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 감독의 사부 이석기 감독
강우석 감독의 사부 이석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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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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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 알바로 시작, 이만희 영화 12편 찍은 거장

【인터뷰365 김두호】서울 명동과 인접한 충무로는 원로 영화인들에게 고향과 같다. 충무로역을 나와 진고개식당이 있는 왼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영화인들이 모여들었던 1960∼80년대 풍경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어서 가끔 향수를 달래기 위해 찾아오는 노 영화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생을 영화제작 현장에서 보낸 이석기 감독(73)을 충무로에서 만났다. 영화 촬영기사이면서 연출 감독이었다.

영화감독 이만희 김기덕 김수용 임권택 변장호 정인엽 고영남 최인현 문여송 장길수 감독들의 작업파트너로 그들의 화제작이 된 작품 180여 편을 촬영했고, 자신이 직접 연출한 영화도 <엄마안녕> <성이수일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등 10여 편에 이른다. 강우석 감독도 그의 연출팀 출신이다.

영화 촬영기사는 기술보다 예술적인 감각을 더 필요로 하는 전문직종의 영상 아티스트이다. 이석기 원로 촬영기사는 영상예술이 대중문화의 꽃으로 활짝 피어나 연간 200여 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던 시절부터 50여년을 카메라와 더불어 살아온 영화 창작현장의 백전노장이며 거장 영화인이다.
이젠 모두가 떠나가고 없지만, 그에게 충무로는 여전히 가까이 있다. 카메라 배터리를 메고 촬영기사를 따라다니는 조수생활로 첫 발을 들여놓았던 꿈과 청춘의 시발점이 충무로였고 긴 세월을 두고 일과 만남이 이루어지고 술잔이 오고간 삶의 무대가 충무로였다. 그의 지난 이야기를 남산에서 봄바람이 솔솔 내려오는 어느 날 해거름에 충무로 커피숍에서 들었다.

심부름 길에 촬영장 알바로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세요?
비무장지대가 멀지 않은 파주시 문산읍 북쪽의 선유리에서 살아요. 그곳서 한 정거장만 지나면 최북단의 도라산역이지요. 서울에서도 북한산 산자락에 있는 도봉구 방학동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더 조용한 곳에 집이 마련되어 금년 2월 엄동설한이었지만 이사를 했어요.

산과 숲이 더 많이, 더 가까이 있는 동네로 가셨군요.
영화 촬영할 때도 도시를 멀찍이 벗어난 곳, 산골 로케이션이 좋았어요. 앵글에 자연을 담는 작업은 머릿속까지 신선한 공기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한강이 인접한 마포 합정동의 단독주택에서 30년을 살았을 때도 산을 좋아해 틈이 생기면 북한산에 올랐지요. 나는 시야에 북한산이 들어오면 즐거워요.

가족은요?
딸만 둘인데 모두 출가해 지금은 집사람(서화자 71)과 둘이 살아요.

고향은 부산 쪽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인 박찬종과 검찰총장을 지낸 김기수가 부산 토성초등학교 동기동창들입니다. 경남중학교도 같이 다닌 박찬종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해 기억에 남는 친구였지요.

이석기 감독의 연출 데뷔작 에서는 강우석 감독이 조감독을 했다. 사진 왼쪽부터


어떻게 영화인이 되셨지요?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용산고를 다녔어요. 농경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 당시는 도시로 나온 대다수 젊은이들이 가난한 농촌 출신이었지요. 부모들이 땅 팔고 소 팔아 자식들 공부시킬 때였고 서울 사는 사람도 먹고살기가 힘들었어요. 대학까지 공부를 계속하려면 막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했던 시절에 집안 어른 심부름으로 삼촌(고 이병삼 촬영기사)이 일하는 영화 촬영장에 갔다가 발목이 잡혔어요. 삼촌 밑에서 세컨드(제2 조수)로 촬영 작업을 하던 안면희 기사가 나를 유심히 보고 구경꾼으로 앉아있던 나에게 잔일을 시키면서 자장면을 사주었어요. 그 때 그 분이 다른 일이 없으면 촬영장에 와서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꼬셨지요.

삼촌인 이병삼 촬영기사 조수의 조수가 된 셈이군요.
그 때는 영화감독이나 촬영기사의 퍼스트(제1조수) 자리만 차지해도 어마어마하게 성공을 한 것으로 젊은 영화 종사자들에게 선망의 눈길을 받았어요. 촬영 작업의 인적 시스템은 연출 감독들과 비슷해서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공사장의 도제(徒弟) 시스템과 같았지요. 말이 선후배 관계이지 주력 스태프 밑에서 일하는 후배들은 선배가 시키는 일을 절대로 거역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주종관계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부터 배웠어요?
퍼스트는 촬영기사의 그림자가 되어 가장 가까이 모시는 위치를 차지해요. 그게 기술을 배우면서 수발을 들어야하는 일이므로 무거운 쇳덩이인 카메라를 메고 따라 다녔고 세컨드는 더 무거운 배터리를 짊어지고 퍼스트의 뒤를 따라 다녔지요. 주로 하는 일이 배터리를 운반 하는 짐꾼 노릇이었어요.

중노동이었군요.
그때 사용한 카메라용 16볼트짜리가 30kg쯤 됩니다. 이동이 잦을 때는 어깨뼈가 욱신거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또 고약한 배터리 액체가 흘러나와 옷에 묻게 되면 사람 꼴이 우습게 보입니다. 누가 뭐래든 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시키는 일, 주어진 일을 놓치지 않았어요. 내가 워낙 정신력이나 행동력이 남다르게 민첩하고 책임감도 강해 누구에게 미움 살 일이 없어서 차츰 영화 촬영장에서 인정을 받아 인생의 갈 길이 열린 거 같아요.

어쨌거나 영화인이 된 것은 보조 일을 시켜 준 삼촌의 제2 조수 안면희 기사의 배려가 큰 힘이 된 것이군요.
그랬지요. 1962년 김응천 감독이 <영광의 침실>을 연출할 때 안면희 기사도 주 촬영기사로 데뷔하고 나도 제1조수인 퍼스트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폼을 잡게 되었습니다.

주 촬영감독으로 카메라를 잡은 때의 이야기를 계속해주시지요.
조수생활 5년쯤 하고 1966년 노진섭 감독이 연출한 멜로영화 <보경 아가씨>로 독립을 했습니다. 이듬해 정인엽 감독의 <명동 왈가닥>, 이만희 감독의 <귀로>로 이어졌습니다.

<만추> <돌아오지 않는 해병> <귀로>의 명감독인 이만희 감독과 많은 작품을 함께 하셨지요?
이만희 감독은 마흔네 살에 떠난 천재 감독이었어요. 예술적 상상력과 창의력이 뛰어난 분이지요. 그는 영화를 준비하면서 시나리오작가와 조연출 촬영 조명팀을 한자리에 수시로 불러 모아 술잔을 권하며 작품 의견을 들었어요. 자신이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나오면 바로 체크하고 반영을 했어요.

이석기 감독과 이만희 감독의 인연은 각별하다. 촬영장 알바로 일을 시작한 이석기 감독은 이만희 감독의 촬영 때 그의 눈에 들어 이후 등 많은 걸작을 함께 했다.

(위로부터) 이석기 감독이 촬영을 담당한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


이만희를 흥분 시킨 무명의 보조기사

기억에 남는 이만희 감독의 연출작업 특성이나 비화를 떠올려주시지요.
연출을 앞두면 그의 콘티작업은 치밀하고 완벽하게 준비되었어요. 배우의 시선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지까지 콘티에 포함되어 있었지요. 배우는 연기하기가 편하면서 한편은 까다롭고 어렵다고들 했습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촬영에 들어가서도 중도에 시나리오를 수정 보완하는 사례가 따랐지만 이만희 감독은 촬영 중에는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촬영 작업을 할 파트너를 선택하는 것도 까다로웠을 테지요.
나와 이만희 감독의 인연은 <군번 없는 용사>를 찍을 때 삼촌 이병삼 기사의 보조기사로 참여하면서 비롯되었어요. 태릉에서 인민군이 트럭 10대에 분승해 이동하는 몹신을 찍던 때에 내가 카메라 작업의 연장선에서 엑스트라 이동 등 현장 통제임무를 수행했어요. 국군의 기습 공격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는 혼란한 상황을 한 장면씩 찍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집단 액션연기를 이끌어내는 촬영 현장의 중심에서 미친듯이 소리지르고 뛰어다니며 몹신의 스케일을 담아내는 나를 본 감독이 촬영기사에게 “저 친구 누구냐”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고 해요. 그게 아마 관심을 가지고 나를 주목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후속 촬영장인 서울 충정로 신학대 앞길에서 인민군 장교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장면을 찍을 때는 나를 불러 카메라를 맡겼어요. 그곳에서 이 감독은 격렬한 스피드 액션을 찍기 위해 카메라와 충돌해도 좋으니 근접 촬영을 요청했었지요. 그 자리에서 나의 임기응변으로 카메라를 들고 맨홀에 뛰어 들어가 하늘로 날듯 달리는 극적인 장면을 잡아냈어요. 비로소 새 작품을 준비하는 이 감독은 제작팀에게 “이석기부터 잡아라”고 지시했다는 겁니다.

이만희 감독과 첫 작품이 <귀로>였지요?
그래요. <군번없는 용사> 촬영 때 이 감독의 눈에 들어가 그로부터 12편을 함께 만들었어요. 탁월한 연출력으로 명성을 떨쳤던 시절에 작업을 함께해 내 영화인생에 보람을 안겨주고 간 감독입니다. 문정숙 신성일 등 그가 좋아한 배우를 나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요. <망각> <싸리골의 신화> <남자는 싫어> <창공에 산다> <외출> <여로> <휴일> <여자가 고백할 때> <생명> <암살자> <여섯개의 그림자> 등의 작품이 순식간에 떠오릅니다. 그 가운데 <싸리골의 신화>는 이념에 치우친 반공영화를 만들던 국책영화시대에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인간냄새가 피어나는 휴머니즘을 다룬 영화였어요.

계속해서 함께 한 영화감독들의 이야기로 이어가 주시지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로 사랑을 받았던 김수용 감독도 콘티를 치밀하게 준비하는 연출자였어요. 임권택 감독과도 <옥례기> <족보> <깃발없는 기수> 등 15편을 함께 만들었는데 깨알같이 쓴 연출노트를 준비해 현장에서 적절하게 작품을 수정보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연출 진행을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해서 제작자들이 좋아했어요.
하이틴 영화의 붐을 일으킨 문여송 감독과 <진짜진짜 좋아해>를 찍었고, 변장호 감독과 <무녀의 밤> <사랑 그리고 이별>, 최인현 감독과 <캔디캔디>, 영화배우였던 최무룡 감독이 연출한 <이 한 몸 돌이 되어>도 기억에 남는 작품들입니다.
여러 부문의 대종상을 받은 장길수 감독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고영남 감독과 정인엽 감독과도 각각 30여 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어요. 주로 원작을 일본에서 가져왔던 고영남 감독은 나의 영화 촬영 작업에서 가장 호홉이 잘 맞고 서로의 예술적인 감성을 좋아했던 점에서 잊을 수 없군요. 그와 <태양은 늙지 않는다> <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을 만들었는데 그의 연출 작업은 영상표현에 많이 집중했고 사전 작품 헌팅작업과 콘티 준비도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쏟았던 것 같습니다.
정인엽 감독과는 문희 남정임 윤정희 등 트로이카를 처음으로 한 작품에 캐스팅해 화제를 남긴 <결혼교실>로 시작해 1980년대 흥행영화의 바람이 된 <애마부인>시리즈를 함께 했습니다.
<5인의 해병>을 만든 김기덕 감독도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지요. 그와 신성일 윤정희가 주연인 <꽃상여> 등 몇 작품을 함께 했는데 고영남 감독처럼 호홉이 잘 맞아 카메라를 잡았던 시간이 즐거웠다는 좋은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충무로 거리에서의 이석기 감독. “술 한잔 마시면 달변가 고영남 감독도 충무로 어딘가에서 만날 것만 같습니다.” 그에게 충무로는 영원한 고향이다.

충무로엔 아직도 전설이 핀다

카메라가 디지털시대로 접어들고 영상표현 기술도 변화를 거듭해 영화 제작현장의 촬영 작업도 지금은 과거와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영상예술을 좇는 카메라맨의 예술세계도 창작으로 분류할 수 있어서 여전히 감각과 시각, 창의성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촬영장의 장면을 담는 영상작업을 촬영기사의 눈에 맡겼지만 지금은 감독이 뷰파인더나 비디오 모니터 장비를 활용해 연출 작업을 해서 카메라맨의 역할이나 책임이 좀 가벼워졌어요.

직접 연출한 영화도 여러 편이지요?
첫 작품은 1971년에 만든 멜로드라마 <엄마안녕>인데 내 손에 시나리오가 들어와 그걸 최무룡 씨에게 보여주었더니 직접 연출하라는 게에요. 자기가 출연해주겠다면서. 상대역으로 윤정희 씨를 캐스팅해 만들어 국도극장에서 개봉했으나 관객이 많지 않았어요. 두 번째 작품이 이만희 감독과 작품을 함께 한 백결 시나리오작가의 <성이수일뎐>인데 안성기 김청 주연에 스카라극장의 추석 대목프로로 선택되어 화제를 남겼으나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어요. 그 영화를 만들 때 강우석 감독이 나의 조감독으로 참여했어요.
그 뒤 김한길 원작의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를 미국 로케이션으로 연출하고, <땅끝에선 여인>을 알래스카에서 찍었고 또 <짚시애마> <아주 특별한 변신> 등을 199년대 중반까지 연출하며 한동안 감독으로 충무로에 남아있었지요.

충무로에 오면 그리워지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 그들 중에 몇 사람만 꼽는다면?
1968년 <창공에 산다>로 대종상 촬영상의 트로피를 가슴에 안겨준 이만희 감독과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밀려 있어서 가장 먼저 만나고 싶어집니다. 그가 금방 골목에서 불쑥 나타날 것도 같고. 제작자로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산 태창흥업의 김태수 사장도 정리하지 않고 떠난 나의 깊은 인연이고, 욕심 없이 한세상을 나그네처럼 산 최무룡 씨도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아, 술 한잔 마시면 끝없이 사람과 세상이야기를 쏟아내던 달변가 고영남 감독도 충무로 어딘가에서 만날 것만 같습니다. 훤칠한 키에 다정다감하고 영화감정이 나와 통했던 그의 정열적이고 낭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귓전에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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