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 “아버지가 영화 보셨다면 우셨을 것”
[인터뷰]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 “아버지가 영화 보셨다면 우셨을 것”
  • 김보희
  • 승인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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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균 감독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 시대 고생하신 부모님 세대에 헌정하는 영화 '국제시장'을 약 5년만에 작업 끝에 세상에 내놨다.

【인터뷰365 김보희】윤제균(45) 감독은 푸근한 인상에 옆집 아저씨 같은 말투로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기자가 기억하는 윤제균 감독은 영화 ‘스파이’ 미디어데이 때 많은 기자들이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시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영화 촬영으로 고생했던 배우들이 눈물을 보이자 같이 울며 손을 꼭 잡고 “좋은 작품 꼭 하자”라고 말하던 사람이다.
이번 신작 ‘국제시장’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한 번밖에 마주치지 않은 기자의 얼굴을 기억하며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부산 출신인 윤제균 감독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99년 ‘신혼’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낭만자객’ ‘1번가의 기적’ ‘해운대’ 등을 연출했으며, JK필름을 설립해 ‘첫사랑 사수궐기대회’ ‘간큰가족’ ‘내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하모니’ ‘내 깡패 같은 애인’ ‘퀵’ ‘7광구’ ‘댄싱퀸’ ‘스파이’ 등을 제작했다.
이번에 내놓은 신작 ‘국제시장’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극중 주인공 덕수, 아내 영자는 각각 감독의 아버지 어머니 성함이다. 한국전쟁 때 눈보라치는 흥남부두에서 피난 내려와 부산 국제시장에 터를 잡은 부모세대의 고생을 담은 이 영화를 두고 윤 감독은 할 말이 많았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출신이다. 영화 전공이 아닌데 어떻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나.
언론에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다. 카피라이터 출신이라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샐러리맨 출신이다. 대학 졸업하고 엘지 애드에 입사해 전략기획팀에서 4년 가까이 근무 했고, 카피라이터로 1년 근무한 후에 회사를 나왔다. 이후 심마니 엔터 펀드라고 네티즌들이 1만원부터 영화에 투자를 하는 펀딩회사에서 대리로 시작을 하면서 영화 관련 일을 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98년도 IMF 때였다. 당시 8월 한 달간 무급휴직을 받았다. 하필 그때가 결혼을 한 지 얼마 안 됐고,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던 때였다. 월급쟁이에게 한 달간 휴가라는 것은 평생 못 올 기회이기도 했지만 돈이 없었다. 만약 그때 돈이 있었으면 아내와 해외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더라. 그래서 한 달 휴가동안 나만의 영화 한 편을 만들어 보자라고 해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그때 쓴 시나리오가 99년도 4월에 태창흥업에서 진행한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이 됐다. ‘신혼여행’이라는 작품이었는데 그 작품이 영화화되면서 본의 아니게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됐다. 이후 두 번째 쓴 시나리오가 ‘두사부일체’였다. 당시 영화 제작사 필름지라는 곳과 시나리오 계약을 했는데, 신생 영화사여서 감독이 잘 구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제작사 쪽에서 나에게 감독을 제안하면서 연출을 하게 됐다. 이후 ‘두사부일체’가 대박이 터졌고, 연달아 연출한 ‘색즉시공’이 또 히트를 쳤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작품을 하게 됐다.
내가 항상 ‘감독이 어떻게 되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하는 말이 있다. 인생은 새옹지마다. 새옹지마라는 말은 쉽게 이야기하면 인생에 길흉화복 이게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정말 힘든 시기였지만, IMF가 없었다면 나는 감독이 되지 않고 샐러리맨으로 여전히 살고 있을 것이다. 또 당시 내가 돈이 있었다면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해외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위기들이 나에게 기회였다.

원래 꿈은 무엇인가.
법조인. 판검사가 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께서 줄곧 나에게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고, 공부를 잘 하던 편이라서 가족들의 기대치가 있었다. 하지만 대학 3수를 하고, 법대가 아닌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되면서 아버지가 실망한 부분이 있었다. 아버지 꿈을 이뤄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도 있다. 요즘은 어머니와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머니께서 ‘판검사도 좋지만, 지금은 감독이 더 낫다’라고 말하셨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웃음)

데뷔작 ‘두사부일체’ 연출을 했을 때, 스태프들과의 기싸움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기싸움은 정말 살벌했다. 그것을 헤쳐나간 나만의 방법이 있다. 진실. 감독에게 있어 진실이 무엇이냐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감독인데 이런 것도 몰라?’라고 무시를 당했다. 사실 그게 맞았다. 데뷔작이고 경험도 부족했던 내가 무엇을 알겠나. 그래도 시나리오는 내가 썼으니 드라마를 어떻게 이끌어가야겠다는 것은 확실했다. 모르는 것은 막내 스태프에게까지 쫓아가서 물어봤다. 하지만 내가 확고하게 아는 지점에서는 끝까지 우겼다. 예를 들어 이 장면은 코미디가 아닌 정극으로 찍어야 하는 장면이라면 내 의견을 확고하게 전달했다. 왜냐하면 시나리오는 내가 썼으니까. ‘두사부일체’도 겉으로는 코미디지만 메시지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게 진실되게 이야기하다보니까 촬영 회차가 지날수록 스태프들이나 배우에게 신뢰가 생겼다. 최소 거짓말은 안하니까 진정성이 통했다.
나는 영화가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영화감독은 무비 디렉터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잡아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아는 무비 마스터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감독에게 신뢰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초반에는 미스터리와 코미디 장르가 많았다. 하지만 ‘내 생에 아름다운 일주일’ ‘1번가의 기적’을 하면서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블록버스터 ‘해운대’로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여러 장르에 도전하면서 두려움은 없었나.

장르는 조금씩 다르지만, 그 안에 관통하는 지점이 있다. 사람.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관객들이 내 영화를 보고 행복해하며 마음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관객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감독으로서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사람 이야기를 한다는 지점에서 이번 ‘국제시장’이 정점을 찍은 것 같다. 언론시사회에서 ‘국제시장’을 예전부터 가슴에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첫아들을 낳고난 다음이었다. 2004년도에 아빠가 되고 나니 대학교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영화를 해보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낭만자객’을 하고 있을 때였고,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면 시대극이고 돈이 엄청 들 텐데 누가 나에게 투자를 하겠나. 그래서 속으로 내가 나중에 흥행 감독이 돼서 큰 작품을 할 수 있을 때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운대’가 잘 되고 난 다음에 마음에 가지고 있던 ‘국제시장’을 하게 됐다.

윤제균 감독은 아버지와 성격이 꼭 빼닮은 황정민과의 작업이 "운명같았다"고 털어놨다.

‘국제시장’은 인물의 10대를 시작으로 70세까지 시대를 관통하며 여러 이야기를 다룬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에피소드 자체는 픽션이다. 그 속에서 변하지 말자고 이야기한 부분은 픽션을 대하는 마음과 정서다. 장남, 아버지라는 짐을 짊어진 가장이라는 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도 대화는 안 통했지만 결국은 가족을 위해서 고생을 했던 분이지 않나.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고생하며 참아냈던 마음을 위로해드리고 싶었다.

덕수(황정민)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가족들과 소통이 부족하며 소외를 당한다. 덕수의 모티브가 된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영화 속 덕수와 실제 아버지의 성격이 똑같다. 다혈질이고 잔소리도 많고, 대화가 안 되고.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됐다. 엄마와는 성격이 비슷해서 소통이 잘됐는데 아버지와 내 성격은 정반대라서 대화가 안됐다. 그런데 웃긴 건 어느 순간 내가 우리 아이한테 아버지와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어느 순간 그렇게 아버지를 닮아있더라.

극중 덕수가 마음에 품고 있던 자신의 꿈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 아버지의 꿈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이 작품을 하면서 친척 등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꿈이 뭐였냐고 물어봤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하더라. 하지만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걸로 봐서 유추해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정년이 없는 직업을 가진 것이 꿈이셨을 것 같다. 아버지는 샐러리맨으로 사시다가 정년퇴직을 하셨다. 아무래도 샐러리맨은 정년이 정해져 있다 보니 불안정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정년이 보장된 전문직 판사나 검사가 되길 바라셨다.

극중 덕수와 영자의 첫 만남은 유난히 알콩달콩하고 코믹하게 그려졌다.
그 장면은 풋풋한 연인처럼 아름답게 담고 싶었다. 지금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멋이 없고 저런 사람들도 연애를 했을까 상상이 안되지만, 그분들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열정적으로 혹은 순수하게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고 우리를 낳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 이 장면을 찍으면서 생각한 것이, 황정민 씨나 김윤진 씨가 로맨틱 코미디는 했던 작품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두 배우를 통해 더 로맨틱하고 코믹한 장면을 끄집어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연애 장면은 개인적으로 공을 많이 들였다.

이 영화를 아버지가 보셨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
나를 안아주시면서 우실 것 같다. 경상도 남자라서 ‘수고했다’라는 말 같은 것은 안하실 것 같고. 그냥 조용히 안아주실 것 같고, 나 역시도 아버지 품에 안겨 서로 울 것 같다. 어머니는 언론시사회 때 보셨는데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지만 ‘수고했다’라고 한마디 해주셨다. 그래도 영화 속에 본인과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니 만감이 교차하셨을 것이다.

윤 감독도 아들이면서 지금은 두 아들의 아버지다.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은가.
나는 그냥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아버지였으면 좋겠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심적으로 내 새끼가 힘들고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그리고 자식들이 나보다는 덜 고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왜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은 유독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할까.
외국 아버지들과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어른들이 자식을 보고 산다는 말을 달고 사는 것처럼 자식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면이 있다. 장단점은 있다. 서양처럼 내 인생을 즐기는 것에 가까우면 그게 더 행복할 수도 있지만, 또 우리나라처럼 참고 살다보면 끈끈함을 가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지 않나. 그렇다고 어떤 삶이 더 옳다고는 말을 할 수 없다.

덕수 역에 배우 황정민을 캐스팅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황정민 씨를 캐스팅하게 된 것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너는 내 운명’이었다. 이 작품을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황정민 씨를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댄싱퀸’을 했을 때 제작자와 배우로 사적인 자리를 가지게 됐다. 그 때 이야기를 해보니 인간적으로 내가 원하는 진정성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단히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하는데 뒤끝 없고. 딱 우리 아버지가 그랬다.
그래서 시나리오 나오자마자 2012년 12월에 캐스팅용 시나리오가 나와서 황정민 씨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했다. 나는 낯을 가리는 부분이 있어서 배우들과 연락을 잘 하는 편이 아니다. 황정민 씨에게도 왕래가 없다가 전화를 했다. 그때 ‘돌아가신 내 아버지에 대한 헌사 같은 영화다’라고 국제시장을 소개하니, 정민 씨가 바로 ‘언제 촬영에 들어가냐’라고 해서 내년 여름에 들어간다고 하니 스케줄을 비워두겠다고 하더라.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출연하겠다고 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평소 연락도 없던 사이에서 캐스팅 제안을 했는데 전화로 바로 오케이를 하다니. 그래서 촬영할 때 왜 그렇게 흔쾌히 승낙했는지 물어봤는데 안 알려주더라. 영화 끝나면 말해준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말을 안 해주고 있다. 여전히 나에게 미스터리다.

윤제균 감독은 현재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로 영화와 가족을 꼽았다.

‘국제시장’은 크게 흥남 철수, 서독 파견 광부 이야기, 베트남 참전, 이산가족, 현재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에피소드를 선정하는데 머리가 아팠을 것 같다.
초고가 나오는데 3년 걸렸다. 중간에 엎어버릴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다.

특히 시대적인 배경을 고르는 데 있어서 고심이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서독에 이어 베트남까지 가는 건 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서독, 베트남 등 해외를 두 번 나가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 됐던 게 아니라. 60~70년대 경제적인 수많은 사건 중에서 어떤 두 가지를 고를 것인가에 대한 고심이 있었다. 서독 파견도 있었지만 중동 건설도 있었다. 사실 서독 파견은 이견은 없었다. 하지만 베트남과 중동 둘 중 고르는 것에 대해 이견이 있었다. 결국에 베트남을 결정한 것은 군인 신분이 아닌 기술자로 돈을 벌러 간다는 경제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서도, 더불어 흥남 철수 장면을 역지사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는 우리가 남의 도움을 받고 살아났지만 우리가 남에게 도움을 준 적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 현재 우리나라에 이주 노동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도 불과 몇십 년 전인 60~70년대 남의 나라에서 돈을 벌며 불합리한 대우를 참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에피소드를 통해 역지사지라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에 등장한 대규모 인원들 표정이 리얼하다. ‘해운대’를 통해 대규모 인원을 지휘한 경험이 있어서인가.
‘해운대’를 하면서 아쉬웠던 점이 아비규환이 된 상황에서 웃으면서 달리는 보조출연자 분들이었다. 현장에서 지적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편집을 하고 스크린에 옳기는 작업에서 발견된 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작업할 때는 보조출연자 분들에게 충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며 촬영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흥남 철수 장면에서는 ‘실제 우리나라에 있었던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약 300명 정도 보조출연자 분들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설명하며 ‘안 웃으셨으면 좋겠다. 도와달라’고 인사를 드리고 촬영을 시작했다. 이후 촬영에 들어가니 힘든 장면을 다 감수해주시고, 웃는 분이 한 분도 없이 촬영이 수월하게 진행됐다. 특히나 흥남부두에서 폭발을 할 때 배 위에 오른 피난민들이 울면서 땅을 치는 장면에서는 고향을 버리고 떠난다는 감정이 얼굴에 담겨야 하기에 전문 배우들을 써야 하나 고민했다. 그래서 한 번 (보조출연자) 촬영을 해보고 안 되면 전문 배우들을 쓰자 생각을 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다들 정말 감정을 실어 울어주셨다. 내가 눈물이 나더라. 또 이산가족 찾기 촬영을 할 때도 미리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 촬영하는데 같이 아파해 주셨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실제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서 신기한 경험이었다. 함께 울어주고 고생해주신 보조출연자 분들에게 감사하다.

윤 감독에게 ‘영화’는 어떤 의미, 존재인가.
내 삶 속에서 영화는 인생의 반이다. 나머지 반은 가족이다. 내 인생은 가족과 영화 딱 두 가지다. 나는 취미도 없다. 골프는 쳐본 적도 없고 술 마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 할 일 없으면 계속 시나리오를 쓴다. 그래서 이렇게 좋아하는 영화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내가 영화 말고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래도 일이다 보니 흥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 않나.
흥행은 하늘에 뜻이기에 모른다. 최선을 다해 만들고 기다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고,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잘 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다. 과거에는 나쁜 결과를 받아들이는데 너무 힘들었다. 세상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며 손가락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밖에 나가기 두려운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는 ‘아 내가 그냥 샐러리맨을 하면서 살 걸 왜 이렇게 살고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또 잘되면 ‘역시 샐러리맨을 안 하길 잘했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러 경험이 쌓이면서 이제는 일희일비 하지는 않는다. 잘 됐다고 크게 기뻐하지 않고 결과가 나쁘다고 크게 낙심하지 않는다. 안 되면 다음 작품에서 더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영화 일을 하고 있다.

김보희 기자 interview36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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