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울릉도 자연인'의 삶에서 칠순 넘어 무대로 돌아온 가수 이장희
[인터뷰] '울릉도 자연인'의 삶에서 칠순 넘어 무대로 돌아온 가수 이장희
  • 김리선 기자
  • 승인 20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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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부지 500평 기증...'울릉천국 아트센터' 개관 공연 무대 올라
-칠순 넘어 다시 음악시작..."음악은 내 삶의 1순위"
-어릴 적 음치 소리 듣기도...아직 악보 볼 줄 몰라
가수 이장희

[인터뷰365 김리선 기자] "나이 70이 되서 다시 음악을 하게 되니 설렙니다. 은퇴 후 40년만에 제 삶에서 음악은 다시 1순위가 됐습니다. "

그동안 '울릉도 자연인'으로 살아온 '포크의 대부' 이장희가 돌아왔다. 

한국 포크음악의 1세대인 이장희는 1971년 데뷔 후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등 수많은 명곡을 남긴 가수다. 

싱어송라이터 겸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던 그는 1975년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가수 활동을 중단하고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레스토랑, 의류업, 라디오코리아 운영 등 성공한 사업가로 살아온 그는 40여 년간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1996년 우연히 찾은 울릉도의 자연에 매료되면서 지난 2004년에는 울릉군 북면 현포리에 터전을 잡아 울릉도주민이 됐다. 직접 연못을 만들고 밭을 갈구며 '울릉천국'이란 농장을 만들었고, 이는 수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울릉도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울릉도는 나의 천국'이라는 곡도 만들었다. 

5월 8일에는 그가 2011년 울릉도에 기증한 약 500평에 이르는 울릉천국 농장 부지에 '울릉천국 아트센터'도 개관한다. 공연을 위해 지난 2년 반 동안 열심히 노래 연습을 해왔다는 그는 5월부터 7월까지 공연장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최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이장희는 칠순의 나이를 잊을 정도로 정정하고 활기가 넘쳤다. 그는 "이제부터 음악 활동의 본격적인 시작"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다음은 일문 일답.

가수 이장희는 최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진행된 '울릉천국 아트센터' 기자간담회에서 1974년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 받아 불렀다는 '내나이 60하고 하나 일때'를 들려줬다./사진=인터뷰365<br>
가수 이장희는 최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진행된 '울릉천국 아트센터' 기자간담회에서 1974년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 받아 불렀다는 '내나이 60하고 하나 일때'를 들려줬다./사진=인터뷰365

-울릉도의 삶은 어떤가.

은퇴 후 2004년 울릉도의 자연에 반해 정착하게 됐다. 그 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뜰에 더덕밭을 만들었는데 매해 김매기를 했다. 잡초는 계속 자라나기 때문에 봄과 여름 초까지 김매기를 해야 한다. 하루는 김을 매다 허리가 아파서 하늘을 봤는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광경을 봤는데,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내가 제 자리에 와 있구나, 제 자리로 가는구나 행복한 생각이 들더라.  

-울릉도 자택이 '울릉천국'으로 불리며 관광 명소로도 꼽히고 있는데.

정착 전 미리 농사 일을 배우고 갔다. 울릉도에서 3년 정도 농사를 지었는데 만만치 않더라. 그래서 좋은 정원을 가꾸자는 심정으로 꽃을 심기 시작했다. 그 곳이 꽃밭이 되면서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도 오고, 외부에도 소개되면서 관광지가 됐다. 또 제가 울릉도에 산다는 걸 아시는 분들이 흥미를 갖고 찾아오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집 근처에 버스정류장을 만들어지고 공중화장실과 주차장도 생겼다. 울릉도의 좋은 명소가 되었으면 한다. 

(이장희는 지역 아동들에게 방과 후 기타 선생님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악기를 배우고 싶지만 악기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한 재단의 협찬을 받아 기타, 베이스 등 악기 25점을 기증하는 등 조용한 후원을 이어왔다.)

-자택 부지에 이번에 개관하는 울릉천국 아트센터가 지어진건가. 

처음 극장을 짓는다 해서 울릉군에서 땅을 사겠다면서 찾아왔다. 그래서 난 필요한 땅을 기증하기로 한 거다. 적당한 시기에 공공 재산으로 기증하지 않을까 한다.

(그가 기증한 1652㎡(약 500평)의 울릉천국 농장 부지에 세워진 '울릉천국 아트센터'는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지어졌다. 분장실과 대기실을 갖춘 150명 규모의 공연장과 카페테리아, 7전시홀 등이 갖춰졌다. 전시홀의 경우 이장희가 직접 보유하고 있던 가수 및 쎄씨봉 자료 등을 기증 받아 만들어졌다.) 

울릉천국 아트센터 전경/사진=PRM

-울릉아트센터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솔직히 처음엔 내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공연장을 짓겠다는 얘기에 난 처음엔 기분이 언짢았다. 난 그저 울릉도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4년 전 김관용 경상북도 지사가 울릉도에 첫 유세를 하기 위해 왔다가 내가 사는 곳에 들렀는데, 그때 난 서울에 있어서 전화를 받았다. 40년 가까이 미국서 살다가 은퇴하고 울릉도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점에 따스한 시선으로 본 것 같더라. 이후 울릉군에서 울릉도에 문화센터를 지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울릉도에 공연장을 짓자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겠구나 싶었다. 울릉도는 보물같은 섬이다.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다. 또 앞에 정신적인 상징성이 있는 독도가 있지 않나. 나 역시 집안에 공연장을 지어놨으니, 아무래도 노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웃음) 공연을 하기 위해 지난 2년 반 동안 열심히 노래 연습을 했다. 

-울릉도 공연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의 시작점으로 봐도 무방한건가. 

그렇다.  

-음악을 다시 하게 된 소감은

학창시절에 음악만 하던 시절이 생각나더라.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 음악에 빠져서 성적은 거의 꼴등이었다. 연습하면서 음악이 너무 좋아져서 음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이 70에 다시 음악을 하게 됐다. '동방의 빛' 멤버들이었던 강근식과 조원익과 연습을 했는데, 제 친구들과 40년만에 음악을 하니 또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울릉도 공연에서 사람들과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울릉도에 어울리는 공연을 펼치고 싶다. 

-본인에게 음악은 어떤 존재인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게 자연이다. 물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지금은 음악이 1순위가 됐다. 

-얼마만에 음악이 1순위가 된 건가

1970년대 은퇴를 했으니, 근 40년만인가. 하지만 낯설지는 않다. 언제나 음악을 좋아했으니까. 밴드들이 나오는 뮤직레스토랑을 했었는데, 친구인 조동진도 몇 달간 공연을 했었다. 들국화도 한 달 씩 무료로 공연을 한 적도 있었다.  

-그동안 가수 활동에 대한 그리움은 없었나

1972년 말부터 1975년까지 3년 정도 연예계에 몸담았다. 그러다 대마초 사건이 터지면서 내가 제일 먼저 가요계를 떠나게 됐다. 전 그 때 다시는 노래를 안하겠다고 생각했다. 은퇴 후엔 4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았다. 

저는 한 번 결정하면 그것에 올인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스타일이다.  제 인생이 다른 길을 가라고 하는구나 선뜻 받아들였다. 미국서 우연히 식당 겸 클럽도 운영했다. 미국 LA에 100만명의 교포들이 사는데, 해외 동포의 구심점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라디오 방송 사업도 했다. 

-이번 공연에선 어떤 곡을 선보이나

주로 제 옛날 노래를 부를 것 같다. 요즘 음악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서 최근 제 흥미를 끄는 새로운 곡도 들려줄 계획이다. 저 역시 기대감이 높다. 

-요즘 끌리는 음악이 있다면

지난해부터 애플 뮤직을 구독해서 꾸준히 듣고 있다. 음악을 다시 시작하는 첫 스텝이랄까. 제가 좋아하는 분야의 음악과 요즘 인기가 많은 노래를 듣는다. 요즘 대세가 힙합이더라. 내가 미국에 갔을때 닥터드레 앨범을 듣고 놀랐다. 신선하고 좋더라. 내가 좋아했던 리듬앤 브루스도 좋다. 요즘엔 필립 그라스 같은 미니멀리즘 클래식을 많이 듣는다. 예전에 제가 좋아했던 프로그레시브 록도 듣고. 

가수 이장희/사진=인터뷰365<br>
가수 이장희/사진=인터뷰365

-공연이 3개월 간 상설 공연이 계획되어 있던데

('울릉천국 아트센터'는 개관일인 5월 8일부터 9월 15일까지 매주 화, 목, 토요일 주 3회 이장희의 상설 공연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저 말고도 다른 분이 합류한다면 모르겠지만, 5~7월은 우선 저만 하려 한다. 우선 배가 뜨기 좋은 날씨인 3개월만 시범으로 운영해 보는거다. 만약 사람들이 물밀듯이 오면 더 할꺼고.(웃음) 운영은 내가 하는게 아니라 운영자들이 따로 계시기 때문에 공연 일정은 논의해서 진행할 예정이다. 

-공연장 수요에 대한 고민은

사실 나도 이 곳에 과연 극장을 지으면 누가 보러 올까 의심스럽긴 했다. 그러나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음악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천만이 사는 서울에서도 공연장이 잘된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울릉도는 만 명도 안사는 작은 동네니까. 울릉도 주민은 약 5~6000명이고, 나머지는 외지인들이 사업을 하는 광광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보러 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루에 울릉도를 찾는 관광객들은 3000명정도 된다. 그 중 100~150명만 공연장에 와줘도 좋을 것 같다. 

-쎄씨봉 멤버들도 공연에 함께 하나

한번 씩 와서 친구들과 함께 공연을 하기로 했다. 이들의 반응은 좋다. 

-공연장이 어떻게 발전하길 바라는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됐으면 한다. 지난해 이문세 후배가 와서 "형 여기는 인디밴드들이 오면 좋겠다"고 하더라. 음악하는 후배들이 공연도 하고 연습도 했으면 한다. 음악하는 후배들을 위한 음악적 요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가수 이장희 /사진=PRM

-음악과의 첫 인연이 궁금하다

중학교 2학년 때 삼촌 친구인 조영남 형이 노래를 하는 걸 보고 음악이 너무 좋아졌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열의가 불탔다. 중학교때 삼촌 몰래 기타를 치기도 하고 그러다가 아버지 때문에 (기타가) 부서진 적도 있다.  

나는 음악을 하나도 몰랐다. 난 지금도 악보를 볼 줄 모른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 동료들 모두 교회 합창단 출신이어서 화음도 잘 넣었다. 내가 노래를 하면 다들 웃곤 했다. 어릴 적 내 노래는 빵점이었다. 음치라는 소리도 들었다.(웃음) 화음도 모르는 내가 노래를 한다고 하니 조영남 형이 슬그머니 내게 오더니 "장희야 너 노래하지 말아라"고 했다.(웃음) 그렇게 노래를 내가 못했다. 

-그러나 가수와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큰 인기를 모았는데

당시 '하얀손수건'등 외국곡을 한국어로 번안한 노래만 불렀던 시절이었다. 난 의문이었다. 왜 우리나라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했던거지. 그래서 한두 곡 만든 곡이 '비의 나그네', '좋은 걸 어떻게' 등 이었다. 그 당시 이종환 음악 프로듀서가 나한테 오더니 직접 노래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셨다.(그는 1971년 DJ 이종환의 권유로 1집 '겨울 이야기'를 내면서 데뷔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음악에만 빠져 살던 '미친놈'이었던 내가 음악에 매료된 후 다양한 음악을 듣다보니 그 당시 필요했던 음악의 영양 섭취를 했던 것 같다. 난 아직도 악보를 읽을 줄 모른다.    
 
-곡 작업은 어떻게 하는가

난 우선 가사를 쓴다. 어떤 내용의 가사를 쓸 것인지, 어떤 분위기를 담아낼 것인지 오랜 시간 고민한다. 작사를 한 후엔 기타로 튕겨보면서 나오는데로 불러본다. 그래서 난 악보에 대해 깜깜하다. 마음에 들면 된 거다. 그러면 베이스, 키보드 음악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 하루에 한 곡 녹음을 했다. 아무것도 없이 코드만 적어주고 3~4번 들려주면 친구들이 곡에 맞는 분위기를 잡아낸다. 드럼과 베이스가 들어오고, 기타가 들어오고 그리고 키보드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깔아주면서 음악을 구체화 시킨다. 정말 하루에 한 곡씩 녹음했다니까.  

-새 앨범 계획은

지금이라도 새 앨범을 만들고 싶다. 제 스타일대로 다른 음악을 하고 싶다. 사실 1988년 미국에서 7년정도 살았을 시기, 한국에 다시 올 생각을 하며 지은 곡이 있다. 그 때 앨범 준비를 하던 중이었는데, 놓고 있다가 지난해 알래스카를 여행다니면서 그 음악을 들었다. 후배 뮤지션에게 다시 녹음을 할 수 있게 연습할 수 있게 해달라 했다. 연습 테이프를 받았으니 9월 경 녹음을 한 번 해볼까 한다.    

-70대에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법은

40년전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모터사이클을 좀 타긴했었지만 운동을 전혀 안했다. 미국서 7년 정도 조깅을 하다가 허리를 다치면서 그 이후론 걷기 시작했다. 하루에 2시간 이상을 걸었다. 자연을 좋아하다보니 요세미티 산에서 20일 걸리는 코스를 백팩을 메고 텐트 생활을 하면서 완주했다. 한국에 와서는 아침마다 수영을 한다. 오늘도 새벽 6시 40분에 나가서 걷고 수영장에서 30분정도 수영을 했다. 될 수 있으면 걸어다니려 한다. 걷는게 보약보다 좋다지 않나. 

 

김리선 기자
김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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