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의 파괴, 관객을 위한 선택...연극 '더 헬멧'
형식의 파괴, 관객을 위한 선택...연극 '더 헬멧'
  • 주하영
  • 승인 20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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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연극 '더 헬멧(The Helmet)-룸스(Room's) Vol.1'
연극 '더 헬멧'의 '룸 알레포' 공연 장면. '더 헬멧'은 민주화운동이 한참이던 '룸 서울'과 시리아내전을 배경으로 한 2017년의 '룸 알레포'라는 두 개의 공간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에피소드를 보여준다./사진=아이엠컬처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티켓을 건네고 들어서는 입구, 두 갈래로 나뉘는 좁고 어두운 통로, 호기심과 불안감을 숨긴 채 도달한 벙커와 같은 공간...연기가 자욱한, 조명마저 어둡고 허름한 곳에 들어선 관객의 뇌리에 스치는 생각은 오직 하나다. '이건 뭐지? 연극 맞아?' 

좌석번호를 찾느라 스마트폰 불빛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은 관객들이 바라보게 되는 것은 맞은편과 좌, 우의 객석에 앉아있는 다른 관객들이다. 텅 빈 무대 공간에 버려진 듯 놓여있는 낡은 책상, 몇 권의 책, 곰 인형, 영화 포스터와 같은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제 또 다른 질문이 관객들의 머릿속을 채운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화제를 모았던 제스로 컴튼 프로덕션의 '트릴로지 시리즈'를 한국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을 뿐 아니라 혁신적이고 새로운 형식의 공연들을 계속 추구해 온 ㈜아이엠컬처는 2018년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의 창작 신작 '더 헬멧'을 선보였다.

'어디서도 본 적 없지만 빠져들게 될 연극'이라는 '더 헬멧'은 '하얀 헬멧'이라는 오브제가 품고 있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폭력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구조대원 '화이트 헬멧'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굴복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진압대원 '백골단'이라는 설정을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관객들은 대한민국 '서울'과 시리아 '알레포'라는 쉽게 연계되지 않는 두 개의 공간을 마주하지만, 특정 체제 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이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은 결국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에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어떤 체제건 사회 속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간다움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삶', 그리고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되는 '평화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연극 '더 헬멧'의 '룸 서울'(사진 위)과 '룸 알레포'(사진 아래)공연 장면/사진=아이엠컬처

'더 헬멧'의 에피소드는 기본적으로 1987년과 1991년의 민주화운동이 한참이던 '룸 서울'과 시리아내전이 점점 더 심각한 방향으로 치닫던 2017년의 '룸 알레포'라는 2개의 공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각 룸은 개별적인 공연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티켓을 따로 예매해야 하지만 '하얀 헬멧'이라는 공통된 오브제를 제외하고는 두 공연의 에피소드가 서로 연계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두 개의 공연을 모두 관람해야만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보다는 제시된 '특정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전체의 맥락을 설명해야 하는 긴 이야기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숱하게 마주하면서도 남의 일이기 때문에,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쳐 버리던 뉴스 속 사건과 같은 강렬한 상황들이 더 많은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단지 그 '상황'을 나와 연계시킬 끈 혹은 고리가 필요할 뿐이다.

만약 연극이 그러한 연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만 있다면 사실상 그 연극은 제 몫을 다한 셈이다. 제시된 상황 속 '나의 위치,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철저히 관객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서울과 알레포라는 각 공간에서 시작한 각기 다른 에피소드는 극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특정 상황'의 발생으로 인해 갑자기 '칸막이'에 가로막힌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된다. 80개의 좌석이 있는 비교적 넒은 공간에 있는 관객들은 '빅 룸'에 있는 인물들의 상황을, 20개의 좌석이 있는 매우 협소한 공간에 있는 관객들은 '스몰 룸'에 있는 인물들의 상황만을 각기 따로 '목격'하게 될 뿐이다.

갑자기 두 동강이가 난 무대를 가로막고 서있는 칸막이는 이따금 반대쪽 상황을 짐작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던져주며, 가끔 투명한 유리로 바뀌어 반대쪽 공간의 모습을 비춰주지만 기본적으로는 관객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불투명의 방음벽으로 유지된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소음과 흐릿한 그림자로 인해 관객들은 자꾸만 반대편 벽 너머의 상황을 궁금해 하지만 이내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벽 너머의 이야기는 체념한 채 자신들 앞에 펼쳐지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연극 '더 헬멧'의 '룸 서울' 공연 장면/사진=아이엠컬처

'룸 서울'은 1987년 시위도중, 전경들에 쫓겨 작은 서점의 지하 방으로 피신한 학생들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도록 조직된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의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동생을 둔 서점주인은 쫓기는 학생들을 지하로 안내하지만 이내 그들을 쫓아온 백골단 전경들을 내보내기 위해 지하 공간을 둘로 나누며 벽을 세운다. 벽에는 1986년 개봉된 영화 '에이리언 2'의 포스터가 붙어있고, 포스터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이 나 있는데, 비밀공간에 숨어있는 학생들은 이 구멍을 통해 다른 쪽 방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어떻게든 백골단을 빨리 내보내려고 애를 쓰는 서점주인,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흰색 헬멧의 전경들, 그리고 숨어있음에도 조용히 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초조함에 실수를 연발하는 신참내기 여학생, 그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다리를 다친 탓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고참 선배 남학생. 그리고 의심과 확신을 숨긴 채 계속 벽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자신이 백골단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넓은 공간의 두 남자, 그리고 각자 자신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서로에게 털어놓는 좁은 공간의 두 학생...

연극 '더 헬멧'의 '룸 서울' 공연 장면/사진=아이엠컬처

'룸 알레포'는 시리아 내전 속 알레포의 한 방에서 시작한다.

스마트폰으로 축구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남자에게 같이 축구를 하자며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옆 집 아이, 하지만 군인으로 임무를 부여받아 알레포에 잠입한 남자는 아이를 쫓으며 외친다. "절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얼마 전 폭격으로 아이와 가족을 모두 잃은 남자는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민간인을 구조하는 '화이트 헬멧'에게 세계의 관심이 쏠리는 탓에 정부가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시리아 민방위대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기 위해 광장에 나가 자살폭탄 테러를 할 계획을 세운다.

폭탄조끼를 입고 타이머를 맞추는 순간 갑자기 포탄에 맞아 무너져 내린 건물은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된다. 건물의 잔해로 뒤덮인 폐허 위로 생존자를 찾아 헤매는 시리아 민간 구조대 '화이트 헬멧'과 이들을 촬영하는 영국 종군기자, 그리고 그들에게 구조된 폭탄조끼를 입은 남자...

한편, 축구선수를 꿈꾸면서도 늘 폭격이 두려워 혼자 방에만 머물러야 했던 옆 집 아이는 폐허 속에 묻힌 채 다른 쪽 공간에 갇혀있다. 옆 집 아이 앞에 또 다른 아이가 나타난다. 유령인 듯 환영인 듯 비눗방울을 불며 아무 말 없이 등장한 그 아이는 어딘가 슬퍼 보인다.

연극 '더 헬멧'의 '룸 알레포' 공연 장면/사진=아이엠컬처

연극에 있어 형식 파괴의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세기 사실주의 극들을 통해 '제 4의 벽'처럼 인식되던 관객들이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환상'을 지켜보기만 하는 수동적인 관객이 아닌 '참여하는 관객'이 되어야 할 필요성은 일찌감치 제기되었고, 이를 위한 피나는 노력들은 20세기를 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브레히트와 아르토, 포스트 드라마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같은 문제는 언제나 '관객의 참여'와 '인식의 전환', 그리고 '현재 삶의 변화'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무대를 다른 누군가의 세상이 아닌 나의 세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일, 무심코 지나쳤을 일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일, 한 가지 일에 또 다른 측면이 있음을 깨달아 보다 깊은 사유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로 연극은 언제나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단지 그 목표에 이르는 다른 방식을 주장했을 뿐 '공동체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사유의 장'이라는 연극 고유의 기능은 변한 적이 없다.

'새로운 연극방식'을 주장한 탓에 늘 논란의 중심에 서왔던 영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본드는 말한다. "연극은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더 꽉 붙들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연극은 현재에 관한 것이 아닌 미래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극작가에게는 오직 두 개의 주제만이 있을 뿐이다. 미래와 과거, 즉 미래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과거를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연극은 반드시 인간다움에 관한 질문을 던져야 하며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폭력을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악마'로 인정할 경우, 폭력은 심지어 숭고하게 여겨지며 아우슈비츠의 변명거리를 제공하는 일에 쓰이게 될 것이다."

연극 '더 헬멧'의 '룸 알레포' 공연 장면/사진=아이엠컬처

연극 '더 헬멧'은 세상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각기 다른 공간에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각기 나름의 이유로 상처받은 사람들, 그 분노를 다른 누군가를 향해 분출하고 있는 사람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 미움이 자신을 잠식하지 않도록 내 안에 있는 미움과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어른들의 세상에서 자신의 꿈조차 펼쳐보지 못한 채 희생되어야 하는 아이들...

머나먼 시리아 땅에 있는 아이가 타국의 아이가 아니라 현재의 세상이 품고 있는 우리 모두의 아이임을 깨달을 때, 내 앞에 놓인 내 문제만이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 아픔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획득할 때, 그제야 우리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영국의 시인 존 던은 말한다. "어떤 사람도 섬일 수 없다. 그 자체로 전부일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부분이다. 주된 어떤 것의 한 부분인 것이다"라고.

두 공간을 채우는 4개의 에피소드, 연극의 새로운 형식이 제공하는 체험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싶다면, 연극 '더 헬멧'을 통해 확인해봄이 어떨지./3월 4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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