지 못한 그 몰골, 생각만 해도 불쌍해 눈물이 납니다. 함경도를 돌아다니고 내려와 온몸에 상처가 나 바로 응급치료를 받게 했어요. 한참동안 진료를 받았지요.

-3.1운동 전후 여성들이 일제에 맞서 두려움 없이 저항하고 피 흘린 비화기록도 많은 감화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성의 위대함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여성들이 가장 위대해요. 3.1운동도 목숨을 건 여성들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일제히 독립만세를 함께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갑성 선생은...]

독립운동가 연당 이갑성 선생은 마지막 3.1운동 비화를 회고하던 해로부터 몇 해 더 생존 후 타계하셨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1926년 YMCA이사를 맡아 일찍 기독교 청년지도자로 적을 두기도 했고, 3.1운동으로 감옥생활을 한 뒤 1931년 신간회 사건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한 시기도 있다.

귀국 후 다시 옥고를 치루는 등 손톱 발톱이 빠지도록 고문도 당하면서 독립운동을 향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고 해방을 맞이해 1947년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과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활동하고 1950년에는 민의원의원, 1965년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김두호
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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