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물리학도 출신 임승후 애니메이터, 30대 유학 떠나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기까지
[인터뷰] 물리학도 출신 임승후 애니메이터, 30대 유학 떠나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기까지
  • 김리선 기자
  • 승인 201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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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캐나다 밴쿠버 '소니픽쳐스 이미지웍스'서 시니어 캐릭터 애니메이터로 근무
-'캣츠 앤 독스2' 비롯, '언더월드4', '19곰 테드2', '토르:라그나로크', '스파이더맨:더 유니버스' 등 할리우드 다수 작품 참여
-부산서 태어나 대학서 물리학 전공, 33세에 미국으로 애니메이션 유학 떠나..."'절실함'이 현재까지 오게한 원동력"
캐나다 밴쿠버에 위치한 애니메이션 회사 '소니픽쳐스 이미지웍스'에서 활약하고 있는 임승후 수석 캐릭터 애니메이터  

[인터뷰365 김리선 기자] "돌이켜 생각해보면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애니메이터가 제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임승후(1973년~)씨는 캐나다 밴쿠버에 위치한 유명 애니메이션 회사 '소니픽쳐스 이미지웍스'에서 수석 캐릭터 애니메이터로 활약하고 있는 부산 출신 '토종' 한국인이다. 캐릭터 애니메이터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동물 등의 캐릭터에 표정 변화서 부터 대사, 성격, 속마음까지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안정된 직장인의 삶을 버리고 미국으로 애니메이션 유학을 떠났다. 그때 나이 33세. 오랜 기간 마음 속 깊이 묻어둔 애니메이터란 꿈을 위해 무작정 떠난 유학길이었다. 

진로까지 바꿔가며 남들보다 늦은 출발선에서 시작한, '모험'에 가까웠던 도전이었다. 그러나 간절함과 절실함으로 애니메이터의 외길을 걸은지 10여년. 

그는 '캣츠 앤 독스2'(2010)를 비롯, '언더월드4:어웨이크닝'(2012), '19곰 테드2'(2015), '수어사이드스쿼드'(2016), '고스트 버스터즈'(2016), '스머프:비밀의숲(2017), '토르:라그나로크'(2017), '셜록놈즈'(2018) 등 다수의 히트작에 참여해왔다. 치열한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오직 실력만으로 이뤄낸 성과다. 

비자 때문에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뻔했던 위기도 겪었고, 모국어가 아닌 영어의 미묘한 뉘앙스 파악을 위해 지금도 영어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그다. 임 씨는 "실패를 망설이지 말고 도전을 두려워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임 씨가 애니메이터로 참여한 '스파이더맨:뉴 유니버스' 국내 개봉에 앞서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고 있는 그를 이메일 인터뷰로 만났다.

임승후 캐릭터 애니메이터  

◆부산 출신...캐나다 밴쿠버 '소니픽쳐스 이미지웍스'서 수석 캐릭터 애니메이터로 근무

-캐릭터 애니메이터는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담당하나. 

한 편의 애니메이션 제작에는 최소 오백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감독과 프로듀서, 수퍼바이저, 매니저 등은 물론이고 아티스트만 살펴 보더라도 콘셉트 아티스트, 스토리보드 작가, 모델링 아티스트, 애니메이터, 라이팅, 특수효과, 합성 등 십여 가지가 넘는 세부 포지션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애니메이터는 영화 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을 작업한다. 자동차 일수도 있고 물, 불, 동물, 나뭇잎인 경우도 있는데, '캐릭터 애니메이터'는 그중에서 사람이나 동물 등,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를 담당한다. 걷고 뛰는 물리적인 동작에서 부터 표정변화, 대사, 성격, 속마음까지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 때문에 연기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쉽게 말하자면 애니메이터들은 영화 배우, 아티스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얼굴과 목소리가 영화에 나오는 대신, 컴퓨터 그래픽으로 대신 표현된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애니메이터들은 영화에 쓰이는 장면(shot)들 을 받아서, 캐릭터의 대사와 감정, 연기 동선을 분석하고 컴퓨터로 그 작업을 완성하는 일을 한다. 애니메이터는 할리우드 영화판에 '얼굴없는 배우'라고 불리는 이유기도 하다.  

-현재 수석(시니어) 캐릭터 애니메이터로 근무하고 있는데  

2014년 '소니픽쳐스 이미지웍스'에 입사할 때부터 시니어 애니메이터로 근무해왔다. 시니어 캐릭터 애니메이터는 주로 팀별로 부여받는 시퀀스에서 스토리나 연출상 상당히 중요한 장면이나 기술적으로 매우 복잡한 장면들을 작업한다. 또 신입 애니메이터들이 작품에 투입될 때 길잡이가 되어주는 역할도 한다. 간혹 연기 지도를 해주거나 애니메이션 기법을 전수해주기도 한다. 현재 '스파이더맨:뉴 유니버스'를 끝내고 소니의 내년 개봉작 '앵그리버드 더 무비2'에 참여하고 있다.  

-몸담고 있는 '소니픽쳐스 이미지웍스'는 어떤 곳인가. 

소니픽처스의 영화사업부에 속해 있는 계열사 중 하나로, 소니픽쳐스의 애니메이션 제작이 주요 업무다. 원래 미국 LA에 본사가 있었는데, 최근 회사 전체를 캐나다 밴쿠버로 이전했다. 현재 장편 애니메이션 회사로는 캐나다에서 제일 큰 회사로 알고 있다. '호텔 트랜실베니아 시리즈',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이모티 더무비', '스머프: 비밀의 숲' 등을 제작했고, 워너브라더스 애니메이션의 '아기배달부 스톡스(Storks)', '스몰풋(Smallfoot)' 처럼 다른 영화사의 프로젝트도 의뢰받아서 제작하기도 한다. 

임승후 캐릭터 애니메이터는 "애니메이터들은 영화에 쓰이는 장면(shot)들 을 받아서, 캐릭터의 대사와 감정, 연기 동선을 분석하고 컴퓨터로 그 작업을 완성하는 일을 한다"고 설명했다. 직접 연기를 하는 임승후 씨의 모습.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 있다면. 

먼저 당연히 이번 작품 '스파이더맨-뉴 유니버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장 최근에 끝내기도 했고, 오랫동안 힘들게 작업했다. 일반적으로 한 작품에서 캐릭터 애니메이션 작업은 짧게는 4-5개월, 길어도 7-8개월이면 끝이 나는데,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에만 1년이 넘게 걸렸다. 애니메이터 인원은 소니의 기존 작품들이 100-120 명 수준인데 비해 무려 160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만들면서도 성공에 대한 기대가 커서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다. 

'19 곰 테드 2'도 내겐 남다른 작품이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 가족 관람객을 대상으로 제작하다보니 비슷한 스토리에 아기자기한 움직임과 영상을 추구하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성인 유머를 마음껏 다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색다른 경험이었다.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점이 있다면.

제가 땀흘려 작업한 장면에서 관객들이 웃고 박수치거나 눈물을 흘릴 때 정말 그때만큼 감동스러울 때가 없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 제 이름이 스크롤되며 올라갈 때 행복하다. 

픽사의 브래드 버드(Brad Bird) 감독이 'Pain is temporary, your name is forever.' 라고 말한 것처럼 '아 이제 또 이름 하나 영원히 새겼구나' 하는 안도감과 후련함을 느낄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다. 

-현재 소니픽쳐스 이미지웍스가 위치해 있는 캐나다 밴쿠버를 비롯, 미국(티펫 스튜디오, 루마 픽처스), 캐나다(메쏘드 스튜디오), 호주(일로라), 영국(미크로스 애니메이션) 등 해외 다양한 국가에서 애니메이터 경험을 쌓아왔다. 해외 유명 회사 입사에 성공한 비결이 있다면.

일단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다. 운도 많이 따라 줬고. 지금은 웬만한 학교는 다 전공과정이 개설되어 있는데다가, 유수한 온라인 코스도 많이 생겼는데, 내가 유학했던 때만 하더라도 미국에서도 전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는 곳이 많지 않았다. 제가 2008년 졸업한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 오브 아츠 (AAU) 외에, 플로리다의 링링(Ringling), LA 의 칼아츠 (CalArts), 뉴욕의 SVA 정도가 손에 꼽혔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3D 애니메이션이 막 붐을 일으키고 영화 CG 특수효과 기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필요할 때 였다. 일단 시작하는게 어렵지, 경력이 쌓이면 계속 일이 끊이지 않더라. 여러 회사의 제안 중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밴쿠버나 런던 같은 CG 허브 도시들에서 쭉 살수도 있고, 저처럼 여러 나라를 두루두루 살아보는 경험도 할 수 있다. 거처를 옮겨 다니는게 좀 번거롭긴 하지만, 세상 어떤 직업이 이렇게 세계 각지에 있는 대도시마다 살아볼 기회를 제공하겠나. 저 같은 경우는 그 때 마다 제가 하고 싶은 작품을 직접 선택하다 보니 여러 나라를 두루 경험할 수 있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어딘가. 

1973년에 부산 동래 온천동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위해 뒤늦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현재는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 나이로 이제 46세인데, 여기선 나이를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니 나이를 이만큼 많이 먹었나 느껴질 때가 많다.  

임승후 캐릭터 애니메이터가 작업에 참여한 (맨 위부터) '스머프:비밀의 숲'(2017), '이모티 더 무비'(2017), '19곰 테드 2'(2015) 장면 캡쳐

◆애니메이션 공부 위해 30대 유학 결정...무모했지만 용기있던 도전

-대학(성균관대학교)에서는 미술과는 거리가 먼 물리학을 전공했고, 대학 졸업 후엔 애니메이터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기도 했는데. 

2001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온라인 게임 회사에 경력직 웹디자이너로 입사 한 후 다음 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의 러브콜을 받고 이직해서 2여년간 게임 분야에 몸담았다. 그러다 예전부터 꿈꿔왔던 애니메이션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에 33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났다.  

-진로까지 변경하며 결정한 30대의 유학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 당시 학생들 중에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쌓아왔던 한국에서의 인맥이나 사회적 기반, 재산은 모조리 다 포기하고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 셈인데, 실패하면 정말 인생 공부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남는게 없는 게임이었다. 무슨 배짱으로 온 건지 지금도 가끔 생각하면 식은 땀이 난다.(웃음) 그 절실함과 위기감으로 지금껏 버텨 온 건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그림이나 만화에 관심이 많았던 건가. 

어릴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것 같다.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까지 교내 뿐 아니라 전국 대회 미술상을 휩쓸었다. 어느날은 '질서'를 주제로 한 내용을 표현해야 과제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4컷 짜리 그림을 그려갈 때, 난 60페이지가 넘는 만화책 한 권을 만들어 가서 1등 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만에 다 그렸던 것 같다. 칼라 표지도 직접 만들고, 스토리도 제가 짜고 주인공들도 다 각양각색으로 그려넣고...순수 미술분야보다는 만화주인공이나 슈퍼 히어로에 관심이 더 많았다. 

고교시절 때는 '백 투더 퓨처' 영화를 3편까지 본 다음 날, 수업 한시간 내내 교실 뒷쪽 책상에서 선생님 몰래 노트 한권에 가득히 후속편 가상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었다. 타임머신 설계 도면을 그려놓고 뿌듯해하며 '나중에 커서 영화감독이나 될까',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한번 만들어봐야지' 이런 막연한 꿈을 꿨다. 그러다 선생님한테 들켰고, 따귀를 맞았는데 뺨에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였다. 80-90년대 당시에는 공부 잘해서 의대, 법대 가는게 성공하는 길이라고 강요 받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서 꿈을 접게 된건가. 

대학을 가서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선생님들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국영수 위주로 죽어라 공부만 했다. 또 중 3때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가정환경이 형편없이 나빠졌었다. 2남 1녀 중 장남인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서 미술은 점점 멀어져갔다.  

◆치열했던 20대...대학 졸업 후 웹 디자이너로 활약 '터닝 포인트' 

-그런데 물리학과는 의외다. 

대학 입시 배치표를 보다가 물리학이 눈에 들어오더라. 이 과를 전공하면 '백 투더 퓨처' 영화에서 처럼 날으는 자동차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웃음) 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하다보니 점점 물리학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더라. 당연히 첫 학기 끝나고 받은 성적표는 처참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한 상태여서 틈틈이 학비와 생활비도 벌어야 했기에 전공 공부는 뒷전이었다. 당시 방송국 엑스트라일을 했는데 유명 연예인들과 촬영하고, 방송에 얼굴도 비추고 하니 재미있더라. 그래서 배우 오디션도 몇번 가보고, 대학가요제 나가려고 악기를 배우고 곡도 쓰고 그랬다. 친구들하고 반지하 연습실 빌려서 락밴드 생활도 잠시 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모조리 1차 예선 탈락이었다. 

그러다 군대를 갔다 왔고, 정신차려 보니 먹고 사는길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제가 잘 하는게 무엇일까 내린 결론은 결국 미술쪽인데, 그림을 그려서 '밥 벌어' 먹을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알아보다가 웹디자인 쪽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거다.

-웹디자인 업계는 어떻게 발을 들여놓게 됐나. 

군대가기 전 포토샵과 HTML을 공부했는데, 제대하고 나니 전 세계가 벤처붐이더라. 덕분에 웹디자이너 수요가 폭발해서 남들 부럽지 않게 돈을 벌 수 있었던 시기였다. IMF 때도 잘나가는 웹디자이너로 남부럽지 않게 지냈고,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스카웃 제의도 들어올 정도 였으니까. 그런데 웬걸, 대학을 졸업하니까 귀신같이 벤처붐이 사그러 들더라. 

취직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몇 달을 구직 끝에 겨우 강남역 오피스텔에 입주해 있는 조그마한 게임회사에 웹디자이너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게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놓은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다.

아티스트는 나 혼자였는데, 원래 하기로 했던 웹디자인은 물론이고 모든 아트워크를 다 만들어야 했다. 당연히 게임 속에 들어가는 애니메이션 작업도 했는데, 내 적성에 딱 맞았다. 신나게 했다. 

그 당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애니메이션 작업에 필요한 것들을 다 경험해봤더라. 그림을 그릴 줄 알고, 영화 시나리오 쓰는 것 좋아하고, 어설프게라도 연기와 음악 한다고 기웃거렸고, 컴퓨터도 다룰 줄 알았으니까. '그래 이게 내가 올인할 길이다'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열악했던 시절이었다. 일본 2D 애니메이션 하청하는 곳들이 몇군데 있었는데, 동화 한 장 그리면 천원 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면 한달에 월급 60만원도 못 받는다. 그 당시엔 차마 그쪽에 뛰어들 엄두를 못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애니메이터가 운명이었던 것 같다. 제 인생을 구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워 넣은 느낌이랄까. 

애니메이터들과 함께 한 임승후 캐릭터 애니메이터(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사진=임승후 씨 제공

-해외 메이저 회사에 활동하는 한국인 애니메이터가 많은 편인가. 

여러 나라의 회사를 많이 근무해 봤지만 소니픽쳐스 이미지웍스 만큼 한국인이 많은 곳이 없다. 내가 입사 했을 당시에도 최소 열 명 정도의 한국인이 이미 근무하고 있었고, 많을 때는 스무 명도 넘은 적이 있었다. 흥미로운 건, 예전에는 대부분 미국이나 캐나다 유학생 또는 교포 출신이 많았었는데, 요즘은 직접 한국에서부터 취직해 오시는 경우도 많더라. 그만큼 한국의 CG 실력이 헐리우드에 맞먹는 수준이라는 반증이기도 해서 뿌듯하다. 

제가 알기로 현재 거의 모든 할리우드 메이저 회사에 한국인 애니메이터분이 최소 한 분 이상씩 몸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애니메이터인 픽사의 김재형씨, 디즈니의 최영재씨는 저희 학교(AAU) 동문이기도 하다. 라이팅이나 모델링, 스페셜 이펙트(FX) 분야로 넓혀보면 이제는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한국인들이 할리우드에서 맹활약 하고 있다. 전 세계로 배급되는 대작 영화들에 한국인의 이름이 영원히 새겨 진다는 것에 자부심을 많이 느낀다. 

-한국이 아닌 해외에 정착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처음에 유학을 시작할 땐 미국 회사에서 2-3년 경험을 쌓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할리우드 본고장의 기술과 환경을 체험하고선 한국에서 제대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 당시 한국은 '뽀로로' 같은 유아 애니메이션으로 돈을 쓸어담던 때 였는데, 그러다 보니 거의 모든 회사가 아동용 컨텐츠에 올인을 하고 있었고, 여기서 배우고 경험한 지식과 경험을 다양하게 활용할 곳이 마땅치가 않더라. 그래서 조금만 더 경험 쌓고 기회 되면 가야지 하고 계속 머물다 보니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게다가 한국과는 다른 근무 방식이 나하고 잘 맞더라. 야근은 필요한 경우 아니면 하지 않는다. 조직보다는 개인과 가족 우선이고, 밤새도록 마시는 회식 문화도 없다. 아티스트라서 사내 정치에 휘말릴 일도 드물고 제가 맡은 일만 잘 하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참여하는 작품들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들이다보니 자부심도 생기고.

회사 분위기도 매우 자유롭다. 현재 일하고 있는 '소니픽쳐스 이미지웍스'의 경우 본인에게 주어진 일만 제 때 잘 해내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출퇴근 시간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고, 사람들도 친절하다. 무엇보다 실력 좋은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서로 배울 점도 많다.

◆소니 입사 후 다섯번째 작품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새로운 시도...한땀 한땀 수공업 맞먹는 작업

-이번에 작업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한국에서도 개봉한다. 원작자 스탠리가 생전 인터뷰에서 스파이더맨 캐릭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을 정도로 기대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에 참여한 소감이 궁금하다.

LA에서만 머물던 감독들이 얼마 전에 밴쿠버에 방문해서 마지막으로 애니메이터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한 해 동안 애니메이션 작업 리뷰을 담당했던 밥 퍼시케티(Bob Persichetti) 감독이 제 얼굴을 보자마자 "드디어 당신 얼굴을 실제로 보는구나" 라며 반갑게 환영하더라. "당신 아니었으면 이렇게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며 애니메이션 작업물에 대한 찬사의 말을 쏟아내는데, 정말 그동안 고생했던 기억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소니에서는 영화 개봉을 하기도 전에 정식으로 후속작과 스핀오프를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언제 시작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다시 이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 

최근 참여한 '스파이더맨-뉴 유니버스' 벽지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임승후 캐릭터 애니메이터

-이번 작품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소니 입사 후 다섯 번째 작품이다. '스파이더맨-뉴 유니버스' 작업을 너무나 하고 싶어 수퍼바이저에게 직접 이메일까지 보냈다. 기존에 제가 한 작업물들을 보여주면서 왜 내가 이 작품에 캐스팅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조목 조목 적어서 보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얼마 후 정말로 프로덕션에 합류하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그 때는 상상도 못했다. 이렇게 어려운 작품일 줄.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

3D 장편 애니메이션은 픽사가 원조다보니, 지난 몇 년 간 모든 애니메이션 회사들의 비주얼은 픽사 스타일로 고정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 속에 '뉴 유니버스' 만큼 파격적으로 기존 법칙들을 모두 무시해 버리는 작품은 없었다. 모두가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야 했고, 아티스트는 물론 수퍼바이저나 감독들도 올바른 방법을 찾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10년 넘는 경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내가 이제껏 애니메이션을 헛했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들었을 정도니까. 실제로도 작품이 끝난 후 아직까지 휴가에서 복귀 하지 않고 마음을 추스리고 있는 동료들이 많다. 1년 동안 그야 말로 한땀 한땀 가내 수공업에 맞먹는 수준으로 작업을 했었고, 작품 끝날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컴퓨터를 끄고 싶었다니까. 하하. 그런데 영화를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극찬하는 걸 보니 뿌듯해지더라. 

임승후 캐릭터 애니메이터가 작업에 참여한 '스파이더맨-뉴 유니버스' 트레일러 영상 스크린 장면

-이번 작품 스타일이 기존 작품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했는데,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이 애니메이션 제작의 모토가 '만화책을 움직이게 만들자(Comic books come to life)'였다. 그래서 실제로 아티스트와 애니메이터들이 마블코믹스 등의 수퍼히어로 관련 만화책을 엄청나게 참고했다.

코믹북 작가들이 지면에서 사용하던 기법들, 예를 들면 하프톤, 스피드 라인, 강조선, 말풍선 같은 건 물론이고, 출판 매체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단점, 예를 들어 잉크 번짐, 칼라 오프셋 등의 문제점까지 예술적으로 차용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고, 영상화를 위해 하나 하나 분석하고 연구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수많은 기막힌 기법들을 애니메이션에 적용할 수 있었다. 내부 리뷰 시간마다 갖가지 아이디어들이 계속 샘솟았고,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더 기발한 작업물이 생산되는 순환 구조가 일년 내내 이어졌다.  

-특히 생생한 캐릭터 묘사와 화려하고 감각적인 비주얼이 눈길을 끌더라.

애니메이션 팀으로 넘어오기 전, 컨셉아트 팀에서 기본적인 캐릭터의 형상은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초기 단계에서부터 어떻게 하면 코믹북 스타일의 비주얼을 제대로 표현할까 많은 연구를 했다. 

컴퓨터 캐릭터를 코믹북 스타일의 감각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야 해서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픽사나 디즈니 스타일의 애니메이션 기법들을 쓸 수가 없었다. 

처음에 미처 예측 못한 형상을 표현하다보니까 시스템이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예를 들자면, 제가 맡았던 샷 중의 한 장면인데, 한 캐릭터가 망토를 펄럭이며 달려오는 샷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망토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움직이도록 처리하면 그 움직임이 우리가 추구하던 스타일과는 너무 거리가 있어보였다. 결국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일일히 수작업을 해야 했다.  

또 감독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주요 캐릭터들의 연기를 지시를 했기 때문에, 작업 전 많은 애니메이터들이 직접 카메라 앞에서 등장 인물을 연기한 영상을 감독들에게 보여주고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100여명이 넘는 애니메이터가 동시에 작업을 하다 보니 매일 같이 레퍼런스 촬영실은 '예약 전쟁'이었다. 

대신에 리뷰 시간 마다 이 영상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 했다. 트레일러 중 하나에 피터 파커가 햄버거를 먹는 장면이 있는데, 동료 애니메이터가 그 장면을 촬영한 걸 다 같이 봤다. 햄버거를 너무 맛나게 먹는 영상 덕분에 동료들끼리 점심 시간에 회사 부근 맥도날드로 달려간 적도 있다. 하하. 

◆ '배우고 겸손하자'는 생각으로 걸어온 한길...'절실함'이 현재까지 오게한 원동력

-애니메이터로 본인만의 철학이 있다면

일 할 때마다 '항상 배우고 겸손하자'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조금만 자만하게 되면 작업한 영상에서 드러나더라. 뭔가 어색해 보이는 부분들이 하나 둘 있으면 주변 조언을 듣고 레퍼런스를 참고해 수정 해야하는데, 자만심에 머리속으로만 결론 내고 진행하면 나중에 다 티가 나더라. 결국 아무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결과물이 나오는 거다. 

사실 얼굴을 드러내고 촬영하는 영화 배우들과 달리, 사람들한테 얘기하지 않은 이상 그 장면을 누가 작업한지는 모른다. 작품이 끝나면 그 장면은 영원히 남지 않나. 내 스스로 못 참겠더라. 눈에 계속 그 부분만 보이고 얼굴이 후끈거린다.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부분이 없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 아티스트가 가진 일종의 장인 장신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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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픽처스 이미지웍스 사무실 내부 팬아트 게시판/사진=임승후 씨 제공

-해외에서 일하면서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포기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나. 

10년을 넘게 외국에서 살았지만 아직도 영어 쓰는 것과 문화 차이를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했다. 여기서 태어나 자라지 않았으니 평생 힘들 것 같다. 대사에 숨은 미묘한 뉘앙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가 있다. 단어에 숨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여기만의 문화가 깊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한국 영화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씨의 "밥은 먹고 다니냐?"란 말 속엔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 한국 사람이면 저 상황에서 그 대사가 가진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한국 문화에 서투른 외국인이라면 그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고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할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영어 공부를 손에 놓치 않고 있고, 문화적인 것들도 많이 경험하려 한다. 처음엔 한국 문화와 많이 다른 부분들이 많아서 꽤나 고생했는데, 요즘은 여기 사람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매우 많아져서 많이 편해졌다. 

또 비자 문제도 넘어야 할 가장 산이다. 지금은 캐나다 영주권을 가지고 있어서 한층 편해졌는데, 취업비자 신분으로 회사를 다닐 때는 갑자기 해고되거나 프로젝트가 취소되어서 회사를 나가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들을 안고 다닐 수 밖에 없다. 어떤 이유로든 그렇게 되고 나면, 은행 잔고 걱정은 뒷전이고 언제까지 그 나라에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부터 먼저 해야 하니까.  

나도 체류 신분 때문에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번거롭게 외국인 뽑는 것 보다는 현지인을 채용하는게 당연하니까. 아마 외국에서 일해본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 같다.

비자 때문에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위기도 있었는데, 당시 학교를 다니던 아내의 동반비자 신분으로 바꾸면서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면 평생 억울해서 못 살것 같아"라며 끝까지 버텼다. 아내가 내 서포트까지 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정말 미안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실력을 더 키우는 방법 밖에 없었다. 더 좋은 작업물로 경쟁에서 훨씬 우위에 서는 것 뿐이다. 회사에서 비자 지원해 주고 이 사람을 뽑을 이유가 충분할 만큼.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참 오기로 버텼구나 하는 생각 밖에 안난다. 

-10여년간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현재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면.

절실함. 저는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번도 제가 원하는걸 한 번에 가져본 적이 없는것 같다. 그런데 또 몇 번 시도하면 되더라. 그게 반복되다 보니 포기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오랜 해외 생활이 외롭지는 않은가.

가끔 친구들이 그리울 때가 있지만, 곁에 있는 아내가 많은 힘이 되어 준다. 또 이제 인터넷을 통해서 필요하다면 언제든 대화할 수 있고, 한국 소식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으니까.

◆ 망설이지 말고 도전하라 

-애니메이터가 되고픈 이들에게, 해외에서 성공한 선배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감히 제가 성공한 애니메이터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가야 할 길도 한참 남았고, 배울 것들도 너무나 많으니까. 다만 먼저 시작한 선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도전을 두려워 하지 않았으면 한다. 특히 젊은 사람이 하는 도전은 특권 아닌가. 그 권리를 포기해선 안된다. 실패하면 또 도전하면 된다. 

나는 젊을 때 도전을 겁내고 망설여서 남들보다 늦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10년만 일찍 애니메이터에 도전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한다. 애니메이션은 평생 공부해도 모자르다. 몇년 공부하고 은퇴할 때까지 써먹을 수 있는 그런게 아니다. 평생 겸손하게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는 마음가짐이 변치 않는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 생각한다.

-해외 취업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다른 직종에 비해 영어 능력도 많이 필요하고, 체류 신분 문제에 대해서도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해외 생활이 생각만큼 만만치 않다. 적응을 못해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많고, 외로움과 언어차별, 인종차별과도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미리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준비하라고 전해주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워킹 홀리데이 등을 통해서 짧게라도 해외 생활을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향후 목표나 포부가 있다면

기왕 지금껏 할리우드에서 경력을 쌓아 왔으니, 기회가 닿는다면 제 이름을 여기 본고장에 한번 굵게 새겨 보고 싶은 바람이있다. 그게 제 개인 작업을 통해서든, 아니면 회사에 소속되어 이루는 것이든, 계속 쉬지 않고 달려가다보면 언젠가 그런 기회 한번쯤 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사진=임승후 씨 제공

김리선 기자
김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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