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관객 호기심 자극한 김아라 연출의 비언어총체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관객 호기심 자극한 김아라 연출의 비언어총체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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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신선했지만 난해...이색적인 공연 형식 돋보여
비언어 총체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공연장면/사진=극단 무천

[인터뷰365 정중헌 칼럼니스트] 김아라 연출의 비언어 총체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2월 20~24일 서강대 메리홀)은 ‘이런 연극도 있구나’ 할 만큼 이색적인 공연 형식을 보여주었다.

19명의 배우들이 2시간 동안 무대를 가로 지르거나 오가면서 대사는 외마디 비명 정도가 고작이라면 결코 관극이 쉽지는 않다. 특히 필자의 경우는 몸이 정신을 따라 주지 않아 비몽사몽, 아주 몽환적인 상태로 작품 속에 빠져 들었다.

다른 관객들은 김아라 연출의 의도대로 “시처럼 음악처럼 감성으로 다가가 한 겨울의 따뜻한 꿈”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연극 ’관객 모독’,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쓴 피터 한트케가 1992년 발표한 무언극을 김아라가 재구성하고 연출한 이 작품은 대학로 연극을 자주 보는 필자에게 여러모로 새롭고 신선했다. 그러나 솔직히 난해했다.

프로그램을 읽고 관극에 임했다면 비언어극의 묘미를 제대로 즐겼을텐데 그러지 못하니 중반 이후는 미궁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연극을 보고 나서 프로그램의 내용을 보자 머리 속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몽환 관극이었지만 정동환 배우가 열연한 노숙자가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다미엘 천사라는 짐작은 맞아들었다. 다미엘 역을 했던 부르노 간츠가 2월 16일 타계한 뉴스가 힌트가 되긴 했다.

비언어 총체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에서 정동환 배우의 공연장면/사진=극단 무천

더욱 공교로운 점은 70년대 초반에 끄적인 노트에서 필자 또한 노숙자 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것이다. 유치한 글이지만 몇 줄만 옮겨 본다.

“나는 날마다 그 시간이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노을이 도시의 빌딩 사이에 검붉은 어둠을 드리우는 밤으로의 초엽에, 모퉁이 높은 빌딩의 내려진 셔터 앞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어쩌면 습관성 질환 같기도 한 이 나의 괴벽은 언제부턴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 시간 나는 행인의 외모와 눈빛을 마주하며 순간을 스치는 타인들과의 마주침을 음미한다. 눈과 눈의 마주침... 그것은 아주 짤막한 순간의 교차에 불과하지만 저마다 다른 뉘앙스를 내게 던져준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 냉소적인 눈, 무표정한 눈, 삶에 지친 몸짓... 나는 타인과의 눈 맞음에서 으레 먼저 패배하지만 그 어떤 전류 같은 것을 느꼈다.”

비언어 총체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사진=극단 무천

이 작품을 보면서 필자가 유독 정동환 배우의 연기에 주목한 것은 그가 그 예전의 나 같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에 보면 이 무언극에는 19명의 배우들이 260여 인간군상으로 분해 광장을 비껴간다. 정동환은 시종 광장을 지키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필자가 몽환 중에도 극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정동환의 시선으로 보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선을 다 따라잡지는 못했다. 성서 속의 모세, 모차르트 '마술피리'에 등장하는 새잡이 파파게노, 영화 '하이눈'의 주인공 월 케인... 필자는 그 중에서 겨우 찰리 채플린을 발견했고, 알몸으로 뛰어가는 청년을 보았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포스터

피터 한트케는 대사 보다 더 힘들었을 지문으로 왜 이 작품을 썼고, 김아라는 왜 이 작품을 택했을까? 연극을 보며 이런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말이 많아 시끄러운 이 세상에 말로 소통이 안 되니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일까. 말이 없어도 인간은 서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일까.

김아라 연극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0여년 전으로 기억된다. 경기도 한 마을에서 거대한 야외극을 보았는데, 뉴욕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이미 4부작 침묵극 ‘정거장 시리즈’로 스케일이 크면서도 실험적인 작업을 해온 연출가로 정평을 얻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가 이만한 규모의 극장에서 권성덕 정동환 같은 중진 배우들을 등장시켜 음향과 영상, 오브제 등 온갖 스탭들이 참여하는 총체극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연극계의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모처럼 만석을 이룬 뜨거운 공연을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비언어 총체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공연장면/사진=극단 무천

열려진 광장을 형상화한 도나정의 무대미술, 물과 불의 이미지를 끌어들인 김태은의 영상, 현대음악과 클래식을 효과적으로 조화시킨 신나라의 음악과 음향,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차별화한 이경래의 오브제디자인, 극에 배우로 출연까지 하는 활약을 보인 박호빈의 안무는 김아라 연출이 의도한 현대사회의 소외와 고독, 치유와 화해라는 명제를 명징하게 입체화 시켰다.

2시간 동안 이 연극을 이끈 배우들의 이해와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공연은 지루한 패션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9명의 배우 중 정동환은 2시간 동안 무대를 지키며 연인원 260여명을 지켜보고 눈을 맞추고 때로는 물벼락을 맞기도 했다.

다른 배우들이 약속된 동선을 오갈 때 노숙자 정동환만은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들을 관찰하고 반응해야 하는 힘든 연기인데 70을 목전에 둔 그는 라스트의 천사로 변신하기까지의 긴 여정을 연극적인 언어로 보여주며 이번 무언극 무대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보여 주었다.

비언어 총체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에서 권성덕 배우의 공연장면/사진=극단 무천

이 연극에 권성덕 배우가 함께 했다는 것은 관객에게 보너스 같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19명 배우의 혼재 속에서도 그의 캐릭터는 싱싱하게 살아 있었고 극에 여유를 주었다.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들. 그들은 각자 혼자다. 그들은 횡단보도 건널목에 모인다. 언제나 서로 비껴갈 수밖에 없는, 교차점 그곳. 배우들이 황단보도를 건너며 연극은 시작되고 계속된다. 걷고 또 걷고, 건너고 또 건너고, 느리게 걷거나 뛰고, 짐을 지거나 유모차를 끌며... 갑자기 소리 지르고, 큰소리로 훌쩍거리고, 슬픈 휘파람을 불며...

관객에겐 같은 장면으로 보일지 몰라도 대본은 영화 큐시트처럼 세밀한 지문과 정황이 있다. 새벽의 광장, 정오, 저녁, 밤. 다시 새벽... 우리가 결코 알 수 없었던 시간에 광장에서 수많은 일상과 사건이 벌어진다. 그 광장에 노숙자가 천사의 날개를 달고 나타난다.

이 연극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김아라 연출의 의도대로 “대립과 불통, 소외와 고독으로 가득찬 황폐한 현실”을 군중들의 무언극으로 보여주며 “지금이 아름답기를...” 바란 작의는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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