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칠순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긍정의 힘은 삶의 원동력"
[인터뷰] '칠순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긍정의 힘은 삶의 원동력"
  • 김리선 기자
  • 승인 201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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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손부상으로 인한 공백기 극복..."긍정적 인생관은 내 삶의 성장 안겨줘"
-"'레전드'란 말은 끔찍...쉬워진다는 생각 전혀 안들고 오히려 더 힘들어져"
-21세기에서의 전통 음악 발전에 관심...다시 태어나도 한국인으로 살고 싶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사진=워너뮤직코리아

[인터뷰365 김리선 기자] 1970년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홀. 작은 체구의 한 여성 동양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무대에 올랐다. 서양악기를 연주하는 검은머리 연주자를 찾아보기 힘든 그 시절, 그녀는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해내며 단번에 유럽 클래식계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유럽의 중심지, 런던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유럽 데뷔 무대를 가진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1948~)가 세계 무대에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이후 클래식 명문 레이블인 데카·EMI에서 수많은 앨범를 발매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던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최고의 정상에 있던 2005년 갑작스러운 손가락 부상으로 인한 은퇴.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긍정의 마인드로 그는 5년 후 다시 무대에 올랐고 재기에 성공했다. 

올해 고희(古稀)를 맞은 정경화는 서른세 번째 음반을 발매하며 여전히 음악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6살 때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했으니, 사실상 칠십 평생을 음악가로서 외길을 걸어온 셈이다. 

정경화는 최근 서울 종로구 문호아트홀에서 열린 서른세 번째 정규 앨범 '아름다운 저녁(Beau Soir)' 발매기념 기자회견에서 "어떻게 하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됐다"며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연주한다"고 말했다. "쉬워진다는 생각 전혀 안들고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고 겸손해 하던 그는 "이름 앞에 붙는 '레전드'란 말은 끔찍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서양에 한국을 알린 최초의 클래식 연주자 정경화. 한국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그다. "다시 태어나도 한국인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정명화의 삶과 음악 스토리.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올해 고희를 맞았습니다. 한 평생 바이올리니스트로 한 길만을 걸어왔는데,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20대 첫 레코딩을 시작한 이후 1970년대부터 열심히 뛰었습니다. 30대인 1980년대는 가정을 갖고 두 아들이 생기면서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죠. 제 자신만 바라보던 제 삶이 하루아침에 달라졌어요. 연주도 많이 안하게 됐죠. 그래도 레코딩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 씩은 했어요. 그러다 2005년에는 손부상을 당하면서 모든게 중단 됐어요. 은퇴를 하고 줄리어드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때만 해도 다시 레코딩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어요. 지금까지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다는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최고의 정상에 있던 정경화는 2005년 갑작스러운 왼손 손가락 부상으로 잠정적으로 은퇴하며 5년 동안 바이올린 연주를 중단했다. 그러나 2010년 아쉬케나지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극적으로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그 후 2016년 평생 숙원이었던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레코딩하고, 전 세계 투어를 하면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손부상으로 5년간의 공백기 후 2010년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랄까,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요.

긍정적인 인생관이었죠. 늘 긍정적이셨던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 평생 어머니처럼 그렇게 긍정적인 삶을 사신 분을 본 적이 없어요. 어머니는 "제일 힘든 일이 있을 때가 제일 좋은 길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힘들 때는 다른건 쳐다보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하셨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요. 손을 다쳤을 때도 좌절하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쳤고, 여러 생각을 하며 지냈어요. 제 스스로 많은 걸 배웠던 기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의 어머니 고(故) 이원숙 여사는 '정 트리오'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워낸 탁월한 예술교육자였다. 정경화는 4남 3녀 중 셋째 딸로, 정경화는 그의 작은 언니인 첼리스트 정명화와 남동생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정명훈과 함께 '정 트리오'로 활동했다. 고 이원숙 여사는 정경화가 성공적인 영국무대 데뷔 후 전세계에 이름을 알리던 시절, 그가 스트레스로 바이올린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너를 위해 바이올린을 해야한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라"고 말했던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로도 불려왔는데요.

1965년 내 스승이었던 이반 갈라미언교수의 또 다른 제자이기도 한 이작 펄만(1945~)이 당시 최고 권위의 미국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어요. 그런데 2년 뒤인 1967년, 제가 그 콩쿠르에서 우승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곡에 대한 정보가 지금처럼 많이 않았고 수줍음이 많다보니 묻지도 못하고 혼자 죽을 만큼 노력해야 했어요. 되돌아보면 예상치 못하게 5분 후에 생애 가장 의미심장한 경험을 할 수도 있고, 갑자기 하늘과 땅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 인생 같아요. 옆에서 누군가 바꿔주는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달려 있는거죠. 

-이번에 발매한 앨범 '아름다운 저녁'은 1970년 첫 앨범을 발매한 후 이번이 33번째 앨범입니다. 클래식 역사에서 보면 이렇게 많은 음반을 발매한 음악가는 손꼽을 정도입니다.

지금껏 레코딩을 세워본 적이 없었는데 벌써 이렇게 됐나 싶습니다. 힘들게 한 레코딩이 하나 하나 더해지니 이렇게 쌓이는구나 싶어요. 늘 이 녹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합니다. 서른 세 번째 앨범이라고 하니 익숙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녹음이 끝나면 너무 힘들어서 다신 죽어도 못하겠다란 생각이 들 정도예요. 내 기력과 모든 정성을 다 쏟아요. 자신 속에서 들리는 소리와 기대감이 레코딩할 때 나오는 소리와 일치가 안되면 너무 실망하고 좌절하거든요.

1970년에 클래식 레이블 '데카'에서 첫 레코딩을 했을 때 함께 작업을 했던 엔지니어, 프로듀서, 아티스트 디렉터들이 대단히 조예가 깊었던 원로들이셨는데 제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그 덕분에 저도 100%를 믿고 열심히 했죠. 하나하나 레코딩을 하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3월 27일 서른세 번째 정규 앨범 '아름다운 저녁(Beau Soir)' 발매 간담회에서 70세 생일 축하하는 케이크를 받고 활짝 웃고 있다. 바로 전 날이 그의 70세 생일이었다.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1980년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 녹음인데,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이번 앨범에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포레’와 ‘프랑크’ 그리고 ‘드뷔시’의 작품들로 꾸며졌다. 처음으로 녹음한 포레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과, 그녀가 두 번째로 녹음한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담겨있다. 각 작곡가를 대표하는 유명한 소품인 ‘자장가‘(포레)와 ‘생명의 양식‘(프랑크) 등을 마치 주 메뉴와 디저트처럼 엮어놓았다. 또한 드뷔시의 작품인 ‘아마빛 머리의 소녀‘와 ‘아름다운 저녁‘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랑스러운 작품들을 함께 수록했다.)

당시 저보다 불과 2~3세 많은 20대의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 연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어요. 당시엔 리허설 할 시간도 없었는데, 그 친구와 하려니 옆에서 주눅 들어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활이 떨렸으니까요. 기를 쓰고 겨우 했어요. 

사실 요즘 제일 싫은게 제 이름 앞에 '레전드(전설)'가 붙여지는거예요. 그 말이 끔찍해요. 몸이 근질거린다니까요.(웃음) 쉬워진다는 생각이 전혀 안들어요. 오히려 점점 더 힘들어진다니까요.

이번에 함께 한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는 2011년부터 7년간 호흡을 맞췄습니다. 매달 만나서 지독스럽게 연주했어요. 그와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 대부분의 레파토리는 함께 했어요. 케빈 케너는 반주자가 아니라 제 음악적 듀오 파트너입니다. 이번 앨번을 준비하면서 20개 소품을 하겠다고 준비해왔는데 고마웠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 케빈 케너는 2011년부터 파트너로 호흡을 맞춰왔다. 

-이번 앨범에서 포레의 '자장가'를 수록했는데요.

포레의 '자장가'는 제가 1963년에 레슨을 한 번 받고 학교에서 바로 연주했을 정도로 어릴 적에는 곡을 빨리 배웠죠. 큰 아들이 결혼 했는데 손주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이 곡을 녹음했어요. 개인적인 바람은 손녀인데.(웃음) 엄마가 아가에게 자장가를 들려줄 때의 마음처럼 이 곡이 아름다운 마음을 전해졌으면 합니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32년만에 새롭게 녹음한 배경은요.

32년 전 엘가의 '사랑의 인사'는 큰 아들을 위해 연주한 곡이예요. 신기하게도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 곡만 듣고 다닐 정도로 좋아하더라고요. 제가 아들한테 "너를 위해 연주했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거든요. 

이번에 새롭게 녹음한 '사랑의 인사'는 개인적으로 어떤 큰 의미를 부여했다기 보다는 각자 느끼는 대로 받아 주셨으면 해요. 32년 전 연주에서는 젊은 시절 가득했던 열정을 담았다면, 현재의 곡은 안정적으로 들려요. 그래서인지 더 심플하고 편하게 다가옵니다. 현재 제가 느끼는 사랑의 인사를 들려준거죠.  

제가 하는 음악의 초점은 사랑과 평화에요. 평화가 있으려면 사랑이 듬뿍 담긴 삶을 살면서 배려해야 하죠.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어요.  

-'엄마' 정경화로서의 삶은 어땠나요.

시간이 흐르면서 성격이 변해요. 바이올린이 고가였던 시절, 바이올린 근처에 누가 다가와도 불 같이 화냈던 때도 있었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내 양 손에는 바이올린이 아닌 아이들 손을 잡고 있더라고요. 날카로웠던 성격도 인생 경험을 하면서 달라졌지요. 바닥까지 떨어져 마음이 헤매기도 했고, 자식들에겐 엄마 자격이 있나 고민할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두 아이들이 너무 잘 자라줬어요. 지금도 저의 일을 격려해줘요. 너무 행복합니다.

제 어머니도 딸 셋을 키우면서 딸들이 출산을 할 때 한 번도 오시지 않았어요. 참 독특하신 분이셨죠.(웃음) 당신 나이 38세까지 9명의 자식을 낳으셨는데, 저희에게 늘 "너희들도 잘 해낼꺼다"고 말씀하셨던 분이세요. 어머니 말씀처럼 제 아이들은 잘 자랐고, 저도 여전히 활동을 합니다.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제 인생에서 어머니는 굉장히 중요한 분이세요. 인생이 앞으로 펼쳐나갈 수 있게 늘 뭔가를 찾아주신 분이셨죠. 어릴 적 어머니께서 "인생은 한 폭의 그림인데, 열심히 그리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이 그림은 안된다고 쫙쫙 그어버리면 그게 뭔가"라고 하시던 그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전 어떻게 그림을 그려나가야 할까 생각했죠. 10대 시절 죽어라 노력한다면 최고의 황금기로 불리는 40대 중반에 내가 원하는 성숙한 연주자가 되어있지 않을까, 그러면 내 그림은 어느정도 그려지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 시기가 벌써 25년 전이네요.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우연하게 음악을 하고 있지만요.(웃음)

평생 한 폭의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고 있고 매 순간 그림을 그리듯 음악을 해왔어요. 지금은 체력이 안 돼서 음도 빠지고 활에서도 지저분한 소리가 날 때도 있어요 . 예전에는 이러면 스스로 수치스러워서 머리를 쥐어 뜯을 때도 있었지만, 이미 그런 시기는 지났습니다. 이게 마지막 연주라는 생각을 매번 합니다. 그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다 주려고 합니다. 관객분들도 어느 나이에서나 몸부림치면서 힘든 생활을 하는 분들인지 알기 때문이죠. 

제가 하는 음악은 위로입니다. 현재 본인이 처한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나 음악 속에서 방황하고 흔들리기도 하며 사랑 받고 또 미움도 느끼고 나면 굉장히 신비스럽다는걸 느껴요. 그게 연주자의 메시지고, 제 메시지죠. 이를 위해 전 만 퍼센트 노력해왔습니다. 제가 제일 사랑하는건 관중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사진=워너뮤직코리아

-서양에 한국을 알린 최초의 클래식 연주자이자, 평생 한국 국적을 유지한 걸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하면 한국이 도움이 될까를 늘 생각해요. 지금은 21세기에서의 전통 음악 발전을 위해 협조하고 관련된 일을 하려고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해도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애국자 할아버지 피를 받아서 그런지 한국을 미친 듯이 사랑합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전 세계에서 활약하며 정말 놀라울 정도로 열심히 잘 하고 있어요. 한국인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창조적이고 독창적입니다. 또 어느 곳에건, 어느 분야이든 적어도 30년 경력을 쌓아온 달인들이 꼭 있어요. 인내와 '난 할 수 있다'는 자기 믿음, 이는 한국인의 상징이라고 봐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주는 상담자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치 않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자기 자신이 보람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제가 언제까지 연주인으로 활동할지는 모르지만, 만약 이 일을 접게 되면 젊은이들과 함께 연계해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데까지 열심히 사회생활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는 3월 30일 '통영국제음악제 개막공연'에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데 이어, 4월2일 통영국제음악당과 3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케빈 케너의 협연으로 바이올린 리사이틀을 연다. 6월 3일 롯데콘서트홀에서도 케빈 케너와 함께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김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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