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들과의 수다, 숙녀들의 저녁식사
세계 여성들과의 수다, 숙녀들의 저녁식사
  • 김세원
  • 승인 200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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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디너(Ladies Dinner)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 김세원


[인터뷰365 김세원] ‘레이디스 디너(Ladies Dinner)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주한 노르웨이대사관에 근무하는 엘리자베스가 보낸 초대장을 받았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 하나가 있었다. 호텔 직원, 디자인회사 사장, 대학원생. 스물 아홉 살 난 세 독신여성의 삶과 사랑을 그린 한국 영화 ‘처녀들의 저녁 식사’였다. 세 처녀들은 저녁상 앞에서 낯 뜨거울 만큼 대담하게 성(性)과 남자에 대해 수다를 늘어놓는다. 그러면 오늘 숙녀들의 저녁식사에 오를 수다 메뉴는 뭘까. 얼마 전 이태원에 있는 엘리자베스의 빌라에 열 여섯 명의 국내외 레이디들이 모였다. 독일 노르웨이 스위스 그리스 스웨덴 칠레 호주 이스라엘 등 서울 주재 외국공관에 파견된 여성외교관과 해양수산부, 외교통상부의 여성공무원, 외국계 호텔 체인에서 근무하는 재미교포 등이었다. 각자 명함을 교환하고 난 뒤 엘리자베드의 ‘초대의 변(辯)’이 이어졌다.


숙녀들의 수다, 훔쳐보기


‘레이디스 디너’는 한국에서 근무 중인 외국 여성외교관들과 한국의 전문직 여성들이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직장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함께 나누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자리로 몇해 전 첫 모임을 가진 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단다. 마이너리티여서 일까. 직장 여성들끼리는 국적과 직업을 불문하고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본국에 남아 있는 남편에 대한 흉부터 직장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어려움, 직장 내에서 고속 승진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질시, 한국의 여성정치인까지 다양한 소재들이 저녁상에 올랐다. 마침 식사도 노르웨이산 훈제 연어와 으깬 감자, 양고기 스튜를 주요리로 한 뷔페식이었다.


미혼이라면 관계없지만 기혼 여성외교관들의 경우 남편 동반 근무가 풀어야 할 큰 숙제중 하나. 스웨덴대사관의 프레데리카는 남편이 스웨덴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 서로 떨어져 지내야 한다. 반면 독일대사관의 크리스티나와 이스라엘대사관의 아비빗은 부부외교관이라 본부의 배려로 남편과 함께 근무하고 있다. 저녁 식사도 끝나고 포도주가 두 병 째 비워지자 식탁 분위기가 고조됐다. 런던 연수 시절이 그립다는 우리나라 여성공무원의 얘기에 누군가가 런던 자체가 그리운 거냐, 아니면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그리운 거냐고 되물어보면서 ‘외국생활이 주는 자유’가 화두로 떠올랐다.


Talk 1. 키스의 자유를 허하라.


해외 지사 근무의 경우 아무래도 본부 근무보다는 조직 규모가 작으므로 조직과 직장 상사나 동료들로부터 받는 압력이나 ‘상호 감시’가 덜한 편이다. 특히 어딜 가나 위계질서와 서열이 존재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인간관계로부터의 자유가 해외 근무의 가장 큰 혜택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내 경우, 유럽 땅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촌뜨기 동양여자의 눈에 가장 쇼킹하면서도 부러웠던 것은 대학 캠퍼스에 남녀학생들이 거리낌 없이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영국이나 독일은 덜한 편인데 프랑스에서는 남녀간의 애정표현이 유난히 자유로운 편이다. 학생들은 잔디밭이나 벤치에 앉아 있거나 점심시간에 학생 식당 앞에 줄을 서 있다가, 심지어 계단식 강의실에서 수업중일 때도 서로 마음이 동(?)하면 키스를 해댔다. 주로 여자 쪽에서 주도하는 것도 의외였다. 하긴 악수보다는 서로 뺨을 대고 입으로 쪽~ 소리를 내는 ‘비주’가 친구끼리의 인사법으로 굳어졌고 ‘프렌치 키스’란 말까지 탄생시킬 정도면 프랑스인들의 키스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하지만 동양인들끼리의 어줍잖은 키스는 본토박이들에 비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남이야 보기에 괴롭건 말건 파리에서는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남편을 보낼 때 마다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이별의 키스신을 찍는(?)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오니 인천 공항에서의 kiss and say good bye는 물 건너 가버리고 말았다. 이 얘기를 들은 누군가가 한국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키스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느냐고 진지하게 물어 한바탕 웃음보가 터지기도 했다. 글쎄 공공장소에서 키스행위가 경범죄 단속 대상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Talk2. 옷차림의 자유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외국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또 있다. 바로 옷차림의 자유다. 보르도에 있었을 때 유학을 나오자마자 귀부터 뚫고 십자가 귀걸이를 자나 깨나 달고 다니던 남학생이 있었다. 십자가 귀걸이를 해보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는 한국에서 그러고 다녔더라면 그날로 집에서 쫓겨났을 거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머리를 묶고 다녀 프랑스에서 꽁지 머리 김으로 통했던 한 화가를 서울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 치렁치렁하던 머리는 온데 간데 없고 논산훈련소의 신병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있어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은 적이 있다.


몸매는 바비 인형과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나는 가슴선이 깊게 파인 파티 드레스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 ‘신데렐라’'백설공주며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은 서양 동화에 너무 심취했던 탓일게다. 그토록 입어보고 싶었던 파티드레스(명품 브랜드가 아니라 반짝이 수영복에 긴 치마를 붙였다고 보면 된다)가 유럽에서는 수퍼마켓에서 7~10만원 정도면 살 수 있을 정도로 흔해 세일할 때 마다 한 벌 씩 사모았다. 서울에 돌아와 지난 연말 한영협회에서 주최하는 애뉴얼 디너 파티에 모처럼 가슴이 시 스루 룩으로 처리된 검정 니트 드레스를 입고 갔다가 눈총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호주대사관의 공사는 호주 여성의 핑크색 속옷 끈이 밖으로 나오자 같이 근무하는 한국인 여성이 질겁을 하면서 올려주더라며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옷차림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Talk3. 압제자는 한국인인 우리 자신


모두들 웃었지만 어쩐지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외국 생활에서 얻는 자유가 그만큼 많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그만큼 많이 박탈되고 있다는 뜻일 터. 70,80년대 독재정권 시절에는 공권력에 의해 개인적 자유가 침해당했다면 자유민주주의가 확립된 2000년대에는 외국에 나가더라도 더 이상 특별히 누릴만한 자유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외국생활이 한국인들에게 선사하는 자유는 적지 않다. 그렇담 도대체 누가 국내에서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는 말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친인척에 각종 동창회 향우회 직장내 동호회, 같은 동네 친목모임 등 수많은 인간관계로 얽혀있는 한국인들은 스스로 만든 그물에 걸려 나비처럼 허우적대고 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을 타인의 시선에 두는 ‘타인 지향의 사회’에 살고 있는 한, '완벽한' 사생활의 자유를 위해 해외에서 잠시나마 이방인이 되려는 해외근무 희망자의 숫자는 줄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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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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