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낳은 아름다운 변주...로베르 르빠주 '달의 저편'
상상력이 낳은 아름다운 변주...로베르 르빠주 '달의 저편'
  • 주하영
  • 승인 2018.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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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로베르 르빠주 X 엑스 마키나 '달의 저편'
사진 7 - 어린 필립을 안고 멀리 보이는 달을 가리키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이는 어머니, 어린 필립은 우주복을 입은 인형(Puppet)으로 표현된다.
로베르 르빠주 '달의 저편' 공연 사진. 어린 필립을 안고 멀리 보이는 달을 가리키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이는 어머니의 모습. 어린 필립은 우주복을 입은 인형(Puppet)으로 표현된다./사진=LG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상상력은 인간만이 지닌 유일한 능력이다. 상상력은 매번 인간을 놀라운 세계로,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신비로운 세상으로 인도하고 무언가를 창조한다.

독일의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스스로를 “상상력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예술가”라 칭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식보다 상상력이 중요하다. 지식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상상력은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논리는 당신을 A에서 B로 인도하지만 상상력은 당신을 어디로든 데려갈 것이다”

드럼세탁기의 투명한 둥근 창문이 비행기 창문으로 바뀌고, 시계로 바뀌고, 아기가 태어나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바뀌며, 뇌를 스캔하는 MRI 장치, 안과의사가 환자의 동공을 들여다보는 현미경, 금붕어가 헤엄치는 커다란 어항,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선 밖으로 나서는 출입문으로 변화하는 무대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다림질을 위해 펼쳐놓은 다리미판과 다림질대가 피트니스 센터의 각종 운동기구로 변모하고, 스쿠터가 되기도 하고, 세워놓은 채 옷을 입히고 모자를 씌워 특정인물이 되기도 하는 놀라운 무대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우주를 유영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닥에 드러누운 배우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에 맞추어 온 바닥을 휩쓸며 뒹구는 동작들로 완벽하게 구현되는 무대를 그려본 적이 있는가?

위에서 비춘 거울이 착시효과를 통해 바닥을 뒹구는 배우를 ‘우주를 떠도는 인간’으로 만들 때 관객들은 그저 놀라움의 감탄사를 반복할 뿐이다.

변화하는 오브제가 생산하는 새로운 의미를 끊임없이 탐색해야 하는 놀라운 무대는 인간을 어디로든 이끌고 가는 ‘상상력의 확장’을 통해 우주와 인간, 존재와 삶과 같은 철학적 주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사진 6 - 세탁기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던 필립은 상상을 통해 우주선 출입문을 통과하는 우주인으로 변신한다.
로베르 르빠주 '달의 저편' 공연 사진. 세탁기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던 필립은 상상을 통해 우주선 출입문을 통과하는 우주인으로 변신한다./사진=LG아트센터

최근 LG아트센터에서는 ‘21세기의 연극적 상상력‘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무대 위의 마술사’ 로베르 르빠주의 2000년 작품 ‘달의 저편‘의 두 번째 내한 공연이 펼쳐졌다.

캐나다 퀘벡 출신의 연출가이자 극작가, 영화감독, 배우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온 르빠주는 2003년 LG아트센터를 통해 ‘달의 저편‘을 처음 한국 관객들에게 소개한 후, 2007년 ‘안데르센 프로젝트(2005)‘, 2015년 ‘바늘과 아편(2013, 리마운트 버전)‘에 이어 네 번째로 한국 관객들과 만났다. 

전통적인 연극 문법에서 벗어나 시각적 청각적 요소를 극대화하는 멀티미디어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순수한 연극적 마술”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르빠주만의 작업 방식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놀라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만큼 독창적이고 혁신적이었다.

2001년 ‘가디언‘의 린 가드너가 “우주에 지적인 생명체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인간에 대해서는 시원찮게 여길지 몰라도 이 연극에 대해서만큼은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라고 평했던 ‘달의 저편‘은 2018년 호주 퍼스 페스티벌에서도 여전히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데일리 리뷰‘에 의해 “로베르 르빠주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특징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작품”이란 평을 받았다.

연극의 ‘치유 효과’를 믿는 르빠주는 ‘가장 자전적인 작품‘이라 알려진 ‘달의 저편‘을 통해 유년기 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볼 뿐 아니라 과학의 발전에 앞장서기 위해 경쟁하고 분투했던 서구의 20세기 역사를 점검하고, 새로이 발견된 세상이라 할 수 있는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사진 5 - 빨래방에서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필립, 세탁기 안쪽에 설치된 카메라는 세탁기 내부의 빨래가 움직이는 장면을 그대로 투사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로베르 르빠주 '달의 저편' 공연 사진. 빨래방에서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필립. 세탁기 안쪽에 설치된 카메라는 세탁기 내부의 빨래가 움직이는 장면을 그대로 투사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사진=LG아트센터

그는 인간의 ‘호기심’과 ‘모험심’이 아닌 스스로의 이성을 맹신하고 지식의 축적을 통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경쟁의 역사’를 동전의 양면과 같이 전혀 다른 삶을 영위하고 있는 필립과 앙드레라는 두 형제의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르빠주는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필립이 펼쳐 보이는 삶과 생각들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저 멀리 우주에 있을지 모를 ‘새로운 지적 생명체’를 찾아 끊임없이 두 팔을 벌리고 소통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막이 오르면, 필립은 관객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 달을 관측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달이 ‘지구를 비추는 거울’이라 믿었습니다. 달의 어두운 부분들과 신비로운 윤곽들은 지구의 산과 바다가 비춰진 것이라고 생각했죠. 20세기에 이르러 소련이 먼저 발사한 달 탐사선이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달의 숨겨진 얼굴들, 지구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운석과 천체의 파편들로 인해 찢기고 긁히고 파인 상처들로 가득한 달의 흉측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죠. 수년 동안 미국의 과학자들은 이것을 ‘달의 추한 면’이라 불렀습니다.”

1957년 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였고, 이로 인해 촉발된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경쟁은 1969년 미국이 아폴로 11호를 보내 인류 최초로 달의 표면을 걷게 된 역사를 기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로베르 르빠주 '달의 저편' 공연 사진.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박사학위 논문을 통과시키지 못한 필립의 모습/사진=LG아트센터

르빠주는 이러한 경쟁적 관계를 서로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오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된 필립과 앙드레의 갈등으로 연결시킨다.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박사학위 논문을 통과시키지 못한 필립은 주말마다 파트 타임으로 텔레마케터 일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다. 반면, TV 기상캐스터로 성공한 앙드레는 세련된 아파트에서 동성연인과 함께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대조적인 두 형제의 삶은 주로 동생 앙드레에게 자격지심을 품고 있는 필립의 관점에서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측면을 갖고 있다. 이브 자끄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달의 저편’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면”을 뜻하며, “달의 저편에 도달해야 비로소 지구가 보이게 되듯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만을 들여다보던 나르시시즘적인 태도를 버리고 주변을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화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달의 저편’은 인간의 숨겨진 내면이며, 어두운 트라우마의 기억이고,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진실이 자리하고 있는 상처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넓은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공간에 빛을 비추어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들여다봐야만 하고, 그 추함을 인정해야만 자신과 상대를 왜곡되지 않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존재의 의미란 ‘세상 속 자신의 위치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다. 십대 소년이었던 필립은 달을 바라보며 모든 것이 ‘혈연관계‘로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에 도달하고, “무한한 우주 속 어딘가에 나의 역할도 있겠지”라는 인식에 이른다.

존재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구 밖에 있을지 모를 외계생명체’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고, 그는 ‘우주로 보낼 지구인 설명서’를 공모하는 외계생명연구소에 출품하기 위해 셀프 비디오 영상을 찍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을 찍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삶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측면들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셀프 비디오 촬영은 그가 애써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기억 저 너머의 삶의 장면들과 직면하도록 만든다.

사진3, 4 - 필립이 소련의 우주비행사 레오노프로부터 논문추천을 받기 위해 바(bar)에서 기다리는 장면, 세탁기 창문은 커다란 시계로 변모한다.
로베르 르빠주 '달의 저편' 공연 사진. 필립이 소련의 우주비행사 레오노프로부터 논문추천을 받기 위해 바(bar)에서 기다리는 장면으로, 세탁기 창문은 커다란 시계로 변모한다./사진=LG아트센터

빨래방의 세탁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우주인이 된 자신을 상상하듯 카메라 렌즈로 들여다보는 삶의 모습들은 파편처럼 많은 기억들을 불러온다. 때로는 MRI로 뇌를 스캔하듯 때로는 눈을 검사하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미처 깨닫지 못한 감추어진 진실들과 직면하는 과정은 필립으로 하여금 ‘지구라는 요람’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지구라는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처럼 매일 새로운 지평을 발견한다는 환상을 품은 채 자신들이 원을 그리는 줄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간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필립은 자신을 가두어두고 있던 어항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한 발 딛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른다. 비록 그의 시도는 시간을 착각하는 어이없는 실수로 실패로 끝나지만 이미 자신의 두 발을 묶어놓았던 사슬을 풀었다는 점에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무대는 놀랍다. 모든 인물은 배우 1인 다역을 맡은 이브 자끄에 의해 완벽하게 표현된다. 형 필립과 동생 앙드레는 각기 다른 복장 스타일, 수염, 자세들로 구분되며, 스카프와 선글라스, 원피스를 차려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우아한 걸음을 내딛는 어머니도, 러시아 군복을 차려입고 파이프 담배를 손에 든 채 우주선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는 과학자 치올롭스키도 완벽하게 구현된다.

사진2 - 다리미판과 다림질대는 아기를 태운 유모차로 변신한다. 이브 자끄는 하이힐을 신은 필립의 어머니를 연기한다.
로베르 르빠주 '달의 저편' 공연 사진. 다리미판과 다림질대는 아기를 태운 유모차로 변신한다. 이브 자끄는 하이힐을 신은 필립의 어머니를 연기한다./사진=LG아트센터

퍼펫티어가 조종하는 인형이 등장해 환상과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가 하면 대형 스크린을 통해 투사되는 우주개발과 관련된 흑백 뉴스들은 역사적 맥락과 이해를 돕는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빨래방’ 장면을 전혀 관련이 없는 ‘우주탐사’와 ‘우주인’, ‘비행기’와 같은 문제로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어린 아이라면 한번쯤 빨래가 돌아가는 드럼세탁기의 창문을 바라보며 신기한 상상을 했을법한 상황을 르빠주는 연극의 주제와 연결시킨다.

르빠주는 알렉산더 던데로비치와의 인터뷰에서 이 같이 말했다.

“세탁기의 둥근 창문은 우주의 중심적인 힘, 구심력의 소형화된 오브제라 할 수 있다. 둥근 창문은 우주선의 출입구와 허블망원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의 어린 시절 경험과 관련이 있다. 어렸을 때 나는 바지 주머니에 대리석 조각들을 모아두곤 했고, 그 대리석 조각들이 세탁기 모터에 끼여 고장을 일으키자 어머니는 나를 빨래방에 데려갔다. 드럼세탁기 창문으로 빨래를 바라보았던 경험은 나로 하여금 그것이 우주선을 상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들었다.”

르빠주는 자신이 연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제시하는 ‘상상력의 놀라움’이 아니라 관객들의 ‘상상하려는 능력에 대한 자각’임을 강조한다.

그는 “관객들은 진화와 변형, 새로운 발견을 보기 위해 내 공연을 찾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내 공연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 내재되어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려 애쓰는 에너지”라고 말한다.

그는 전혀 연계되지 않는 장면들을 서로 연결하면서 ‘이해’를 위해 노력하고, 숨겨진 의미를 찾아 헤매는 관객들의 ‘몰입된 에너지’, 즉 상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무대와 소통하는 내재된 에너지를 깨닫는 것에 그 핵심이 있음을 말한다.

사진1 - 어머니와 어린 필립이 재즈 음악에 맞춰 블루스를 추는 장면, 드럼세탁기의 창문은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하게 된다.
로베르 르빠주 '달의 저편' 공연 사진. 어머니와 어린 필립이 재즈 음악에 맞춰 블루스를 추는 장면, 드럼세탁기의 창문은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하게 된다./사진=LG아트센터

상상의 에너지는 연관이 없는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도록 만들며, ‘호기심과 모험심이라는 용기‘를 통해 자신을 가두고 있던 ‘어항’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달의 저편’으로의 여행은 위험할지 모른다. 그 여행은 아픔을 가져오거나 충격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립의 말처럼, “인간이 영원히 요람에 있을 수만은 없다.”

상상하려는 에너지와 자신의 추함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합쳐질 때 인간은 진화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상상력은 우리를 어디로든 인도한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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