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정중헌 편집자문위원]1930년대에 씌여진 채만식의 희곡 '제향날'이 최용훈 연출에 의해 생명력을 얻었다.
'제향날'은 옛날얘기처럼 평면적인 희곡이 배우와 연출에 의해 입체적인 역사로 되살아나 단편소설같은 상큼한 맛을 풍겼다.
채만식은 소설을 썼지만 이 희곡을 통해 3대의 역사를 녹여내고 있다. 동학과 삼일만세와 사회주의다.
남편 제삿날 밤을 까며 외손자에게 들려주는 최씨(강애심)의 가족사는 무심한듯 말하지만 격동의 세월에 부대낀 진한 회한이 서려있다. 동학 농민운동을 주도했다가 옥고로 세상을 뜬 시아버지, 삼일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끝내는 생이별한 남편, 그리고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하며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장손.
그 모진 풍파를 겪은 최씨는 혈맥이라는 '불씨'를 신주처럼 지켜왔다. 채만식의 구전 형식 희곡은 최용훈에 의해 보는 역사로, 사람 냄새 물씬한 우리 이야기로 다가왔다.
최용훈 연출은 우선 관객이 이해하도록 연극적 요소를 잘 살려냈다. 할머니가 외손주에게 들려주는 지나간 사건들을 살아있는 인물들로 재현함으로써 관객들도 극중의 역사 현장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또 무대 구조나 장치는 현대적이지만 그 시대 특유의 맛깔스런 대사나 분위기를 살려 잔 재미를 준다. 그러면서 계속 구르는 돌처럼,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면면한 민족성과 가족애라는 주제를 살려낸 점은 대단한 성과라고 본다.
이 연극의 중심은 배우 강애심이다. 필자는 신인시절부터 그의 가능성을 내다보았는데 이번에 산전수전 다 겪어 넋이 나갈 법한 캐릭터를 과장없이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정감있게 표출해냈다.
모친 역 김용선의 눈물겨운 모정 연기는 관록이 묻어있고, 박윤희의 순사 연기도 멋졌다.
다만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직설적이기보다 상징적으로 표현했으면 극의 아우라가 더 오롯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전반적으로 배우들의 고른 연기가 젊게 변화된 무대, 의상 등과 어우러져 무지 아픈 우리 현대사를 옛날얘기처럼 재밌게 엮어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11월 5일까지 백성희장민호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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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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