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셋방살이 노모 울린 사법고시 장원' 조재연 대법관
[그때 그 인터뷰]'셋방살이 노모 울린 사법고시 장원' 조재연 대법관
  • 김두호
  • 승인 201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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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야독으로 인생역전 시킨 그 시절 비화/김두호

 

조재연 대법관/출처=대법원

 

[인터뷰365 김두호] 최근 대법원장의 추천과 국회의 절대다수 임명동의를 거쳐 신임 대법관이 된 조재연 대법관은 역경을 딛고 성공신화를 만든 입지전적 인물의 롤 모델이다. 삼시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던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청운의 뜻을 세운 인물들은 이제 각 분야에서 대다수 은퇴를 해 모처럼 시선을 이끈 조재연 대법관의 지난 생애가 한층 돋보이고 귀감이 되고 있다.

기자는 서울신문사 재직시절인 1980년 6월 초 그해 사법고시에서 수석합격한 조재연 학생(당시 24세)이 살았던 당시 서울 성북구 정릉의 작은 셋방집을 방문했다. 주인공과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가족을 인터뷰해 서울신문사가 발행한 매체에 ‘노모 울린 총각가장의 사법고시 장원’이란 제하의 기사(1980년 6월 15일자)로 보도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1980년 사법고시에 수석합격 후 판사 후보생이었던 조재연 대법관의 24세 당시의 모습. 당시 사진설명에서는 ‘성격은 내성적, 놀때와 공부할 때를 절도 있게 생활화 했다’고 적혀있다.

셋방살이 노모 울린 사법고시 '장원'


-일하면서 공부한 조재연씨 "가족 합작의 영광"
-고교 3년때 아버지 여의고 은행다니며 야간대학 마쳐
-지난 1년 동생이 생계맡아 엄마와 안간힘으로 뒤밀어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한 야간대 출신 조재연(24) 씨는 기쁨과 영예를 홀어머니 김분녀(65) 씨와 누이동생 성남(22) 양에게 돌렸다. 어머니는 정화수를 떠놓고, 동생은 생활비를 뒷바라지하며 밀어올린 장원급제의 결실, 그것은 세 가족이 가난한 셋방에서 사랑과 의지로 빚어낸 빛나는 작품이었다.

■집념의 3중창

조재연씨는 발표날인 4일 아침,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영화구경을 하고 하오에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합격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가장 먼저 은행에 다니는 동생 성남양에게 소식을 전한 뒤 곧장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 김분녀씨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날 밤새 가족은 지나간 고생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고 한다.

"엄마와 내 동생이 약속을 해서 저를 반강제로 고시합격까지 시킨 것 같아요."

조 씨는 어머니와 동생 덕분에 고시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덕수상고를 나오던 해 한국은행에 입사, 은행원으로 집안을 돌보면서 방송통신대학을 다녔다. 당시 전공은 법률과 거리가 먼 경영학. 졸업 후 성균관대2부대학 법학에 편입했다.

은행에 사표를 내고 고시 준비를 위해 학교기숙사로 들어간 것이 작년 3월. 홍익여고를 졸업한 성남양이 제일은행에 근무하게 되면서 자신의 월급으로 집안 살림과 오빠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애써 자청을 한데서 비롯됐다.

성남양이 손에 쥐는 돈은 월 10만원. 그것으로 매달 오빠의 책값과 기숙사비를 조달했고 나머지를 쪼개 생활비와 교통비 등 용돈을 썼다는 것이다.

"제 돈으로 커피 같은 건 마실 생각도 안했어요."

성남양은 입고 있는 옷도 2년 전 어느 친지가 준 외출복이라고 한다.

 

■여섯번째의 수석

서울 정릉2동에 있는 이들 세 가족의 2백만원짜리 전세방은 서울에서 '셋방살이 열세번째'로 옮긴 집이다. 가구라고는 서랍뿐인 낡은 농이 하나지만 그러나 그 농안에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재산이 한 보따리 채워져 있었다.

가난뱅이 향학도가 마지막 꿈을 정복하기까지 줄곧 수석을 따낸 상장과 상패들이다.

조 씨의 수석 경력은 충북제천의 동명국교(동명 초등학교) 졸업 때부터 시작해서 제천중학, 덕수상고, 방송통신대, 정규대학편입학고사 그리고 사법고시까지 6번을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금년도 성균관대졸업 직후 대법원의 법원사무관채용시험에도 합격했으나 '판사가 되겠다'는 꿈 때문에 계속해서 사법고시에 응시했다고 한다.

그쯤 되면 수석을 취미삼아 즐길 만큼의 타고난 수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천부적인 재능이 찢어질 듯 한 가난에도 꺾이지 않고 꾸준히 꽃피워진 것은 그의 말대로 '부모의 영향과 동생의 뒷바라지가 큰 힘'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조봉준 씨는 조 씨가 고3때 세상을 떠났다. 한학에 조예가 깊고 성격이 대쪽 같았다는 아버지는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의 인생관은 아들에게 재산보다 소중한 용기가 되어 주었다.

"늘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무엇을 하든지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한다는 신념이었어요."

때때로 못사는 게 답답해서 인지 가족들이 잠들면 혼자서 논어의 글귀를 외곤 했다는데, 지금도 이들 오누이는 아버지의 손때 묻은 논어 한권을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는 한때 목재상도 했으나 실패, 건축공사자의 경비원도 하고 잡 노동일도 했으나 그것마저 나이가 많다고 외면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중풍으로 쓰러진 뒤 청소를 해주는 대가로 세얻은 정릉 산마루턱의 경로당 부엌방에서 쓸쓸히 숨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들 가족의 가난은 더욱 뼈아픈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기사에 실렸던 동생과 어머니의 다정한 모습.

 

■감격으로 엮은 월계관

"보잘 것 없는 셋방을 찾아다닐망정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 남매가 공부하는데 지장이 없는가를 확인하고 계약을 하셨어요."

묵호에서 태어나 제천으로, 그곳에서 서울로 이사 온 것은 자식의 교육을 위한 어머니의 배려에서였다. 서울에서 열세 번을 이사 다닌 것도 맹모삼천(孟母三遷)이 아니라 맹모십삼천(孟母十三遷)의 열성에서 비롯된다.

"두 자식에게 10원짜리 국수로 배를 채워 주고 나는 밥 대신 간장 물로 허기를 채울 때가 많았어요."

성남양도 오빠를 닮아 공부를 잘했다.

남매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도시락을 싸다닌 적이 없었고, 버스를 타고 다닌 적이 없었다고 한다.

통학거리는 둘 모두 4~6km. 성남양은 금란여중 다닐 때 독립문에서 산을 넘어 학교를 가다가 빈혈로 쓰러졌다. 그래도 혀를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 책가방을 부둥켜안고 일어섰으나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지각을 했다고 한다.

남매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려 죽어가도 병원 구경을 시켜 줄 수가 없었다는 어머니 김분녀씨. 결석만은 안 시키겠다는 어머니의 결의도 그때는 불가항력이었다고 한다.

사무친 가난 속에서도 공부 잘하는 남매는 어머니의 꿈과 용기가 되어 주었고, 자식을 위해 정화수를 떠놓는 거룩하고 희생적인 모정은 두 남매에게 집념의 향학열을 심어 주었다.

"오로지 선과 정의를 먹고 사는 판사가 되겠어요."

합격도 어려운 사법고시에 그것도 수석까지 따낸 조재연 씨. 그의 인간승리는 밀어주고 당겨준 세 가족의 합작으로 이룩한 장한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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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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