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여자, 밥짓는 여자> 신아연 작가(하)
<글쓰는 여자, 밥짓는 여자> 신아연 작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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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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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자란 내겐 행운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찾아야 했다”

【인터뷰365 김두호】신아연 작가와의 인터뷰는 계속된다.

가난 때문에 고생한 때는 없었는가?
아버지의 기한 없는 옥살이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셔야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이불이나 담요를 넣는 두껍고 큰 비닐봉투를 만드셨다. 방에는 항상 비닐을 마름질하는 자와 큰 가위, 연탄 화덕에 놓인 인두가 있었다.
우리 세대라면 기억할 텐데, 그 때는 학교에서 기생충 검사라는 걸 했다. 작은 비닐봉지에 변을 담아 가야 했는데, 학교에서 나눠주는 그 채변봉투를 여섯 살인가 일곱 살 적, 내가 만들었다. 두루마리 비닐을 일정 간격으로 자른 후 비닐 위에 트랜싱페이퍼를 올려놓고 적당히 달군 인두로 비닐의 밑자락을 붙여야 했는데, 단 한번에 인두질을 하지 않으면 종이가 타거나 비닐이 인두에 달라붙었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콧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는 것도 모르고 열중했던 기억이 난다.
비닐 붙이기뿐 아니라 묵은 잡지를 찢어 간간이 호떡이나 군고구마 봉지를 만들 때도 있었다. 풀칠을 하며 잡지 조각을 얼기설기 맞춰 읽으면서 한글도 익히고 문장도 떠듬떠듬 이어갔던 기억도 있다.
그 때가 대구에 살 때였는데, 할머니와 어머니의 봉투 붙이기로는 4남매의 교육은커녕 생계도 꾸려지지 않아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다. 경북여고를 나온 큰 언니가 이화여대 약대에 합격을 한 데다 어머니가 큰고모 소유의 서울 무교동, 한 빌딩 매점을 시작하게 됐다.
매점은 빌딩 뒷문을 등지고 좌판을 벌인 형태로 꼭 ‘한 뼘’이었다. 겨울에는 등짝과 발목으로 뭉텅 찬바람이 몰아치듯 했고, 여름에는 통풍이 안 돼 찌듯이 더웠다. 엄마가 일터를 밖에서 가지게 된 서울 생활이 시작되면서 초등학교 2학년 이던 나는 방과 후면 성북동 집에서 시청앞 근처 무교동까지 혼자 버스를 타고 엄마를 찾아가곤 했다.
그렇지 않은 날은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마냥 엄마를 기다렸다. 당시 유행하던 노래, ‘산까치야 ’를 눈물까지 글썽이며 청승스레 몇 번 부르고 나면 엄마가 탄 버스가 도착했다. 사위는 이미 깜깜해져 엄마와 함께 가지 않으면 우리가 살던 다리 밑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 어둡고 무서웠기 때문에, 혹 엄마가 늦게 오실 때면 꼼짝없이 버스 정류장에 붙박혀 있어야 했다. 내가 엄마를 찾아 가거나 기다리던 버스, 85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쪼들리는 형편 중에도 엄마는 우리를 위해 어린이 잡지 <소년중앙>을 빌딩 매점에서 정기 구독 신청을 해서 가져 오셨는데, 버스에서 내리는 엄마 손에 <소년중앙>이 들려 있는 날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1970년대만 해도 잘사는 사람이 드물 때였다.
우리 남매는 가난했지만 육성회비는 1등으로 냈다. 아니, ‘내야 했다.’ 안 그러면 할머니께서 역정을 내시니까. 가난한 집안 특유의 일종의 자격지심 같은 거였는데 자존심 강하고 깔끔한 성품의 할머니라 유독 심하셨던 것 같다. 우리 형제들은 세끼 밥 외에는 과자 부스러기나 아이스케키 하나도 사 먹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길에서 누가 먹고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쳐다만 봐도 할머니께 야단을 맞았다. 남이 먹는 걸 자기도 먹고 싶다는양 쳐다보는 것은 양반스럽지 못한 짓이라는 게 이유였다. 쳐다본 게 죄가 아니라 사 줄 돈이 없었다는 게 진짜 이유라는 건 나중에 커서야 알았다.
할머니를 많이 닮은 나는 초등학교 2학년,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지급되는 무상 교과서가 내게 할당되었을 때 창피하고 자존심 상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낸 적이 있다. 그 때 죄없이 곤혹을 치른 선생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하다.
어머니는 다시 고모부가 설립한 중고등학교의 매점을 얻어 성북동 집을 떠나 관악산 자락 유명한 달동네 난곡 인근으로 이사를 갔다.
우리 가족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난곡초등학교 달동네 급우들은 너무나 가난했다. 육성회비가 밀린 친구들이 교단에 불려나와 선생님에게 뺨을 맞곤 했다. 식구들의 저녁 한끼 수제비를 끓일 밀가루 값 70원을 잃어버리고 엉엉 울던 친구도 있었다.
얼마 후 육성회비를 못 내 결국 학교를 그만 둔 친구를 동네 목욕탕에서 만났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목욕탕 때밀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애가 나를 보자 부탁도 안했는데 내 등을 밀어주었다. 친구 앞에서 웃을지 울지 망설이던 나는, 등을 보이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표정관리가 안 돼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 때 그 급우들에게 나는 지금도 어떤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

관객 1천만 명이 넘어 섰다고해서 화제에 올랐던 영화 ‘7번방의 선물’은 6살 정도의 어린 딸과, 그와 비슷한 수준의 지능을 가진 죄수 아버지가 교도소를 배경으로 나누는 동화같은 사랑이야기이다. 그 영화를 보았는가?
그 영화의 설정 자체는 실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는 내겐 다소 각별했다. 주인공 꼬마처럼 나도 20년간 아버지를 편지로 돌봐드리는 역할을 해야 했고, 고등학생 때부터는 혼자 면회를 다니곤 했다.
영화 속 접견실에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어 좀 놀랐다. 우리가 아버지를 면회 다닐 땐 두꺼운 유리에 구멍이 송송 뚫어져 있어서 그 구멍에 대고 서로 고함을 질렀다. 우리 뿐 아니라 옆 방에서도 소리를 질러대니 말소리가 뒤섞이고 울려서 접견자가 많을 때는 알아듣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니 접견시간 5분, 10분이 그냥 허비된 것 같아 돌아서 나오면 아쉬움과 회한만 더해지곤 했다. 그래도 우리같은 장기수 가족들은 면역이 된데다 이골이 나서 덤덤하게 돌아오곤 하지만 수감된 지 얼마되지 않은 수인의 가족들은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면회실을 나오기 일쑤였다. 그도 모자라 접견실 밖에서 한바탕 더 눈물바람을 한 후에 체념어린 표정으로 교도소 문을 나서곤 했는데, 아기를 들쳐 업은 꾀재재한 입성의 젊은 여자들이 치마꼬리로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특별 관리대상 수인, 공안 사범이었기 때문에 면회도 한 달에 한 번 밖에 안될 뿐더러 면회신청 절차도 매우 까다로웠다.
일반 죄수와 달리 면회신청일지를 접견신청소가 아닌 교도소 내부 깊숙이 보관해 두기 때문에 한 번 가지러 가려면 같은 공안 사범 가족들의 면회 신청이 최소 3건 정도는 돼야 한다. 일반 신청인도 밀려 있는 상황에서 직원이 들락날락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실상 귀찮기도 하니 한꺼번에 모아서 접수하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 수감자들 가족이 한날 한시에 면회를 오면 모를까, 우리 가족은 면회 신청을 해 놓고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기다리기 일쑤였다. 겨우 5분간의 면회를 위해 네 다섯 시간씩 대기실 의자에 쪼그리고 앉았는가 하면,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온종일이 걸려 서울서 대구, 전주, 광주 등 전국의 교도소를 누비고 다녀야 했던 것이다.
이른바 특별면회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어쩌다 교도소 안에서 30분간의 가족 만남이 이뤄졌는데 그 때는 고기며, 전이며 바리바리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갔다. 한 번은 아버지가 박카스 병에 소주를 몰래 담아 오라고 하신 적도 있었는데 용케 반입을 하긴 했지만 어린 나는 들킬까봐 무척 떨렸다.
하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포식한 탓에 특별 면회 다음날이면 재소자 대부분이 설사를 한다는 서글픈 이야기도 들었다.
영화 ‘만추’처럼 귀휴를 얻어 아버지가 교도관과 동행하여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신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때 대학 1학년이었는데 아버지를 교도소가 아닌 집에서 처음 만난다는 사실에 마음이 몹시 들떴는데 모여있는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겨우 “저 구멍(교도소)은 들어가기는 쉬운데 나오기는 왜 이리도 어려운지”라는 ‘썰렁한’ 농담 한마디만 던졌다.

아버지가 출감하던 해 결혼했다면 아버지를 모시고 혼례를 치른 건가?
아버지는 1988년 8.15 특사로 가석방되셨다. 나는 같은 해 5월에 결혼식을 했고. 석 달만 더 기다렸다면 아버지 손을 잡고 예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그 때만 해도 가석방 기대가 없었다. 결혼 전 신랑감은 옥중의 아버지께 사진으로 인사 드렸다. 결혼을 앞두고 함께 교도소를 방문했지만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부군을 소개해달라.
내가 이대를 다닐 때 그는 연세대 철학과 조교였다. 그도 알고 있는 내 친구에 대해 상의할 일이 있다는 핑게를 만들어 1년 전부터 짝사랑하던 그를 연대앞 다방으로 불러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내가 그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1년간 교제한 후 내가 먼저 청혼을 했다. 아버지로 인해 연좌제의 그림자가 따라 다니던 무렵이라 그 사람의 장래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난 공직에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라는 말로 그 문제를 기꺼이 넘어가 줬다.
결혼 후 남편은 전공을 바꿔 호주 퀸즈랜드 대학(UQ)에서 경영관리학(MBA) 석사학위를 받고 엘지(LG), 한라, 고려아연 현지 법인 등에서 20년간 직장 생활을 했다. 3년 전부터는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자녀는?

24살 김진원, 22살 김규원 아들만 둘이다. 큰 아이는 음악을 한다. 싱어송라이터로 14살 때부터 곡을 만들기 시작해 현재 창작곡이 150개에 달한다. 나의 글처럼 아들의 음악은 친근하고 편안하지만 영혼과 정신의 고갱이를 터치하는 섬세한 서정성과 깊은 샘에서 길어올린 듯한 순수한 청량감이 있다.
큰 아이는 갓난아기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잠이 와서 칭얼댈 때도 노래를 불러주면 이내 집중을 하며 빠져들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섬집 아기’ ‘엄마야, 누나야’ ‘아빠하고 나하고’ 등 무슨 노래든 일단 불렀다 하면 50곡에서 1백곡은 쉴새없이 해야 했다. 자장가 삼아 부르는 노래에 잠이 들기는커녕 그걸 귀담아 듣느라 되레 초롱초롱 정신이 또렷해지곤 했는데 레퍼토리가 끊어지면 또 해달라고 고사리 손으로 내 등을 치며 보챘다.
등에 귀를 가만 붙이고 숨결을 느끼며 한없이 리듬과 가락에 빠져드는 아이를 들쳐업고 노래를 하며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배냇서부터 음악을 알았던 것 같은 그 아이를 보면서 ‘예술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라는 세간의 말에 공감하곤 한다. 아이는 빨려들 듯 슬프고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빈센트 반 고호를 좋아한다. 엄마인 내가 보아도 내 아이의 영혼은 고호의 것과 많이 닮은 것 같은데, 그러나 고호의 일생처럼 어둡고 춥고 아픈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하는 기도가 있다.
작은 아이는 이민 2세로서는 드물게 시드니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다. 기독교 사상가이자 영문학자 C S 루이스를 ‘취한 듯’ 흠모한 나머지 그의 향기를 찾아 옥스퍼드 대학에서 더 공부하기를 꿈꾸며 현재는 시드니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있다. 글을 아주 잘 쓰며 학문융합시대의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착실히 성취해 가고 있다. 유튜브를 통해 버락 오바마, 넬슨 만델라, 빌리 그래함 등 훌륭한 인물들의 연설이나 강연, 설교 등을 보고 들으며 잠자리에 들곤 한다. 그들이 그 아이의 꿈을 영글게 하는 멘토인 것이다.

신아연씨와 남편. 그리고 신씨의 ‘보물’인 음악 전공 큰아들 진원(24), 영문학 전공 작은 아들 규원(22)씨.


우리 가족은 지금 행복하다


이번에 낸 책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비롯해서 그동안 펴낸 칼럼집들은 어떤 내용인가?
2000년에 쓴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은 초기 이민생활에서 체험하고 느낀 이국 정서와 한국 문화를 비교한 글모음이다. 하루도 사건 사고가 그칠 날이 없는 한국은 꼭 지옥 같지만 옥시글 옥시글 서로 부대끼고 살아가는 재미난 지옥인 반면, 호주는 자연환경, 사회 제도 등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지만 정서가 상이한 이민자로서는 도무지 밋밋해서 사는 재미가 없다는 느낌이 들어 ‘심심한 천국’이라 이름 붙였다.
2005년에 출간한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는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의 후편 이다. 부모라 해도 자식의 길을 간섭함 없이 격려하고 지원하는 이 나라의 사회적, 가정적 분위기를 제목에 담았다.
당시 아들의 친구 아버지가 고위직 판사로 재직중이었는데, 아들 친구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소위 식당 ‘시다바리’ 로 들어가 요리사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부모의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드문 일, 어쩌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세 번째 책 <자식으로 산다는 것>은 한국에서 만난 글쟁이들끼리 각자 부모에 대해 쓴 글을 모아서 냈다.
이번 책은 내가 활동하는 온라인 칼럼 전문 사이트 ‘자유칼럼그룹’에서 ‘공감’이라는 타이틀로 쓴 글 가운데 77편을 골라 묶은 것이다. 책을 내 준 당대 출판사로부터 따스한 공동체, 자연스런 나이듦, 당당한 진솔함, 소소하나 귀티나는 일, 자잘하고 정직한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글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라는 제목을 출판사에서 제안했을 때 너무 평범하고 흔하게 들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밥’은 실상 ‘삶’이 아닌가? 한 끼니의 밥을 얻기 위해 일평생 고생하며 흘린 눈물이 얼마이며, 밥 한 그릇에 팔아버린 양심과 저버린 책무, 외면한 진실은 또 얼마인지, 신산하고 고단한 삶이든 허풍스레 탐욕적인 삶이든 결국 ‘밥’, 그 이상의 사연을 담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밥’은 밋밋하나 소중한 일상이며 애면글면 이어가는 생명의 원천이 아닌가. 더구나 단순히 밥을 ‘하는’ 게 아니라 ‘짓는’ 일임에야…
밥을 ‘짓는’ 일은 삶을 ‘짓고’ 생을 ‘짓는’ 일이니까. 자기 생을 ‘지어가는’ 사람은 본능과 감정에 끄들리며 되는 대로 '반응하는' 사람이 아닐 테니 애초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세워진 집과 마구잡이로 얽은 움막이 같을 수 없듯이 밥을 ‘하는’ 일과 ‘짓는’ 일도 그처럼 엄연히 구분될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책 제목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제목이 오히려 과분하게 느껴졌고, 내 삶, 내 생인 ‘밥’을 지금까지 제대로 지어왔나 하는 부끄러운 성찰을 하게 되었다. 행여 글 쓰는 여자는 못된다 해도 죽을 때까지 ‘밥 짓는’ 여자로는 살아야겠다는 속다짐과 함께.
이번 책은 특히 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이자 현 울산대 석좌교수이면서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중인 정진홍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어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함께 힘든 성장기를 보낸 자매분들의 근황도 궁금하다.
앞서 말했지만 큰 언니는 이대 약대, 형부는 서울 치대를 나왔다. 작은 언니네도 의사 부부이다. 조카들도 치과 의사, 방송국 피디, 교사, 대기업 팀장, 미술 학원장 등으로 사회에 당당히 한 몫을 하고 있다.
큰 언니는 우리 남매들의 성취를 ‘쓰레기 통에서 핀 장미’라는 말로 자부심어려 한다. 평범한 가정이라면 모를까, 국가가 핍박하고 사회로부터 거부를 당하며 가난에 시달렸던 우리 가족으로서는 이만큼 하기도 쉽지 않았기에.
다만 가족의 비극이 아버지로 끝날 줄 알았는데, 오빠에게 대물림되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고생하는 올케언니와 3남매 조카들을 생각하면 모질지 못한 심성을 가졌던 돌아가신 오빠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비록 병으로 세상을 등졌음에도 남은 세 자매들처럼 사회적 편견, 가난의 굴레, 가족의 비극적 벽을 뛰어 넘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질없는 사유놀이이자 말장난 같지만 말이다.

당신은 아무나 흔하게 겪지 않는 인생을 살아왔다. 남들이 보기에 성장기는 불행하고 불운했다. 과연 인간의 불행과 행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토끼풀을 보면 사람들은 으레 네잎 클로버를 찾는다. 잘 알다시피 네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므로. 그러나 혹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을 아는가? 그것은 ‘행복’이다. 언뜻 생각할 땐 ‘행운’을 찾으면 ‘행복’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세잎 클로버와 네잎 클로버처럼 애초부터 아예 다르다는 말이다. ‘행운’이 곧 ‘행복’은 아니라는 말이다.
네잎 클로버는 좀체 찾아지지 않는 게 누구나의 현실이다. 하지만 세잎짜리는 지천으로 널렸다.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일생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복’은 지천이다.
독특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겐 말하자면 ‘행운’은 없었다. 애초 네잎 클로버는 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찾아야 했다. 행복해 지려면 매순간 깨어있어야 한다. 일상 중 행복하다할 순간을 포착하고 놓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행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휩쓸리거나 감정에 매몰되면 안된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깨어서 직시하면, 회피하지 않고 직시할 수만 있어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행복은 그런 것들의 집합체이다. 오감과 의식과 전감정을 동원해, 전인적으로 가능한 최대로 깨어있는 것, 그것이 내겐 행복이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75)는 ‘문학은 고통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불행을 읽어가면서 문학을 향유한다’고 덧붙였다. ‘불행을 읽고 있는 사람은 문학을 통해 삶을 영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내가 말한 ‘불행에 깨어있다’는 의미는 요사의 ‘불행 읽기’와 유사하다.
가변적인 주변환경이 나의 행불행의 조건이 될 수 없도록 하려면 지혜로워야 한다. 그 지혜는 나의 내면에서도 오지만, ‘옛말 하나도 그른 게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연세많은 분들에게서 얻어질 때가 많다.
단 우리 어머니처럼 삶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명절 전 벼려놓은 칼날 같은 분에 한해서 말이다.
‘노인이 한 명 죽으면 그 마을의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구전(口傳)이 있는데 나이든 사람을 마치 용도폐기된 고물 취급하는 한국 사회가 귀 기울여야 할 말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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