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남북 분단의 벽이 없는 '평화의 사도' 함제도 신부
[인터뷰]남북 분단의 벽이 없는 '평화의 사도' 함제도 신부
  • 김두호
  • 승인 201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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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부터 52차례 남북 오가며 결핵환자 지원
함제도 신부/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김두호 인터뷰어】메리놀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인 함제도 신부(1933∼ 미국명 Gerard E. Hammond)는 25살 때 한국 땅에 건너와 한평생 한국 사람을 돕고 기도하며 살아온 성직자다.

내년이면 만 60년, 한국 사람으로 살아온 지 곧 회갑년을 맞이하는 84세 은발의 노안에 피어나는 맑고 평화로운 미소는 아기천사처럼 순수하고 곱게 느껴진다.

함제도 신부의 머릿속에는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남북한의 대치상황이나 군사 분계선이란 게 없다. 지난 5월로 결핵환자를 돕기 위해 북한을 쉰 두 번째 다녀온 그의 마음 속은 한결같이 남북한 동포는 같은 민족이고 어느 쪽이든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달려가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봉사해주는 대상일 뿐이다.

한국인끼리의 동포애보다 더 애틋한 그의 한국인 사랑이나 봉사활동은 이념이나 정치 따위와 무관하고 심지어 자신의 사명인 종교(선교)까지도 초월한 인도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남북한 어느 쪽이든 신뢰를 받는 성직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

지금 남북한 관계는 북한의 핵문제로 인해 점점 긴장감이 고조 되고 있고 국제관계도 불안하게 발전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평화의 사도(使徒)라고 할 함 신부의 지나온 길과 멈추지 않고 뚜벅뚜벅 가고 있는 그의 인도주의 행로는 통일을 염원하는 한국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드리운 불안정한 시대의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있다.

북한의 결핵환자를 지원해온 단체인 유진벨재단의 임원으로 참여해 1995년 선뜻 북한을 방문하면서 시작된 22년간의 북한 돕기 활동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남북을 자유롭게 오고 간 함 신부를 만났다.

2017년 5월 북한을 정기방문해 결핵환자 치료사업을 한 유진벨재단의 다국적 임원들. 재단이사엔 함제도 신부(앞쪽 왼쪽에서 두번째)와 재단 회장인 인세반(미국명 스티븐 리튼·앞쪽 왼쪽에서 세번째)박사/제공=유진벨재단

-지난 8월 1일(2017) 미국 센터루이스에서 성모수도회의 '콜럼버스기사단'(Knights of Columbus)이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영예인 '기쁨과 희망상'(The Gaudium et Spes Award)을 받기 위해 시상식을 다녀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내용의 상인지요?

신앙과 봉사정신을 실천한 개인에게 주는 상입니다.

(함 신부는 단지 한마디로 대답하고 더 이상 수상 내역을 자랑하거나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 서울 중곡동에 있는 메리놀 외방선교회 한국 본부 건물은 고풍이 스며있는 큰 건물이었지만 그의 집무실은 뜻밖에도 서너 평 정도의 소박하고 작은 방이었다. 교황을 친견한 사진들이 집무실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면 또 다른 그의 작은 응접실은 많은 상패와 감사패들이 진열되어 상패 하나가 더 늘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북한을 마음대로 왕래하셨다면서요?

그래요. 지난 5월에도 다녀왔어요. 내가 가는 목적은 대북지원사업으로 재해와 보건의료지원을 해온 유진벨재단(1895년 한국에 파견되어 목포와 광주지역에서 의료 및 교육사업을 한 유진벨 선교사의 후손들이 선교사역 100주년을 기념해 미국에서 설립한 민간지원 단체)의 실무 이사로 참여해 주로 북한의 결핵환자를 돕는 활동을 하는데 있어요. 그 목적만을 임무로 알고 방문해 남북쪽 누구도 특별하게 시선을 주지 않아요. 시간이 흐르고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북한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도 변했답니다.

-어떻게요?

좀 젊었을 때는 함 동무, 함 동지라고 하더니 지금은 "우리 신부선생"이라고 해서 내가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 달라 했더니 젊은이들은 그렇게 부르고 나도 "손자야"라고 편하게 불러요.

-지난 5월에 방문하셨다면 우리 국내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수선할 때인데요. 그럼에도 방북 절차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나는 한국인으로 산지는 오래되지만 미국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어요. 나라 안이 어수선해도 유진벨재단의 활동은 목적이 분명하고 순수해 올해도 정기 방북 지원사업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어요. 우리 대표단이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이미 비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5월 2일부터 23일까지 사전에 합의된 일정대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여러 지역에 있는 12개 결핵센터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결핵센터를 찾아갈 때마다 현지 의료진과 환자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어요. 이번에 400명이 넘는 새 환자의 등록을 받았는데 아마도 올해는 예상 목표수 1000명 정도를 초과하게 될 것도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업은 새로운 병동의 건립인데 기존 시설의 증축과 신축 병동 건립 계획들이 준비가 잘 진행되고 있어요. 북한 보건성에서 승인했고 위치 선정도 끝나 이곳에서 조립식 건물 자재의 반출 승인만 받으면 곧 20채 정도의 병동을 세워줄 수 있습니다.

함제도 신부의 집무실 한쪽 벽에는 교황을 친견한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왼쪽부터 요한바오로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사진=인터뷰365

-신부님을 비롯한 유진벨재단의 그러한 지원사업과 봉사활동을 접해온 북한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요?

치료를 받거나 완치된 환자들이 손을 꼬옥 잡고 눈물로 감사를 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힘들게 살지만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정을 느끼게 해요. 또 이번 방문에서 돌아올 때 보건성이 편지 한통을 전해주었어요. 결핵과의 사투를 위해 지난 20여년간 함께 해온 유진벨재단에 대한 감사의 글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 그 고마운 인사를 유진벨의 사업을 후원해온 수많은 후원자님들에게 전해야합니다.

-한국말을 한국 사람보다 더 잘하시는군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바로 한국말 공부를 했어요. 참 어려웠어요. 이화여대 교수 분에게도 배우고 고려대 영문과 학생이 내 숙소로 와서 아침마다 3개월간 가르쳐주었지요.

-25살 때 한국에 오셨다면서요?

그때는 항공편이 없어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Bayou State라는 화물선을 타고 알레스카와 일본 홋카이도, 요코하마, 고베를 경유해 다시 부산을 거쳐 인천항을 통해 한국에 왔지요. 태평양을 반 바퀴 돌아서 꼬박 3주간이 걸렸어요.

-어떻게 한국을 선택하셨는지요?

돌아가신 장면 전국무총리의 셋째 아드님인 장익 주교(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의장)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나와 고등학교와 메리놀 신학대도 같이 다녔어요. 장 주교를 통해 한국에 관심을 가졌고 신부로 서품된 뒤 내가 가야할 곳으로 한국을 지망 했어요.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는 가난한 피난민들이 서울에 너무 많이 살던 때였지요. 힘들지만 열심히 살아가려는 사람들 속에서 많은 인내심을 배우고 정신적인 도움도 받았어요. 한국인은 한이 많은 민족인 걸 나는 잘 알아요.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 전이라 참 어렵고 힘든 시대였지요.

집무실에서 필자와 인터뷰 중인 함제도 신부/사진=인터뷰365

-신부님은 이름도 한국 이름으로 바꾸셨지만 말씨도 그렇고 생활의식도 이제는 한국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나는 충청도사람입니다. 괴산 성당에서 7년 사제로 머물렀고 청주 본당에 있을 때는 청주대학교 영문과 강의도 다녔어요. 30여년 충청도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충청북도가 고향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죽으면 미국으로 가지 않고 청주시 근교에 있는 성직자 묘지에 잠들겠다는 생각도 오래전부터 해왔어요. 그리고 내 생일이 한국의 광복절인 8월 15일인데 그것도 한국인과 남다른 인연입니다.

-미국의 고향이나 가족 분들 생각도 많이 나시지요?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은 필라델피아입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물리학교사였고 어머님은 잡지사를 운영하셨어요. 내가 한국에 오래 살게 되어 어머님이 생존하셨을 때 이곳으로 모셔서 회갑연을 마련해 드렸어요. 가끔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며 행복한 시간을 함께 하던 가족들이 그립게 떠올라요.

-한국인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데 공통점으로 생각할 때 장단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려울 때 단결하는 힘은 대단해요. 가난한 시절은 그게 돋보였는데 차츰 빈부차이도 생기고 경쟁심도 각박하게 변하면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심이 많아진 것도 같아요. 가장 경계해야할 현상은 무관심입니다. 남북관계도 그래요. 함께 가려는 배려심이 있으면 모두가 다 순조롭게 이루어집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 믿어야 하는 일입니다. 조상이 같은 한민족에 5천년 역사를 함께 이어왔으니 남북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봐야하고 따로 보더라도 쌍둥이입니다. 쌍둥이는 다른 사람들이 싸움을 붙여도 싸우면 안 됩니다. 화해하고 대화를 해야지요.

-앞으로 또 어떤 일을 하실 건가요?

꾸준히 북한 사람을 돕고 싶어요. 우리 메리놀 외방선교회는 1911년 아시아지역 선교활동을 위해 월시(J. A. Walsh 1967∼1936) 신부와 프라이스(T. F. Price)신부가 발기, 창설해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교회를 세우고 구라사업 등 보건의료 지원사업을 해왔어요.

한국에는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곳이 평안도였어요. 남북분단으로 이제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다행히 유진벨재단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선대 성직자들의 못다한 꿈을 이어가는 것이어서 행복합니다. 이제 내 나이도 팔순을 저만치 넘어섰지만 끝까지 해야할 일을 해야지요. 우리가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면 적이든 아군이든 간에 목숨을 구해주는 게 도리 아닙니까? 선교활동도 그 다음이지요.

-메리놀 외방선교회에서 메리놀이라는 명칭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주 오시닝의 작은 언덕에서 유래하지만 메리놀(Maryknoll)은 '마리아의 언덕'(Mary's Knoll)을 뜻합니다.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는 시대가 되어도 사람들은 대다수 걱정거리를 안고 삽니다. 어떻게 살면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지요?

한국 사람들도 자주 인용하는 속담이 있지요? '일소일소일로일로'(一笑一少一怒一老)란 말이 행복하게 사는 열쇠입니다. 화내지 말고 웃으며 살면 건강해지고 젊어지고 행복하게 삽니다.

함제도 신부가 서울 중곡동에 있는 메리놀 외방선교회 한국 본부에서 활짝 미소짓고 있다./사진=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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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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