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국가보안법>에 떨었다.
조용필, <국가보안법>에 떨었다.
  • 김두호
  • 승인 200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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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태동과 조용필의 폭탄 중공공연 뉴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한국 연예인들이 아시아 및 월드 스타 시대로 접어든 ‘한류열풍(韓流熱風)’의 뿌리는 1960년대부터 생성되기 시작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감독)을 비롯한 우리 영화들이 이따금 홍콩과 대만 등지로 건너가 크게 히트해 그 무렵부터 우리 문화와 연예인을 사랑하는 해외 팬들이 생겨났다.



1980년대에는 일본으로 진출한 우리 가수들의 공연활동이 일본 가요팬들의 인기 중심권에 있었다. 이성애를 필두로 조용필, 계은숙, 김연자, 나훈아 등이 자신들의 노래를 당당하게 원어(한국어)로 불렀고 일본 팬들의 갈채 속에 대형 순회공연을 이어 갔다. 그들 중에는 일본에서 신곡을 내기도 했지만 우리 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에서도 히트곡이 됐다. 조용필은 머무는 곳마다 카메라와 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2000년대 동남아 전역에서 한류라는 이름의 우리 대중문화 신드롬이 나타나기 전의 일이다. 그들은 일본에서 슈퍼스타가 된 보아나 국제무대에 이름을 올린 가수 비의 원조들이었다. 이제 한류 대중문화는 아시아 무대를 훌쩍 뛰어넘어 뉴욕에서 남미와 동유럽까지 번져 가고 있다.



이렇게 폭발한 한류의 큰 바람은 불과 몇해 전 일본과 중국 등지에 수출된 <가을동화> <겨울연가> <대장금> 등 TV드라마와 출연 연기자들의 인기가 촉매구실을 했다. 그들이 출연한 영화나 공연도 덩달아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면서 우리 연예인을 좋아하는 해외팬들은 전세기까지 마련해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다시 한류의 원조 연예인으로 볼 수 있는 조용필의 일본 진출 시절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1985년 4월 도쿄에서 제14회 도쿄세계음악제가 열렸다. 그 음악제를 전후해 조용필은 일본 공연무대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고 NHK TV, TBS TV 등 방송이나 공연단체에서 특급 가수 대접을 받았다. 필자는 도쿄세계음악제에 게스트로 참가한 조용필을 동반, 당시 일본에서 조용필의 인기를 생생하게 접할 기회가 있었다.



조용필은 일본의 대표적인 공연기업 교도도쿄와 독점 공연 계약을 맺고 있었다. 세계 대중예술을 움직이는 슈퍼스타들이 모두 인기 절정일 때 일본으로 초청해 공연을 주최해온 전문 기업이다. 1956년부터 그 시대 세계 최고의 그룹 비틀즈를 비롯해 어린이의 우상인 월트 디즈니며 영화배우 오페라 가수 피아니스트 등 당대의 거물 스타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교도도쿄를 통해 일본 공연이 마련됐다.


그 기업을 이끄는 일본 공연기업의 대부 우찌노 지로(內野二朗) 회장은 조용필을 곁에 두고 필자에게 말했다.



“나의 지금 꿈은 조용필에게 있습니다. 나는 그를 한국의 조용필도 아닌 일본의 조용필도 아닌 아시아의 조용필로 보고 있습니다. 난 사실 쇼 프로모터가 적성에 안 맞는 직업으로 늘 생각해요. 그런데 조용필 같은 가수를 만나는 재미에 이 직업에 푹 빠져 산답니다.”



그는 시골에서 금방 상경한 노인처럼 소박하고 순수해 보였다. 일본의 공연문화를 움직이는 사람답지 않게 촌스러운 게 매력이라는 게 주변의 소개였다. 그런데 그는 아주 놀라운 뉴스를 내게 귀 띰 했다. 그 무렵 그것은 조용필을 다치게 할 수 도 있는 극비 정보였다.



우선 제 14회 도쿄 세계음악제의 폐막식후 송별파티가 마련된 1985년 4월 1일 밤 도쿄 프린스호텔 메인홀의 표정을 그대로 옮겨보자. 이날 밤 행사장은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수상가수들과 일본의 가요 및 방송계를 움직이는 인사와 취재기자들로 북적거렸다. 오색 조명등 아래 <올드랭사인>이 은은하게 울려 나오는 가운데 시작된 파티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게스트 조용필이 장식했다.



일본 음악인들은 물론 13개국 참가 가수와 스태프들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 3분짜리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조용필이었다. TBS-TV 등 음악제 주최 측이 조용필에게 국제우호상이라는 특별상을 수여하며 석별의 장소를 열광으로 몰아 넣었다. 한층 분위기를 뜨겁게 달군 것은 특별 옵서버로 참가한 중공(당시 중국의 호칭)의 톱 여자가수 (李谷一)도 나란히 등장해 상패를 받는 순간이었다.



일본사람들도 신기해 했지만 아주 먼 나라에 있던 미수교국인 중공 가수와 나란히 일본에서 그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모습은 한국인의 눈에 하나의 사건이었다. 지금은 금방 오갈 수 있는 가까운 이웃나라 중국이 되어 있지만 그때는 함부로 만나기도 거북하고 나라 이름조차 서먹하게 들리는 공산국가 중공이었다.



미수교 당시는 그랬다. 북한사람 함부로 만나는 것은 범법행위지만 중공 사람도 함부로 접촉했다면 공안기관에 사후 신고를 해야 마음이 편했다. 아직도 중국이 먼 나라 일 때 남의 나라에서 만들어 준 자리였지만 음악인끼리 그렇게 몇 발 앞서 평화롭게 손을 잡고 교류의 정표를 나눌 수 있었던 게 신기하고 보기가 좋았다.



이제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가 보자. 그렇게 공산국 사람과의 접촉이 불가능하고 공안당국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에 필자는 일을 저질렀다. <조용필 중공간다>는 기사를 쓴 것이다. 귀국 비행기 안에서 기사의 큰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을 조용필 소속의 공연기획사를 운영한 이태현씨(서울기획 대표)는 두고두고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사건이었다며 당시 순간을 떠올렸다.



“소름이 쫙 끼쳐오며 덜덜 떨리더라구요. 용필이도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고...들어가면 죽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래도 위안이 된 것은 우리가 그런 말을 먼저 끄집어낸 일이 없었다는 점이었지요.”


그 말을 슬며시 필자에게 흘려 준 사람은 교도도쿄사의 우찌노 지로 사장이었다. 일본에서 조용필의 공연이 크게 성공하면서 일본에서 제작한 조용필의 한국가요 테이프와 음반이 홍콩을 거쳐 중공으로 들어가 조용필의 노래를 알고 있는 중공팬들이 많다는 것, 그들을 위해 중공 공연을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중공 측의 공연 관계자가 조용필의 음반을 들고 와 프로포즈를 해오면서 교도도쿄사는 타이틀까지 정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기사를 쓰는 기자도 수교문제가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느닷없이 조용필이 중공을 간다는 뉴스는 필경 문제가 따를 것으로 짐작하면서 저질렀다. 기사를 쓰기 위해 갔고 취재한 사실이 분명한데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로인해 어느 곳에서도 문제를 제기해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후인 1992년 8월 24일 중국(국가 호칭도 중공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과의 수교가 이루어지고 조용필은 누구보다 먼저 중국 공연을 실행하게 된다.



지금도 간혹 조용필을 만나 밤늦도록 술잔을 나눌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의 이야기는 서로 입 밖에 끄집어 내지 않는다. 노래는 국경도 인종의 벽도 이념의 벽도 없다. 그래서 한때 쓸데없이 떨어야 했던 이유를 굳이 끄집어낸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기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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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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