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체험' 그리고 '공감'...연극 '낫심'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체험' 그리고 '공감'...연극 '낫심'
  • 주하영
  • 승인 201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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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낫심 술리만푸어의 연극 '낫심'
연극 '낫심' 2막 무대에 오른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사진=두산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언어의 기원은 무엇일까?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모두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였으나 바벨탑을 높이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던 인간들의 '교만'이 신의 분노를 샀고, 신은 탑을 무너뜨려 사람들을 모두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J. 스티븐 랭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인간의 오만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가 왜 그렇게 서로 다른가를 설명하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현재 7000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하고, 수세기에 걸쳐 언어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이론들만 있을 뿐 명확한 기원이 밝혀진 적은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남을 이해시킴에 있어 '언어'라는 복잡한 소통의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은 오직 '인간'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 29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는 '이란어'를 소재로 언어와 소통, 국경과 문화, 이해와 사랑의 문제를 매우 독특한 '연극 형식'으로 풀어낸 '낫심' 공연의 막이 내렸다.

'리허설이 없는 1인 즉흥극'이란 새로운 연극형태를 제안한 이란 출신 극작가 낫심 술리만푸어는 모국에서의 병역 거부로 인해 해외 출국이 금지되자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극본을 전 세계의 극장 관계자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극본에는 매우 이례적인 두 가지 요청사항이 붙어 있었다. 첫째, 그 어떤 리허설이나 연출이 있어서는 안 되며, 둘째, 매회 다른 배우가 극본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배우들은 오직 무대 위에서만 봉인된 상자에 들어있는 극본을 볼 수 있으며, 비로소 작가의 극본이 지시하는 대로 관객들에게 공연을 펼쳐 보일 수 있었다.

그의 새로운 연극방식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전 세계의 소위 '스타'라 불리는 배우들의 러브콜을 받게 되면서 많은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연극 '낫심' 무대에 오른 뮤지컬 배우 이석준/사진=두산아트센터

2010년 '하얀토끼 빨간토끼'를 통해 자신의 나라를 벗어날 수 없는 작가 개인의 삶에 대한 고민과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억압과 권위의 문제를 통찰했던 술리만푸어는 3년이 지나 왼쪽 눈이 실명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을 받으며 병역면제 판정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작품공연장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당시까지 세계의 모든 공연장들은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 없는 극작가를 위해 매회 객석 첫 줄의 한 좌석을 비워놓고 공연을 진행하였는데, 2013년 2월 호주 브리즈번을 찾은 술리만푸어는 자신의 작품공연을 처음으로 관람할 수 있었던 소감을 이렇게 설명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언어로 낯선 배우가 '내 이름은 낫심 술리만푸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는 일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보게 되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저 사람이 나일 수도 있어!'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나는 이란인이 아닌 호주인이 될 수도 있고, 여성일 수도 있고, 흑인 혹은 백인이 될 수도 있으며, 동양인일 수도 있습니다."

이란이라는 특정 문화권에만 속해있던 술리만푸어는 '하얀토끼 빨간토끼'이후 계속해서 영어로 새로운 극본들을 쓰며, 세계 많은 나라들을 방문했고, 2015년부터는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32개국에 달하는 나라에서 2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공연되는 그의 작품들은 정작 그의 모국인 이란에서는 단 한 번도 공연된 적이 없다.

호주 언론 '더 뮤직'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연극 '낫심'은 '하얀토끼 빨간토끼'의 후속 공연과 같다고 설명한다.

2013년 자신의 작품공연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강렬하고도 낯선 경험은 극을 써내려갔던 3년 전 '과거의 자신'과 새롭게 조우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두 번째 공연이 진행되던 날 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이 작가임을 소개했던 즉흥적인 행동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 때의 사건이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말한다.

2018년 술리만푸어는 이제 '낫심'을 통해 무대 위에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하며, 더 이상 무대 밖에 머무는 '극작가'가 아닌 무대 위에서 소통하는 무언의 '배우' 겸 '연출가'로 자리한다.

술리만푸어는 '산들바람'이란 의미의 자신의 이름 '낫심'을 그대로 연극 제목으로 선택한 공연을 통해 이란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만 영어로 작업을 하고, 독일어로 생활하는 작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슬픔과 쓸쓸함, 그리움과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그는 "한 사람이 세 개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생활한다는 것은 곧 자아를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언어는 분명 '소통'의 도구이지만 그 언어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과의 사이에는 하나의 '장벽'으로 존재한다.

술리만푸어는 세계 공용어가 되어버린 '영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모국인 이란에서는 낯선 작가이며, 그의 부모, 형제, 친구들은 그의 작품이 공연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만의 독특하고 특수한 상황은 언어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하도록 만들었고, 그가 느끼는 '낯선 상황'을 관객들이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무대를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고안'토록 만들었다.

무대는 마치 강연장처럼 벽을 채우는 커다란 스크린, 책상 하나, 의자 두 개, 그리고 마이크 스탠드로 채워져 있다. 매회 다른 배우에 의해 공연되는 무대는 '그 날의 배우'를 소개하며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 속에 극을 시작한다.

한예리 낫심사진 = 두산아트센터 제공
연극 '낫심' 무대에 오른 배우 한예리/사진=두산아트센터 제공

리허설도 없이, 대본도 없이, 무대 의상도 없이 우연히 객석에서 끌려나온 관객이기라도 한 듯 어쩔 줄 몰라 서성이는 배우의 '낯설음'은 책상 위 상자에 들어있는 봉인된 456페이지 분량의 극본이 갑자기 스크린 화면에 투사될 때부터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하얀 종이 위에 한 문장, 혹은 두 문장으로만 채워진 극본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한 장씩 넘겨지고, 배우는 극본의 지시에 따라 대사를 읽기도 하고 액션을 취하기도 한다.

기울어진 글씨체는 무대 지문이므로 읽지 않고 행동으로 취하거나 따라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그 날의 공연을 제대로 진행하기 위해 배우의 '시력검사'가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관객들은 매 순간 배우와 함께 호흡하고 반응하며 때로는 서투름에 실수하는 배우를 도와주기도 한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우와 관객,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작가의 스크린 속 '대본'의 경계가 생길 뿐이다.

하지만 그 경계마저 오래 지나지 않아 무너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진행요원에게 무대 뒤로 향하는 길을 물어 10초 안에 자신을 만나러 오라는 대본 속 '극작가의 요구'는 무대 뒤 어딘가에서 배우와 관객을 위해 자신의 극본을 스크린 위에 투사하고 있는 '작가'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고, 배우가 작가를 만나러 뛰어가는 10초의 카운팅을 관객 모두가 함께 외치도록 만든다.

관객은 개인적인 의견을 전달하기도 하고, 스스로 손을 들어 무대 위에 오르기도 한다. 배우는 작가의 '말'을 대신하는 아바타이면서 동시에 배우 '개인'으로 존재한다.

배우는 스크린에 투사된 대본을 읽어 내려가며 작가의 '말'을 대신 관객들에게 전달하지만 대본의 질문에 따라 배우 자신이 좋아하는 식당을 소개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며,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을 알려주는 등 '배우 개인'으로도 존재한다.

관객과 배우, 보이지 않는 작가가 서로 친해지기 위한 단계라 할 수 있는 1막은 무대 뒤로 작가를 만나러 간 배우가 '차 한 잔'을 마시고 관객들 앞에 작가를 데려와 직접 소개를 하면서 2막을 시작한다.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 술리만푸어는 책상 위에 극본과 웹 캠, 휴대폰을 올려놓고 앉아 여전히 극 대본을 스크린에 투사하며 극을 이어나간다.

작가는 극이 진행되는 내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지만 배우가 읽어 내려가는 그의 '말'과 그의 휴대폰 속에 저장된 사진들, 제스처, 그리고 관객들과 함께하는 '이란어 수업'이 관객과 배우가 모두 함께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다.

연극 '낫심' 무대에 참여한 배우 고수희, 문소리/사진=두산아트센터, 씨제스

그의 연극은 '환상'을 실제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일에 골몰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제'를 '경험'하도록 만든다. 단 한 번도 접해본 적 없었던 언어를 배우는 낯설음과 어려움, 서투름, 그리고 쉽게 기억되지 않고 익혀지지 않는 단어들로 인해 겪게 되는 좌절감과 답답함, 그렇게 얻은 문장들로 연결된 '이야기'까지 관객들은 작가가 전하고픈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고 이해하며 공감한다.

술리만푸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배우에게 이란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이란어 공연을 라이브로 진행해 줄 것을 부탁한다. 관객들은 실제 휴대폰으로 연결된 술리만푸어의 어머니와 스크린을 통해 배운 '이란어'로 대화하고 이야기를 공연하는 배우를 마주하게 되며, 동시에 자신들 역시 '이란어'로 반응을 전달한다.

모든 것은 '현재' 속에 연결되어 있고 함께 공존한다. 경계는 무너진다. 작가도, 배우도, 관객도, 연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란에 있는 '어머니'라는 한 관객을 위해 모두가 함께하는 '공연'이 있을 뿐이다.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상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고, 그 이해한 바를 자신의 언어로 전달한다. 하지만 기표와 기의로 구분되는 언어는 종종 기호 속에 그 의미가 갇히는 문제를 겪는다.

기호 속에 갇혀버린 의미는 특정한 사고와 문화만을 기준으로 하는 '척도'로 여겨지게 되고, 언어를 통해 역사와 문화, 지식을 습득하는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언어 범위 내에서만 사고하는 한계를 범하고 있음을 '망각'하게 된다.

세상은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복잡한 감정들로 가득하고, 우리는 언제나 그 많은 감정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음'에 좌절하고 소외를 느낀다.

술리만푸어는 언어가 품고 있는 모순, 부자연스러움과 억압, 한계를 연극 '낫심'을 통해 관객들이 현장에서 목격하고, 참여하며, 느끼고, 이해하도록 만든다. 관객들은 언어와 자유에 대해, 국가와 가족, 그리고 고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표현할 길이 없는 단어들, 설명할 수 없는 마음들... 단어가 없다는 것은 사고가 없음을 의미하고, 인식이 없다는 것은 그에 따른 삶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 곳에 살고 있는 낯선 한 남자, 그 남자가 낯선 언어를 배우기를 청함에 선뜻 응하고 참여하는 관객들의 친절과 포용, 그것이 세계를 아우를 수만 있었다면 '디아스포라'와 같은 단어는 생겨나지 않지 않았을까?

연극 '낫심'에는 그 어떤 감정의 극대화도, 그 어떤 놀라운 이야기도 없다. 하지만 언어는 그저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고픈 수단일 뿐 그것이 어떤 잣대도, 편견도, 강요도, 억압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체험'하도록 만든다.

어쩌면 가장 소소한 것이 가장 강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누구와도 교집합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마도 그것이 이란어로 '어머니'를 뜻하는 단어, '머먼'을 관객들의 가슴 속에 깊이 남기는 이유일 것이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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