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발굴 인터뷰] 최인규 감독 '자유만세' 여배우 하연남을 만나다
[단독 발굴 인터뷰] 최인규 감독 '자유만세' 여배우 하연남을 만나다
  • 김리선 기자
  • 승인 2017.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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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데뷔한 한국영화계 최고원로 은막의 스타
/사진=인터뷰365
 해방과 함께 한국영화가 꽃피기 시작하던 초기에 활동한 1세대 최고령 원로배우인 하연남 여사. 60여년전 영화계를 떠난 그는 본명 하상남으로 돌아가 성공한 발명가의 길을 걸었다./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리선기자] 영화배우 하연남(본명 하상남(河相南), 1927∼ )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최초의 35㎜필름 영화로 제작, 개봉된 최인규 감독의 영화 <자유만세>를 통해 연기활동을 시작한 생존 배우 중 최고참 은막의 별이다.

그녀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영화인들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은 일찍 충무로에서 모습을 감춘 뒤 일체 영화인들을 만나지 않고 영화와 거리가 먼 딴 세상에서 활동하면서 살아온 탓이다. 그녀가 아흔을 넘어선 연세지만 아직도 정정하고 활기 찬 모습을 최근에 개최된 ‘월드 시네마 위크’ 행사장에서 드러내 자리를 함께 한 후배 영화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40년대 최인규 감독이 발탁한 은막의 별이 건강하게 생존해 있다가 60여년만에 홀연히 공개석상에 나타난 사실은 영화계에서 볼 때 하나의 사건이다.

지난 11월 1일 오후 서울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원장 류재림)이 평창올림픽을 앞둔 기념행사로 주관한 ‘주한 외교단과 함께 하는 월드 시네마 위크’ 개막식에 초청인사의 한사람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참석한 그의 모습은 아직도 젊은 시절의 뛰어난 미모를 쉽게 유추할 만큼 우아하고 단아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한국영화 부흥을 이끌었던 1세대 원로배우 하상남 세리온생명공학연구소 회장이 참석해 영화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등장은 영화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박성배 촬영감독(맨 왼쪽부터), 구중모 촬영감독, 이석기 촬영감독과의 기념 촬영./사진=인터뷰365
한국영상자료원이 주관한 '주한 외교단과 함께 하는 월드 시네마 위크’ 개막식에 참석한 하연남 여사는 영화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사진 왼쪽)영상기술감독 박승배(맨 왼쪽부터),  4D film 구중모 대표, 영화감독 이석기와 기념사진을 함께한 모습,(사진 오른쪽) 하연남 여사를 초청한 류재림 한국영상자료원 원장(맨 왼쪽)./사진=인터뷰365

-1940년대에 활동하셨고 연세가 아흔이 넘으셨는데도 건강하신 모습을 뵙게 되니 놀랍습니다.

최은희 씨가 연극배우로는 일찍 활동했지만 영화배우로는 내가 먼저입니다. 1946년 최인규 감독님의 <자유만세>에 함께 출연한 전창근 황려희 유계선 전택이 씨는 모두 별세하시고 나 혼자 남았으니 아마도 내가 생존 여배우로는 제일 선배가 될 겁니다.  

-첫 작품 <자유만세>는 어떤 영화였습니까?

광복 후 최초의 영화입니다. 35㎜ 카메라 필름에 담은 60분짜리 영화였어요. 전창근 씨가 한중이라는 독립운동가 역할을 맡았는데 일제 앞잡이의 배신으로 감옥생활을 하고 그를 구하려는 여자와 사랑을 나누며 고통을 겪는 이야기였어요. 개봉이 되어 크게 화제가 되고 관객들이 많이 몰려왔던 걸 기억합니다.

-고향은 어디신가요.

충청북도 청주입니다.

-영화 데뷔는 어떻게 하신거죠?

배우 모집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누가 절 강제로 데려갔습니다. 당시 200여명이 몰렸는데, 황려희와 저까지 여배우 두 명이 뽑혔습니다. 배우를 한다고 하니 부모님이 완강히 반대하셨어요. <자유만세> 때 아버지가 저를 한강에 데리고 가서 “너죽고 나죽자”고 하셨죠.

-출연 영화가 몇 편이 됩니까?

윤봉춘 감독님이 연출한 <처녀별>에서 김진규 씨와 출연하고 신경균 감독님의 <노들강변>에서 허장강 씨와 출연하는 등 1950년대까지 15편에 출연했습니다. 마지막 출연 영화가 1956년 윤봉춘 감독님의 <처녀별> 같군요. 유치진 작가님의 희곡 '별'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윤봉춘 감독님은 나운규 감독님과 더불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시기 영화계에 큰 획을 그으신 분이신데, 영화계에서 그 업적이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 영화가 크게 히트치면서 국산 영화가 붐을 이뤘죠. 저는 몸을 다쳤지만 그 뒤 불구가 된 팔을 가리고도 연기 활동을 했어요.

영화 '자유만세(1946)', '처녀별' 포스터. 영화 '자유만세'는 해방 후 제작된 본격적인 극영화인로, 해방작품의 효시로 손꼽힌다. 당시 '자유만세'는 대만에 수출됐으며 장제스(장개석)총통이 관람한 후 '자유만세 한국만세'라는 휘호를 써주었다고 전한다./사진출처=한국영상자료원
하상남 회장이 하연남이란 예명으로 출연했던 영화 '자유만세(1946)', '처녀별(1956)' 포스터. 영화 '자유만세'는 해방 후 제작된 본격적인 극영화로, 해방작품의 효시로 손꼽힌다. 당시 '자유만세'는 대만에 수출됐으며 장제스(장개석)총통이 관람한 후 '자유만세 한국만세'라는 휘호를 써주었다고 한다./사진출처=한국영상자료원

-팔을 다쳤다고요?

영화 <자유만세> 출연 후 6.25당시 9.28 서울수복 무렵 피란길에서 날아온 박격포탄을 맞고 오른쪽 팔을 크게 다쳤습니다. 그때 당시 수술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24살이었습니다. 이후 3-4년간을 새장 안에 새처럼 살았죠.

-그리고 어떻게 다시 영화계로 복귀를 하시게 됐습니까.

집안에서 서울 신당동에 유명한 약국을 운영했는데, 손이 다친 걸 알고 윤봉춘 감독님과 제작자가 찾아오시더니 절 다짜고짜 데리고 갔어요. 그러면서 윤 감독님이 꿈을 꿨다며 말하기를, 오드리 헵번이 죽어서 구루마(손수레)에 시체를 끌고 가는데 덮은걸 들쳐보니 얼굴이 저로 변했데요. 그리고 출연한 <처녀별>이 크게 성공한거죠.

-지금 오른쪽 팔은 괜찮으신지요?

손에 장갑을 끼고 있어서 사람들이 다쳤는지 잘 모릅니다. 제가 발명한 신물질로 제 손도 이만큼 고칠 수 있었죠.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 다친 손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설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발명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졸업은 못했지만 경성여의전을 다니던 의학도 시절도 있었죠. 제 전공은 아니었지만 밤새가면서 독학했습니다. 그리고 발명가로 성공했어요.

/사진=인터뷰365
본명인 하상남이란 이름으로 세리온생명공학연구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우아하고 단아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다./사진=인터뷰365

-발명가로서의 삶은 어땠나요. 

배우보다 더 천부적인 재능이 발명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세리온'이란 생명공학 분야 물질을 발명해 독일에서 개최된 국제발명특허전에서 두차례 대상을 받았어요. 그 때 나이가 66세, 76세 때 일이죠. 경제부흥을 위해 전국을 누비면서 발명운동을 했어요. 당시 언론에 많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올해 7월에는 <자유만세>등 관련 자료들과 초창기 여성발명가로 활동했던 기록물들이 국가기록원에 등재됐어요.

특허를 낸 여러가지 발명품으로 사업도 해서 크게 재산도 모았으나 사업관계로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용 당해 모든 것을 잃기도 하고 기복이 많았습니다.

-주신 명함을 보니 지금도 세리온생명공학연구소 회장으로 활동하시고 또 재단법인 한국여성발명협회 창립 초대회장과 연세대 특허법무대학원 고문으로 적을 두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영화배우 활동을 그만 두면서 영화인을 비롯한 영화계와 애써 단절된 생활을 해오신 동기라도 있는지요?

배우시절 친한 사람이 많았어요. 돌아가셨지만 김신재 씨와 문정숙 씨는 자매처럼 지냈어요. 그런데 어느 때 나는 이미 고인이 되셨고 지금 와서 이름을 밝히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만 선배 한 분과 동료 한분에게 배신을 당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나에게 전달해야 할 할리우드 영화 진출 및 출연 요청을 중간에서 훼방을 놓아 무산이 된 일이 있었어요. 너무 낙심과 배신감에서 그후 영화계를 등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어요.

인터뷰중인 필자/사진=인터뷰365
인터뷰 중인 하연남 여사/사진=인터뷰365

-가족관계가 궁금합니다. 지금은 누구와 살고 계신가요?

남편은 고인(이효창)이 되셨습니다만 초기 국가대표급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였습니다. 광복 이후 최초로 1948년 스위스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선수기도 했죠. 우리 사이에 낳은 딸들이 있지만 모두 외국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에서 혼자 삽니다.

 

 

김리선 기자
김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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