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입양인 대모'로 살아온 40년...美 한인입양인 수잔순금콕스
[인터뷰] '입양인 대모'로 살아온 40년...美 한인입양인 수잔순금콕스
  • 김리선 기자
  • 승인 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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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1956년 4살 되던 해 미국으로 입양
-1976년 홀트 국제 아동복지회에서 비상근 근무자로 인연 맺은 후 40여년간 홀트 재단에서 몸담아
-현재 미국 홀트 인터내셔널 부회장·국제 홀트복지회 국장으로 활약
입양 기관인 홀트 재단에 몸담으며 40여년간 입양인들을 위한 삶을 살아온 수잔 순금 콕스 홀트 인터내셔널 부회장/사진=박상훈 기자

[인터뷰365 김리선 기자] 한국 전쟁 직후 1956년 4살의 어린 소녀. 한국 전쟁 당시 참전한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됐다. 홀트 재단이 해외 입양을 시작한 첫 해에 미국으로 보내진 1세대 입양아였다. 

그리고 60여년이 흐른 현재 그 소녀는 '입양인의 대모'로 불린다. 입양 기관인 홀트 재단에 몸담으며 40여년간 입양인들을 위한 삶을 살아온 수잔 순금 콕스(Susan Soon-keum Cox, 1952~) 홀트 인터내셔널 부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수잔 순금 콕스 부회장은 1976년 해외입양아로는 처음으로 홀트 국제아동복지회에서 정책결정을 하는 이사회 멤버로 홀트 재단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983년부터 본격적인 입양 관련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가 기획해 창설한 한국 입양인들의 국제모임은 1999년 첫 모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2018 세계한인회장 대회 참석차 방한한 그를 만났다. 그의 명함엔 '순금'이란 미들네임(중간이름)이 적혀 있었다. 인터뷰 중 손주 사진을 보여주며 행복해하던 콕스 부회장은 "손자 이름도 미들네임이 한글"이라며 활짝 웃었다. 

입양 기관인 홀트 재단에 몸담으며 40여년간 입양인들을 위한 삶을 살아온 수잔 순금 콕스 홀트 인터내셔널 부회장/사진=박상훈 기자

-명함에 적인 '순금'이란 이름이 인상적이다. 한국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순금'은 입양기관에서 알려준 한국 이름이었는데, 40세가 되기 전엔 '수잔'이란 이름으로 살아왔다. '순금'이 생모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인지, 기관에서 지은 건지 확실치 않았고, 제 양부모님께서 '수잔'이란 이름을 지어주셨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줄곧 살아왔다. 그러다가 생모를 찾았는데, 순금이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금'이 '순수한 금'(pure gold(純金))이란 의미임을 알게 된 순간, '아, 어머니께서 나를 '순금'이라 이름을 지어줄 만큼 소중하게 생각하셨구나'란 생각에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내겐 특별하고 소중했다. 40세가 된 내 생일날 이름에 '순금'을 같이 쓰기 시작했다. 

-생모를 직접 찾아나선건가.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없었나.

사실 처음엔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내가 1956년도에 미국으로 입양이 됐을 당시 어머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고 너무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백혈병을 앓고 있던 한국인 입양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생모를 찾는 걸 도와준 적이 있다. 그 친구 역시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 된 친구였다. 생모를 만났는데 그 친구 어머님이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 매일 가슴 속에 너를 품고 생각했다"는 말을 하셨다더라.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도 어머니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를 위해 그렇게 힘든 큰 선택을 한 어머니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찾아 나서게 됐다. 

-어떻게 찾았나.  

1993년에 인천의 한 신문에 엄마를 찾는다는 광고를 싣게 됐다. 그 당시 알고 있었던 정보 많지 않았다. 내가 인천에서 왔던 것과, 어릴 적 여권 사진, 이름 뿐이었다. 그래서 신문에 내 어릴 적 사진과 한국 이름, 그리고 1956년에 입양이 됐다는 사실과 함께 누구라도 아는 사람이 있다면 홀트에 연락해달라고 광고를 냈다. 얼마 후 가족이 연락을 해왔는데,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서는 이부 형제를 만났다.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심정이 어땠나. 

비록 내가 부모님을 찾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긴 했지만, 감당하기 힘들었다. 막상 일이 닥치기 전까지 그 감정은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받아본 어머니의 생전 사진에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젊은 여성이 아닌 나이 드신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굉장히 힘든 삶을 보내셨을 꺼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메어지더라. 미국에서 자라면서 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나를 입양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전쟁이 끝나고 힘든 환경 속에서 외국인과 낳은 아이를 키우긴 힘들었을 테니까. 그런데 막연하게 생각했던 이런 생각들이 사실로 확인된 순간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앞으로 살면서 정말 열심히 제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만을 위해서 사는게 아니라, 어머니의 삶을 위해 두 명의 몫으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8. 미국에 처음올때 1956년 한국에서 의 여권용 사진
1956년 미국 입양 당시 수잔 순금 콕스의 한국 여권용 사진/사진=수잔 순금 콕스 제공

-입양 기관인 홀트 재단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976년 당시 홀트 국제아동복지회 측에서 먼저 제안을 받았다. 이사회 멤버로 선발된 첫 입양인 출신이기도 하다. 입양관련 기관을 하는 홀트에서 당시 입양인 출신 임원이 한 명도 없었기에, 적극적으로 입양인 출신 이사회 멤버를 뽑으려 했던 거다. 다른 일들을 하면서 중요한 정책 결정이 필요할 때나 회의가 있을 때마다 대표해 참석하면 되는 비상근 근무자로 일을 했다. 임원진 일을 몇 년 하다가 198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홀트기관에 몸담아 업무를 보게 됐다. 

-일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었다면

요즘은 입양인 출신분들이 입양기관에 많이 일하고 계시지만, 내가 처음 선발되어 일하게 됐을땐 동떨어진 섬 같은 기분이었다. 홀로 입양아란 경험을 겪었기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내가 입양인들을 대표해야 한다는 생각에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기도 했었고. 

-40여년간 홀트 재단과 함께 해왔는데. 뿌듯했던 점이 있다면.

벌써 그렇게 됐나? 믿을 수가 없다. 40년이라니(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99년 워싱턴 DC에서 한국에서 입양된 분들이 다 함께 교류하는 '한국 입양인들의 국제모임' 행사를 열었을 때다. 홀트에서 처음 개최한 자리였다. 업무를 보기 위해 워싱턴 DC를 방문했는데, 그곳에 세워진 6.25전쟁기념관인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을 찾게 됐다.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아 입양인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그 곳에 대해 얘기를 했더니 그 친구가 '언젠간 꼭 보러가고 싶다'고 말하더라. 이 말을 듣고 전역에 있는 우리 같은 한국에서 입양된 분들이 함께 그 장소를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모임을 추진하게 된 거다. 1999년 첫 모임 이후 워싱턴을 시작으로 노르웨이, 한국 등 전 세계 각지에서 모임을 개최하며 지금까지 20여년 간 이어 오고 있다. 

수잔 순금 콕스 부회장이 추진했던 1999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한국 입양인들의 국제모임. 1999년 첫 모임 이후 워싱턴을 시작으로 노르웨이, 한국 등 전 세계 각지에서 모임을 개최하며 지금까지 20여년 간 이어 오고 있다. /사진=수잔 순금 콕스 제공
워싱턴디시 한국전쟁기념관 기념식때
미국 워싱턴 DC 6.25전쟁기념관인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Korean War Veterans Memorial) 기념식에 참석했을 당시 수잔 순금 콕스 인터내셔널 부회장의 모습./사진=수잔 순금 콕스 제공

-한국 입양인들을 위한 다방면의 활동을 해왔다. 현재 미국 오리건주 유진 주재 대한민국 명예 영사관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엿보인다.

나의 어머니가 한국 분이셨기 때문에 특별한 애정이 있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입양을 많이 보내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다른 나라보다 조금 더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국가가 한국이기도 하고. 

-한국이 해외 입양 대국으로 불리는 것에 대한 생각은.

한국은 해외 입양을 선호하거나 좋아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보내야만 한다는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 1976년 홀트에서 첫 임원회의에 참석했을 때 한국에서는 해외입양을 보내지 않기 위해 애쓴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한국 측 태도를 고맙게 생각한다. 해외 입양을 최대한 보내려 하지 않지만, 아이는 보육원이나 고아원같은 아동복지시설보다는 가정 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을 중요시 생각하는 입장이다. 나 역시 시설이 아닌 가정이란 울타리안에서 아이가 성장하는게 더 좋다고 본다. 

수잔 순금 콕스 홀트 인터내셔널 부회장 

-해외 입양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해외입양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은 확고하다. 그러나 시설에 보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아이들에겐 가정에서 사랑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살 권리가 있다고 본다. 과연 시설에서 살고 있는 그 아이의 개인적인 고충이나 아픔을 누가 세심하게 보듬어주고 들어줄 수 있을까. 아이들에겐 가정이란 울타리 속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나 역시 완벽한 환경에서였다면 어머니와 함께 자랐을 테지만, 현실적인 세상에서는 불가능 했기 때문에 미국으로 보내졌다. 여기서의 핵심은 미국에 보내졌다는 사실보다는 내게 가정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터뷰 중간에 해외 입양 직전 4살 때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가정안에 있었기에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깨달으며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양부모님들 막 미국에 도착했을때
1956년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양부모님과 함께한 수잔 순금 콕스/사진=수잔 순금 콕스 제공

-입양 후 미국에서의 삶은 어떠했는가. 성장과정이 궁금하다. 

양부모님이 다섯 명의 아이를 키우셨다. 내가 첫째였고, 1년 뒤 남동생을 입양하셨다. 이후 세 동생을 낳으셨다. 외모는 달랐지만, 차별을 받거나 다르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양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

작은 동네에서 자랐는데, 나 혼자 아시아인이었다. 딸이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님은 한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았다. 그러다보니 나 역시 자연스럽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자랐다. 한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건 없었지만, 희미하게나마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을 가졌던 것 같다. 삶의 방식이나 사고 방식이 다르고, 한국에 대한 지식이나 문화를 잘 모른다 해도 감정이나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랄까. 내가 이렇게 갖고 있는 한국적인 정체성이 아마 내 아이들에게도 전달됐던 것 같다. 내 딸 역시 자녀에게 한국어 미들 네임(중간 이름)을 지어주더라. 내겐 딸과 아들이 낳은 총 4명의 손주들이 있는데 이들 역시 한국인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손주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수잔 순금 콕스 부회장/사진=수잔 순금 콕스 제공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희망이 있다면

열정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내겐 큰 행복이자 축복이었다. 애정을 갖고 일을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살면서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싶다. 입양된 아이들이 성장해 어른이 되고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치 제자가 성장해 성공한 모습을 본 스승의 마음처럼 뿌듯하고 뭉클하다. 

일각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고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입양이 아동 인권 침해라는 의견도 있다. 과연 시설에 있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넌 가정에서 자랄 권리가 없는 사람이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커리어적인 부분에서는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인권 약자 중에서도 아이들이 마음 한켠에 남는다. 이들을 위해 앞으로도 관심을 쏟고 싶다.  

 

 

김리선 기자
김리선 기자
interview36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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