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검사, 변호사 된 구두닦이소년 이재운
[그때 그 인터뷰] 검사, 변호사 된 구두닦이소년 이재운
  • 김두호
  • 승인 201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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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한국전쟁 고아의 입지전

【인터뷰365 김두호】6.25 전쟁의 피난 고아로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전전하다가 독학으로 23살에 고등고시(지금의 사법고시)에 합격해 최악의 불운을 최고의 행운으로 바꾼 이재운 변호사(77)의 생애는 그대로 도전과 극복의 인생을 웅변한다. 당시 대학 학력이 없으면 보통고시라는 예비관문을 거쳐야 본 고시에 도전할 수 있었다.


1976년 기자는 검찰을 떠나 공증인을 겸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40세 이재운 변호사를 인터뷰해 그의 소설 같은 성장기 고생담을 기사로 보도해 크게 화제를 남겼다. 지금은 굶을 정도의 가난한 사람이 드물지만 6.25가 일어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성장한 사람들은 대다수 배 곯아가며 자란 사람들이다. 구두닦이 출신 이재운 변호사의 눈물에 젖은 성공담은 요즘같이 작은 난관에도 좌절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용기를 주고 꿈을 주는 감동의 입지전이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이재운 변호사는 피난길에 서울로 혼자 내려와 양정중학을 다닌 것이 고시 합격 전의 학력이다. 나중에 법률 활동을 하면서 신학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 이 변호사의 주요 일과와 과제는 이산가족의 한을 풀기 위한 활동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85년 9월 제1차 고향방문 및 예술인 교환사업에 참여해 평양 고려호텔에서 아버지와 34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하는 잠깐의 행운을 누렸지만 더 이상 재회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이산가족의 대부(代父)'라는 호칭이 생길 만큼 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를 이끌며 각종 이산가족을 위한 사업에 혼신을 바치며 살아왔다.


두 번째 인터뷰


기자는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1970년대 초 어린이 월간잡지 <어깨동무>에 소개하고 서울신문사로 옮겨 다시 두 번째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피난고아로 성장해 독학으로 보통고시를 거쳐 고등고시에 합격했을 때 중앙청(철거된 현 경복궁 안의 정부청사) 게시판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감격을 주체 못해 땅바닥에 뒹굴었다는 이야기를 감명깊게 기억한다.
나는 살면서 고민이 생기면 바로 그 순간을 되새긴다. 아무리 어려울 때도 용기가 난다. 1958년 12월 15일, 차가운 초겨울 바람이 불던 그날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자 명단에서 나는 ‘1366번 이재운’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이성을 잃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땅바닥을 뒹굴다가 일어나 만세를 부르며 광장을 펄쩍펄쩍 뛰어다니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게시판으로 달려가 잘못 본 건 아닌지 수험번호와 이름을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곧 슬픔으로 변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줄 가족이 없었으니 서러웠다.


그날 합격자발표 게시판 앞의 젊은이는 아마도 남루한 옷차림의 초췌하고 가난한 청년 모습일 것으로 상상된다.
물론이다. 핏기 없는 병색의 얼굴에 헝클어진 더벅머리, 속내의도 입지 않고 누더기 작업복을 걸친 내 모습은 그대로 떠돌이 걸인행색이었다.


고시 준비를 시작한지 몇 차례, 몇 년 만이었는가?
5년 만이었다. 그 사이 세 차례 낙방했다.


당시 고등고시는 기준 점수에 미달되면 합격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합격자 수도 일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세 번째 응시했을 당시 수천 명이 함께 보았는데 사법부문은 단지 4명만 합격했다.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서 전쟁 때 혼자 피난을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다.
연백의 부유한 포목상 집안의 2대 독자로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양정중학에 다니던 때 전쟁이 터졌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4 후퇴 때 혼자서 피난길로 나섰다. 14살 때였다.


가족들을 두고 혼자 떠나게 된 사연이 있는가?
가족과 함께 피난선을 타기 위해 연백군 해성면 앞바다로 갔을 때 피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아버지는 우리 종손 아들 하나만이라도 꼭 살아야한다면서 혼자 피난선에 태워 보냈다.


피난길에 고생한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다.
배를 타고 내려와 경기도 땅에서 남으로 가는 피난민 행렬에 끼어들면서 죽을 고생을 했다. 신발이 찢어져 맨발로 걸었고 연 3일을 굶어 쓰러져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대구의 어느 상점에서 사과 한 알을 훔쳐 먹고 기력을 되찾기도 했다. 밀양에서는 완전히 빈 깡통을 들고 다니며 구걸로 허기를 면했다. 잠 잘 곳이 없어서 밤이면 농가의 외양간이나 헛간 같은 곳에 들어가 짚을 깔고 잤다. 어떤 때는 땅콩을 서리해 먹다가 주인에게 붙잡혀 죽지 않을만큼 매도 맞았다. 궁리 끝에 호박이나 채소를 서리해서 빈대떡을 만들어 팔아 굶지 않고 지내기도 했다.
그 무렵 역시 정처 없는 떠돌이 청소년들이 일하기 쉬운 게 구두닦이나 신문팔이였다. 그렇게 두 가지 일로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육군병원 철조망 근처에 가면 먹다 남은 고깃국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갔다가 우연히 양정중학에 다닐 때 은사 한분을 만났다. 그 분이 병원에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해주셔서 처음으로 일을 해서 굶지 않고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독학으로 20대 초반에 고등고시(현 사법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한 초기의 이재운 검사.


무료 약 타서 팔기도


전쟁으로 황폐화 된 시대는 대다수가 어떤 일을 해도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집도 가족도 없는 소년의 처지가 전쟁이 끝났다 해서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왔지만 갈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다시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일자리를 구한 곳이 한강변에 있는 조그마한 철공소였다. 철공소 일을 하고 퇴근하면 다시 철도경찰 후생사업장으로 가서 밤일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


몇 살 때 얘기인가?
16살 때였다. 공장을 다닐 때마다 같은 또래들이 책가방을 들고 학교 가는 것이 참 부러웠다. 나는 비록 학업을 포기했지만 고향을 떠날 때 마지막 아버지 말씀을 절대로 잊지 않고 살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훌륭한 인물로 꼭 성공을 해야 한다는 간절한 당부 말씀이 내게 꿈이었고 내 인생의 좌표였다.


목표를 시험 중에 가장 어렵고 힘든 고등고시에 둔 독학은 피눈물 나는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독한 인내심과 용기를 아버지가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집안의 귀한 2대 독자라고 아버지는 나에게 가족과 가문의 꿈을 걸었다. 아들이 희망이었고 가장 소중한 보배였다. 나는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을 벌면서 독학으로 고졸 자격인 대학입학 자격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그 꿈을 18살에 이루고 나면서 시험으로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인 고등고시를 목표로 삼게 됐다.


당신의 인생은 “하늘은 스스로 노력한 자를 돕는다”는 말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와 같다.
내 작은 책상 앞 벽에는 사흘에 한번쯤 새로운 결의의 좌우명을 붙였다. 졸리면 책상바닥에 칼끝으로 “참자” “이기자”는 각오와 맹세의 글자를 무수히 새겨가면서 졸음을 쫓아내는 다짐을 하며 책을 덮지 않았다.


1956년 제8회 고등고시에 처음 응시하고 실패를 하게 되면서 좌절은 없었는가?
낙방과 함께 폐결핵에 걸렸다. 당시는 영양실조로 폐결핵 환자가 주변에 부지기로 많았다. 정부에서 주는 내 몫의 공짜 약을 타서 그걸 팔아 생활비를 써야했으니 그때 사정을 제대로 표현할 말이 부족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물러서면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의지가 강하다는 것 이상으로 강한 성격의 일면이다.
병든 몸을 일으켜 세워 면학의 사투를 했지만 이듬해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해에도 내 이름은 중앙청 게시판에 오르지 않았다. 잉크가 얼어붙은 냉방에서 공부하면서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시간은 언제나 밤이었다.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인생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공부를 즐기며 하는 학생은 드물 것이다. 고통스럽고 참기 힘든 시간이 공부하는 시간이지만 그것을 극복해야 남들보다 앞서 갈 수 있다. 바라는 꿈을 이루는 데는 공부가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이재운 변호사는 네 번째 도전에서 꿈을 이루고 1959년 군법무관으로 법조계에 첫 발을 내디딘 후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지검을 거쳐 제주지검 차장 검사를 역임하고 변호사로 활동해 왔다. 그는 누구보다 불우한 환경의 젊은이를 위해 많은 사회사업을 해왔으며 일찍이 한국노동법률상담소를 설립해 근로자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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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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