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별이 빛나는 밤에’ 이문세의 콤비작가 구자형
[인터뷰] ‘별이 빛나는 밤에’ 이문세의 콤비작가 구자형
  • 김두호
  • 승인 201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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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바람과 음악과 더불어 사는 자유인
‘별이 빛나는 밤에’ 작가이자 음악인 구자형.

【인터뷰365 김두호】2014년 12월초, 한 시절 화려한 영화의 거리였던 서울 충무로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 부근의 빛바랜 거리의 풍경은 과거와 달라진 게 별로 없다. 다만 이제 더 이상 은막을 꽃피우던 별들은 만날 수 없고 스산한 초겨울바람이 가로수가 떨어뜨린 노란 은행잎을 쓸고 다닌다.

그 거리에 여전히 기념물처럼 남아있는 건물이 명보극장이다. 극장 6층은 흘러간 명화를 상영하는 실버극장이다. 잠시 그곳에 ‘명보 라이브 888’이라는 이름의 음악무대가 만들어졌다. 7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가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노래를 그리워하는 관객세대를 겨냥한 <남자 없는 여자들을 위한 송년 콘서트>를 마련해 12월 중 5, 12, 19, 24, 31일 다섯 차례 공연한다.
출연 주인공은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부르며 한때 대표적인 저항가수로 사랑을 받았던 양병집, <세계로 가는 기차>를 부른 ‘고독한 들국화’의 조덕환, <난 바람, 넌 눈물>의 산악인 가수 신현대, 그리고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싱어송라이터 구자형이다.
인터뷰365의 인터뷰어는 이들 중 일생을 두고 “소리는 나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과 음악을 벗해 살았다”는 불변의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 구자형(1954∼)을 만났다.

구자형은 1970년대 <참새를 태운 잠수함>을 내걸고 언더그라운드 음악활동의 선봉에 선 인물이지만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FM 음악프로의 신화를 남긴 <별이 빛나는 밤에> 의 ‘이문세 시대’를 만들어 낸 방송작가 이력이다. 여기에 음악관련 전문 저술가로 책을 펴내고 틈틈이 시를 발표하는가 하면, 음악평론가와 음악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해 왔다. 그러나 주 본업은 작사, 작곡, 기타를 연주하고 부르는 음악인이다. 어릴 때부터 책가방보다 기타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고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며 살아온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별난 사람이다.


공연을 함께 하게 된 양병집, 조덕환, 신현대 등과 음악으로 나누어 온 인연의 뒷 얘기를 듣고 싶다.
양병집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1974년 겨울 명동에 있던 음악감상실 ‘르 시랑스였다. 그가 버려진 꽁초를 주워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댕기던 모습이 강렬하게 기억된다. 최근에는 피 같은 돈을 지갑에서 꺼내 김밥도 사주고 오징어 덮밥도 곧잘 사준다.
조덕환은 1976년 겨울, 명동의 가톨릭 여학생회관에서 ‘참새를 태운 잠수함’ 주말 공연장에서 만났다. 그가 ‘들국화’에 몸담기 전이다. 트리오밴드 ‘America'의 포크 록 를 잘하던 ’가야트리오‘의 멤버였다. 지금은 서울 망원동의 작은 연습실에 틀어박혀 홀로 연습하고 작곡하는 고독한 들국화가 되었다.
신현대는 1976년 겨울, 서울 무교동 ‘코러스’에서 처음 만났다. 를 하도 잘 불러 그날 밤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함께 소주를 마셨다. 통금 사이렌이 울려 근처 여관에서 오리털 파커를 잡혀놓고 숙박했다. 그는 세계 6위의 산 초오유도 등정했고 에베레스트도 8,600m 고지까지 올랐던 산악인 가수다.

창밖의 별들도 외로워∼’로 주제음악이 시작되는 MBC-FM 10시5분 음악프로 <별이 빛나는 밤에>(이하 별밤)가 1969년 시작되어 2014년으로 45년째, 방송 프로그램 중 최장수 프로로 이어져왔다. 진행자는 1대 오남열부터 차인태, 이종환, 박원웅, 안병욱, 조영남, 오혜령, 고영수, 이필원, 김기덕, 문진호, 이수만, 서세원, 그리고 14대 DJ가 1985년에 시작해 1996년까지 10년 넘게 진행한 가수 이문세였다. ‘이문세 별밤지기시대’는 이른 바 ‘별밤’의 인기가 황금기였다. 깊어가는 밤에 진행자가 음악과 함께 속삭이듯 들려주는 서정적 낭만적 감성적 언어가 청소년 시청자들을 매료했다. 그 명대사를 모두 당신이 만들어준 것으로 알고 있다.
방송작가는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내 인생의 간이 정거장이었다. 처음에는 MBC 라디오 <정애리의 0시 플랫폼>이라는 프로에 팝 칼럼니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라디오 작가였던 송지나 씨(TV드라마 모래시계의 작가)가 유럽여행으로 자리를 비워 내가 대타로 일을 시작했다가 발이 묶였다. 이후 200자 원고지 40만장을 써댔으니 내 청춘의 열정기였다.
별밤작가로 활동하면서 3년쯤 지나자 이문세가 ‘별밤지기’로 인기가 충천할 때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에서 “형이 날 만들어주었어”라며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도 나에게 신세를 갚을 때가 있었다. 이문세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왔던 시기에 방송국 측이 낙하산 작가를 불러와 내가 하는 일의 절반을 넘겨주게 했다. 나는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이때 내 처지를 알게 된 이문세가 방송사 간부에게 달려가 나도 함께 그만두게 하라고 항의해 내 자리가 보전되기도 했다.

‘별밤’의 작가 시절 주로 어떤 글을 쓴 것인가? 겪은 일화 중 기억에 남는 얘기를 소개해 달라.
담당 정계춘 프로듀서의 주문이 구름 잡는 이야기 하지 말고 일상생활 속의 잔잔한 감동 이야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는데 매회 방송 때마다 주제를 그렇게 살렸다. 소재를 찾기 위해 여학생들과 어울려야 했고 한동안 젊은이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고 겪는 체험담과 사랑하는 얘기며 넋두리 따위를 수집하는 일에 매달려 살았다. 그 시절 내가 정한 집필의 원리원칙이랄까. 철학은 한국 전통미와 가치를 원고로 녹여내기, 내 원고를 듣는 청취자들이 수십년 후에도 에너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등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별밤’작가인 내게 이따금 엽서와 편지를 보내오던 여고생 소녀가 집을 나왔다며 나를 찾아왔다. 가족보다 내가 좋다면서. 내가 대학로에 혼자 살 때인데 돌아가도록 설득을 해도 안 되어 내 방을 비워주고 나는 카페에서 선잠을 자고 아침에 설득해 귀가시켰다.

‘별밤’작가 시절은 몇 살 때인가.
30대중반으로 접어들 때였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은 10대, 20대 감각이었다. 지금도 철이 없다.

아직도 독신이라는데 결혼은 안 한 건가, 못한 건가.
바람과 음악이 내 반려자가 되면서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금방 이해가 가지 않는다.
10대 사춘기 무렵 포플러나무 밑에서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를 들으면서 소리는 나도 눈에 보이지 않은 바람에 묘한 애정을 느꼈다. 잎이 나부끼는 바람소리가 음악과 같았다. 음악도 소리로 느낄 뿐 보이지 않는다. 바람과 음악, 두 가지가 동질성, 동질감으로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더불어 살았다. 나는 자유롭게 바람처럼 살았다. 김지하 시인이 폴 발레리 시인의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야겠다’를 좋아하는 시구로 꼽은 걸 어디서 봤는데 바람은 음악과 함께 내 인생을 움직인 동반자였고 반려자였다.

그럼 한 번도 여자와 연애나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얘기인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짝사랑이 되고 말았지만 4년간 교제한 여자가 있었다. 내가 살던 대학로의 푸른 새벽안개를 봉투에 담고 사연을 적어서 4년쯤 편지를 보낸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는 다른 남자에게 갔지만 내게 잊을 수 없는 연인으로 머물러 있다. 그녀가 나에게 시를 쓰게 만들었다.

시를 쓰게 만든 여자.
1989년 그녀를 생각하며 쓴 시집인 <안개편지>를 출간했다. 그리고 이듬해 첫 음반 <쌩>을 발표했다.

<쌩>은 무슨 말인가.
바람이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를 의미한다. 어느 날 기타를 치다가 줄이 끊어지면서 순간적으로 만들었다. 기타줄이 끊어져도 기타는 쳐야하고 사랑이 떠나가도 사랑해야 한다는 그런 노래.

당신은 197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운동으로 볼 수 있는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구자룡 함장과 함께 활동했다. 그 때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라는 말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25시>의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말에서 비롯된다. 시인이나 예술인은 산소 같은 사랑이 부족한 세상에 가장 먼저 맑은 영혼과 생명을 일깨우는 사람인데 잠수함에서는 그 기능을 염두에 두고 생명이 가장 허약하고 산소부족에 민감한 토끼를 태우게 된다. 음악 아티스트도 이 세상이 숨 막힐 때 가장 먼저 비명을 지르는 토끼와 같다. 게오르규는 2차대전 참전 잠수함 수병 출신이다. 토끼 대신 그보다 더 약하고, 민감한 참(眞)새를 태워 만든 이름이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다.

당신이 작명한 것인가.
내가 사용을 했지만 이름은 철학과 문학 분야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나의 친 형님(구자룡)이 만들었다.

형님? 잠시 가족 얘기로 돌려보자.
나는 이문세, 하남석, 해바라기의 이주호 등이 다녔던 숭덕초등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녔지만 출생지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이다. 별세하신 아버님은 양의(洋醫)이면서 한의사(韓醫師)였다. 그런데 안주 없이 마시는 깡술을 좋아하셨다. 맛있는 물고기 안주를 앞에 두고도 술잔만 비우시는 모습을 어린 눈에도 불안하게 보였는데 결국 젊으실 때 떠나셨다. 아들만 5형제를 두셨는데 내가 셋째고 맨 맏형은 현재 명동 예술극장 구자흥 극장장, 둘째 형이 구자룡으로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작명가였고 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그는 여전히 언더그라운드 음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음악활동을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기타를 품에 안고 노래를 부르면서 책가방이 나에게는 소가 평생 끌려 다니며 살아야 하는 코뚜레로 보였다. 코청을 뚫어 고리를 낀 게 쇠코뚜레다. 코뚜레가 없는 야생, 초원을 맘대로 뛰어다니는 방목 송아지가 되고 싶었다. 홍익공전 1학년 초기에 책가방을 던져버리고 노래하는 새가 되어 자유롭게 살기 시작했다. 서울 명동 지금의 유니클로 뒷골목에 음악감상실 ‘르 시랑스’가 있었다. 나는 DJ로 통기타 가수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윤형주, 김정호, 송창식, 어니언스, 유심초, 이종용, 채은옥, 김민기, 뽀빠이 이상룡 등을 만났다. 나는 포크송으로 <먼데까지 가보자> <보물섬> 등을 비롯해 20곡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4년 겨울 명동에서 한국 최초의 룸살롱을 오픈했던 형님(구자룡)의 친구 김태일 지배인의 주선으로 한국일보 12층 홀에서 콘서트를 준비하게 됐다. 나의 첫 공연 타이틀이 바로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었다. 1975년 2월 22일이 첫 공연 날이었다. 통기타 동료 가수들까지 몰려들어 북새통을 떨었다.
이후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의미가 너무 좋으니 언드그라운드 음악운동을 시작하자 제안했고 구자룡 형이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여 시작이 됐다. ‘순수, 다양, 창조’를 내 건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 출범한 것이다. 3년 전 별세한 형의 작사 <제주도>(구자형 작곡 / 한영애 노래)의 시비가 제주도 한림읍 월령리에 세워져 있다. 1970년대 초 형이 제주도 여행갔다가 내게 엽서로 보내왔던 노랫말이었다.
그리고 주로 공연장은 명동 계성여고 후문에 있는 가톨릭여학생회관을 활용했다. <씨알의 소리> 발행인 함석헌 선생이 <노자>를 강의하던 곳이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은 홍보활동이나 앨범 발표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음악활동을 해 얼굴이나 이름이 활동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아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1978년 여름 가톨릭여학생회관에서 함께 활동하던 뮤지션들 전인권, 강인원, 남궁옥분, 한돌, 곽성삼, 유한그루, 명혜원 등이 음반계약을 하며 모두들 떠나고 나 혼자 남게 됐다. 동아방송 해직 프로듀서였던 이해성 씨, 김도향 선배 등이 나에게도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를 해왔다. 내가 부르는 자작곡 <두 잔의 커피> <붙잡아줘요>등으로 당시 돈 3억원은 벌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두 분 다 역량있는 기획자였고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사양했다. 언더그라운드의 순혈(純血)을 앞세운 탓이다.

앨범을 낸 것이 199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1집 <난 널>을 1990년, 2집 <존 레넌을 위하여>는 1997년, 3집 <바람이 가르쳐준 노래>는 2007년, 4집 <음악이 돌아다닌다>는 2014년 금년에 발표했다. 그러니까 언더그라운드의 자존심에 유연성을 가미한 때가 1990년이었다.

저서도 많은 것 같다.
콘서트나 음반을 기획, 제작하고 또 <김현식의 내사랑 내곁에> <김광석 평전> 등 책을 10여권 출간했다. 모두 음악과 관련되지만 노래하는 사람들 사이에 살다보니 번잡하게 이 일, 저 일을 하게 됐다.

당신에게 음악은 곧 운명이고 인생처럼 생각된다. 그렇게 음악과 더불어 사는 사람에게는 남다른 인생관이 있을 것이다.
음악은 마실수록 목마르다. 아무리 마셔도 더 마시고 싶으니 다른 사람에게 내 인생을 설명하고 설득시킬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을 모르겠다.

2014년에 앨범을 내놓은 것은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가.
2014년 1월부터 곡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매일 곡을 만들었다. 75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새 노래들을 썼다. 음악노트 두 권이 꽉 채워졌을 때 이러다가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우선 75곡 중 12곡만 연습하고 편곡해서 녹음을 했다. 기타 치며 부르고 하모니카 간주 넣고 다했다.

어떤 노래인가. 신곡을 들은 사람들의 평을 전해달라.
<만날 수 없는 사람> <어머니> <붉은 연어> <밤의 여행자> <가난한 연인의 노래> <님마중> <작은 카페가 있어> <홍대 앞엔 기차가 없다> <신촌에서> <미안해> <푸른 꽃다발> 등이다. 내 노래를 들은 사람은 내가 치는 기타의 따뜻한 체온까지 느끼게 했다는 말을 했다.

<홍대 앞엔 기차가 없다>의 노랫말을 듣고 싶다.
홍대 앞에는 기차가 없다 / 있었는데 있었는데 / 홍대 앞에는 그녀가 없다 / 있었는데 있었는데 / 홍대 앞에는 sus4 없다 /있었는데 있었는데 / 홍대 앞에는 채플린 없다 / 있었는데 있었는데
놀이터에는 햇살이 있다 / 햇살있다 햇살있다 / 주차장 골목 거리의 악사 / 기타 치며 칭가칭가 / 클럽데이엔 사람들 물결 / 왁자지껄 출렁출렁 / 홍대 앞에는 바다가 있다 / 바다있다 바다있다
가슴속에는 사랑이 있다 / 사랑있다 사랑있다 / 사랑의 배틀 붙어봅시다 /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 이기는 거다 이기는 거다 / 이긴 사람이 이미 진거다 / 이미 진거다 완전 진거다
홍대 앞에는 기차가 없다 / 있었는데 있었는데 / 홍대 앞에는 그 남자 없다/ 있었는데 있었는데 / 홍대 앞에는 기차가 없다 / 있었는데 있었는데 / 홍대 앞에는 그 남자가 없다 / 있었는데 있었는데

바람과 음악과 더불어 살며 즐거웠던 기억들을 떠 올려달라.
1992년 미국으로 음악여행을 떠난 일이 있다. 프로골퍼가 되어 미국에 간 조상만 씨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시절 미국 음악여행 티켓을 마련해주었다. 덕분에 멤피스, 내슈빌, 뉴올리언스,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 미국 음악의 발상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참 행복감을 느꼈다.

자신의 현재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해줄 수 있는가.
서울 석관동의 주택가 옥탑방에 살고 있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러도 누가 시비를 걸지 않는 공간이다. 별을 바라보고 바람도 느낄 수 있는 집이다. 글쎄 미국에는 NASA가 있어서 우주를 향하고 있지만 나는 옥탑방에서 우주에서 보내오는 팩스를 받아 노래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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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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