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영화사 동아수출공사의 이우석(李于錫 1935∼ )회장은 한국영화산업의 1970∼80년대를 견인한 거목의 제작자 중 한 사람이다. 

서울 강남대로(도곡동)에 있는 동아수출공사는 1967년에 창업되어 반세기를 넘어 선 충무로 토착자본의 영화사다. 대기업 상업자본에 의해 영화산업이 좌지우지 되는 시대에 힘겹게 살아남아 순수 영화제작자의 열정과 전통을 대변해주는 인물이 동아수출공사의 이우석 회장이다. 

흥행에 성공하고 국내외 각종 영화상을 수상하며 작품의 예술성에서도 평가받은 <이어도>(김기영 감독), <바람불어 좋은날>(이장호 감독), <세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김호선 감독), <만추>(김수용 감독), <적도의 꽃>과 <깊고 푸른밤>(배창호 감독), <장사의 꿈>(신승수 감독), <겨울나그네>(곽지균 감독), <칠수와 만수>와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감독),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홍상수 감독) 등을 비롯해 동아수출공사가 2013년까지 제작한 영화가 85편에 이른다.

청년 문화의 기수 역할을 한 소설가 최인호도 영화감독이 되어 <걷지 말고 뛰어라>는 자작 시나리오 한편을 동아수출공사에서 만들었고, 일제 강점기 <임자 없는 나룻배>로 민족혼을 일깨운 이규환 감독의 마지막 작품 <남사당>도 동아수출공사가 제작했다.

김지미·안성기·이대근·윤정희·양정화·김혜자·강수연·이덕화·임예진·장미희·정윤희·유지인·김자옥·신일룡·황정리·최윤석·문성근·원미경·하재영·강석우·이미숙·박중훈·배종옥·나영희·박선희 등의 별들이 7080년대 '이우석 제작'의 스크린을 통해 눈부시게 떠올랐다.

한국영화사에서 멜로영화의 대표적인 흥행영화로 꼽히는 <미워도 다시한번>(정소영 감독,제작) 시리즈를 대만에 수출해 그곳에서도 빅 히트, 해외에 영화 한류의 첫 깃발을 올리게 한 주인공도 동아수출공사의 이우석 회장이다.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전설적인 홍콩배우 브루스리(李小龍)의 빈자리를 차지한 청룽(成龍(성룡), 영어명 재키 챈)은 이우석 회장이 무명시절부터 가족처럼 인연관계를 유지해 그의 출연영화를 독점하다시피 국내에 소개했고, 특급 외화 <클리프행어> <007 죽느냐 사느냐> <원초적 본능> <늑대와 춤을> 등을 수입하면서 서울 강남지역 여러 곳에 동아극장 등 복합상영관을 운영하던 전성기도 있었다.

충무로시대 영화인들에게 '이우석의 동아수출공사'는 정도(正道) 운영의 모범 영화사로 평가받았다. 허가된 20개 영화사만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던 시대에 연간 3편의 한국영화 의무제작 편수도 외주 대명 제작으로 대체하던 영화사가 많았지만 그는 고지식할 정도로 자체제작 원칙을 고수했다.

감독과 작가, 배우를 비롯한 영화 제작종사자들의 대우문제에서도 서운한 소리를 듣지 않은 '신사의 인품'으로 신뢰를 받은 제작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영화에 바치고 팔순을 저만치 넘어 선 노 제작자의 가슴에는 보람보다는 못다 이룬 회한과 공허감이 더 깊이 피어오로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의 화려한 영화인생이 예전 같을 수가 없다.

인터뷰 도중 말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며 긴 호흡을 반복하는 그의 표정은 잠깐 동안에 영화와 함께 한 반세기의 내력을 함축해서 말하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성룡이 가장 존경한 한국인,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중)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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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삶의 의지력 심어준 외톨이 소년기

-이 회장의 성장과정이 남달리 불우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해방 전후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대다수 가난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내 고향은 지금 사드기지가 들어 선 곳과 인접한 경북 성주군 초전이다. 해방 전인 1938년 3살 때 부산에서 배를 타고 어머니의 손목에 이끌려 아버지가 징용으로 떠났다가 정착한 일본 규슈지방의 산골로 가서 10살까지 살았다.

그곳에서 학교 다닐 때 일본아이들에게 '조센징'으로 따돌림을 받아 집단구타를 당하는 게 일쑤였다. 그 후유증으로 이비인후과 진료를 평생토록 받고 있다. 나로 인해 가족이 서둘러 귀국했지만 아버지는 일본서 가져온 재산을 떠돌이 도박꾼들에게 털려 우리 가족은 먹고 살길을 찾아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런데 나는 국내 학교(부산 대신동 동신초등학교)에서도 왕따가 되어 친구들의 놀잇감으로 모질게 마음고생을 했다.

우리말이 서툴고 일본말이 먼저 튀어 나오는 언어습성이 반일감정을 자극해 따돌림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솟는 분노가 주먹이었다. 놀림을 당하면 욱하고 한방씩 날리다 보니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나 나 때문에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겠다고 항의를 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붓글씨 쓰기 공부를 하는 중에 학부모들이 나타나 고함을 지르며 나의 벼루와 먹을 교실바닥에 집어던지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초등학교도 옮겨 다니는 불운 속에서 때로는 가출 소년으로 방황의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일생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겪은 일화 중에 구체적인 사례라면

남의 집 어린아이를 봐주고 푼돈을 받거나 잡일거리를 닥치는 대로 하면서 자활의 길을 열어가며 성장했다. 학교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나의 지식과 지혜, 삶의 의지와 철학은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한 조기 사회 체험교육을 통해 터득한 것이 기초가 됐다. 나의 심신이 비바람에 단련되고 단단하게 변해 중심을 잃지 않게 된 것으로 본다.

정규 교육과정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책은 가리지 않고 보고 배워 독학으로 채워진 나의 지식은 사물을 판단하는데 큰 실수를 한 적이 별로 없다.

-영화를 접하게 된 때는?

내 친구가 경남도청 공무원으로 퇴직 후 덕신공사라는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자신의 아버지 회사에 잡일거리를 하는 일자리를 주선해주었다. 유랑생활을 하던 내가 안정된 직장을 가진 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회사가 취급하는 수입품 중에는 외국영화 필름도 있었다. 무역 담당직원들의 어깨너머로 푸치니의 오페라를 소재로 한 프랑스영화 <마농 레스코> 필름을 수입해 오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영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영화산업은 천재들의 일터

-<마농 레스코>가 영화인생의 문고리 역할을 한 것인가?

영화사업의 꿈과 호기심을 열어주고 눈을 돌리게 한 작품이다. 덕신공사에서 영화 수입과정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흥미를 느꼈다. 20대의 나이에 이탈리아 지울리오 델 토레감독의 영화 <물망초>를 수입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무렵 부산 동아극장의 전무로 있던 동갑내기 친구와도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그의 친구들인 해양대 학생들까지 교제 폭을 넓혔다. 해양대가 목포에서 부산 영도로 이전해와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해외 순회실습선을 타고 여러 나라의 항구를 돌면서 사가지고 오는 물건이 많았다. 그 수입품을 내가 대신 시중에 팔아주는 장사를 했다. 일종의 밀수품이지만 세관 신고 절차가 허술할 때라 문제가 되지 않아 적잖게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영화를 수입한 것이다.

-동아수출공사 창업 연도가 1967년이다. 창업 전후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와 몇 개의 영화사를 옮겨 다니면서 영업 간부로 적을 두고 어느 정도 영화사 실무를 익혔다. 1964년 대만에서 개최된 아시아영화제에도 한국영화의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했다. 당시 신상옥 감독이 떠나면서 가져가지 못한 선물꾸러미를 나중에 제작자협회로부터 부탁받고 내가 며칠 늦게 출발하면서 전달해준 기억이 난다. 해외로 나가는 길목이 일본 하네다 공항을 통해야 하는 시절이었고, 신원조회를 받아 여권을 내주던 시절이라 해외 영화제 참석은 영예로운 기회였다.

뒤에 국내에서 관객동원에 성공한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내가 주선해 대만에 수출해 대박이 났다. 한국의 수출품이 가발에 의존하던 때에 영화 수출로 돈을 번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시리즈 4편까지 수출됐고 주연배우인 아역 김정훈은 자신의 팬들이 많은 대만으로 유학해 인생의 진로를 바꿀만큼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대만 흥행은 한국 영화인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안겨준 계기로 작용했다.

좀 특별한 기억은 내가 대만에서 가져온 TV드라마 <포청천>시리즈가 KBS 전파를 타고 한동안 국내 최고 시청기록을 세우며 인기 TV프로로 화제를 남겼을 때의 희열감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수입한 작품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동아수출공사를 창업하기 직전에는 영국의 국책영화로 제작된 대작 <공군대전략>이라는 작품을 당시 거액인 8천 달러에 수입해 피카디리극장에서 개봉했다가 실패했다. 그때는 별도의 프린트 필름이 없어 한 개의 필름만으로 배급, 개봉을 하던 때라 비싼 영화의 수입은 도박과 같았다. 그 실패를 교훈삼아 영화사 창업 후는 영화 수입에 절제력과 사전 정보를 많이 활용했다.

-영화와 더불어 일생을 보낸 원로로 후배 영화업 종사자들에게 영화업에 대해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화는 그 시대 사회의 거울이라 하지 않는가.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천재성을 인정하며 영화 제작에 내 재산을 바쳤다. 많이 벌기도 했지만 아낌없이 날렸다. 그 시대 관객의 눈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시선을 상상할 수 없는 세상으로 끌어들여 흥분시키는 탁월한 감각의 예술인이 감독을 주축으로 한 작가, 기획자, 배우들이다. 나는 그들을 경외감으로 대했고 내 일생은 관객보다 먼저 그들 영화인들의 눈을 따라다니며 보냈다.

이제 내 가슴에 남은 것은 잘한 것보다 잘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소외감뿐이지만 후회는 안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영화도 한류의 선봉이 되는 때가 오기를 기대한다.

마지막 한마디를 한 동아수출공사 이우석 회장은 다시 긴 침묵을 이어가다가 책상을 덮은 유리판 밑에서 '大道無門'(대도무문) 휘호를 끄집어내 보여준다. 당당하게 마땅히 정도를 가면 거칠 것이 없다는 말인데 YS(고 김영삼 전 대통령)가 생전에 '이우석 동지'에게 직접 정성껏 써준 휘호였다.

그러나 그 말은 이미 이우석 회장이 어린 시절부터 실천 철학으로 삼았던 인생좌표의 사자성어(四字成語) 였다. YS와는 재야 지도자로 고생하던 시절부터 친분을 나눈 사이였으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국수 한 그릇 대접받은 적이 없다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영화와 관련되지 않은 분야에는 발을 들여 놓지 않았고 다른 사업에 욕심을 내거나 눈을돌리지 않았다. 각종 영화단체의 명예직 직함은 많지만 책임업무와 관련된 직장과 직위는 50년 넘게 변함없이 오직 '㈜동아수출공사 대표이사' 한 줄이었다.

163㎝, 60여㎏의 작고 다부진 몸매는 젊은 시절부터 유지해온 체격이다. 영화사 회장실을 비우지 않고 여전히 업무 보고도 변함없이 받고 있지만 실질적인 경영은 아들 이호성 사장에게 위임한지 오래 된다.

여러 개의 극장과 빌딩,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5000㎡에 이르는 주택마저 결국 영화사업으로 명의를 넘겨야 했지만 그의 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동아수출공사라는 한국영화사에 큰 획의 발자취를 남긴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영화사 간판이 지켜주고 있다.

 

▶'거목(巨木)' 제작자,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의 영화 반세기(상)

▶성룡이 가장 존경한 한국인,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