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론에 해법 제시한 김동환 전 천도교교령
말세론에 해법 제시한 김동환 전 천도교교령
  • 김두호
  • 승인 201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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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은 천상에 있지 않고 인간 속에 있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4대 국경일 중 하나인 3.1절 기념식은 해마다 대통령과 3부요인, 외교사절, 국가 유공자 등이 참석하는 정부 주관의 큰 행사로 개최된다. 지난 91주년(2010년) 3.1절 기념행사는 당초 '유관순기념관'에서 개최될 예정으로 초청장까지 발송됐으나 갑자기 장소가 '독립기념관'으로 바뀌었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참석하게 될 국가 행사가 불과 이틀 앞둔 2월 27일 황급히 장소가 변경된 이면에는 ‘유관순 열사의 만세운동은 3월 1일이 아니라 4월 1일이다’라는 김동환(76) 당시 천도교 교령의 ‘3.1운동 역사 바로 이해하기’에 대한 주장을 정부가 받아들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유관순 열사가 16살 나이로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의 선봉에 서고 그로 인해 옥중에서 쓰러진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1919년 3월 1일은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33인 민족대표가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부른 날이고, 유관순 열사의 거사는 한 달 뒤인 4월 1일인데 3.1절 기념행사에 유관순 열사를 상징인물로 느낄 수 있는 장소 선택은 역사 해석의 오류에서 비롯됐다며 항의성 불참을 통고하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3.1절 기념식에 천도교의 최고 지도층이 참석을 거부하고 청와대와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 등에 항의성 진정서를 보낸 일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논쟁에 오를 만한 사건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대표 지도자가 천도교의 3세 교조 손병희 선생이었고 33인중 15명의 천도교인이 포함돼 있는 등 천도교가 역사적으로도 3.1운동의 산파역할을 한 종교단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쳐 맨손으로 일제의 무자비한 무력 탄압에 저항한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독립운동이었던 3.1 만세운동은 독립선언서의 내용에도 강조되어 있지만 우리 민족의 대의(大義)와 단결정신을 처음으로 세계만방에 고한 사건이었다.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해 1860년 태동(창도)되어 만 150년을 넘어 선 천도교(동학)의 최고 지도자인 교령을 역임하고 지난 4월부터 3.1정신구국운동본부를 창립해 3.1정신 부활운동을 시작한 김동환 (전) 교령을 만났다. 인터뷰는 일제 강점기부터 민족 지도자들의 혼백과 외침들이 구석구석 스며있는 유서 깊은 붉은 벽돌의 석조건물인 천도교중앙대교당(서울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연원회의장실에서 이루어졌다.

 

 

삼일절 기념식 장소가 행사 2일전에 극적으로 변경된 후일담부터 말씀해주시지요.

많은 사람들이 ‘3.1 운동’하면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고, 유관순 열사를 이야기하면 3.1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앞세우고 있는 것은 유관순 열사가 앞장 선 4.1 아우내장터 만세운동과 3.1운동의 차이점을 제대로 모르거나 역사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천도교는 정부까지 유관순 기념관을 3.1절 기념식 장소로 결정하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전하고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별도의 기념행사를 추진했지요. 뒤늦게 우리의 입장을 받아들여 장소를 독립기념관으로 변경해 참석을 했지만 서울로 돌아와 하오 3시에 예정된 별도의 기념행사를 불교계 기독교계 천도교인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범종교연합으로 가졌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만세운동도 3.1운동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유관순 열사의 만세운동도 3.1운동의 불길을 이어간 숭고한 만세운동이었지요. 그러나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은 탑골공원에서 의암성사(義菴聖師 / 손병희 / 1861-1922)를 비롯한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의 불길을 점화한 3월 1일에서 한 달이 지난 4월 1일에 일어났어요. 크게 보면 전국적으로 번져간 지방 지역의 만세운동인데 그것을 3.1운동의 연장선에서 보지 않고 3.1운동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의거로 생각하는 역사 인식은 잘못이지요. 천도교인의 입장을 떠나서 생각해도 3.1운동의 거사를 준비하고 일으킨 역사적인 주역 인물들이 3월 1일을 기념하는 3.1절 행사가 돌아와도 차츰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천도교가 일찍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지만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종교단체라는 역사 기록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3.1운동과 관련해 천도교의 역할에 대한 역사 인식이 점점 줄어든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보는지요? 과거의 교인수나 교세가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의암성사는 이 건물(천도교중앙교당)을 짓기 위한 명목을 내걸고 일종의 민족성금 500만원을 모아 30만원에 건물을 짓고 은밀하게 쌓아둔 남은 기금으로 3.1 운동자금과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지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3.1 운동 후 일제에 탈취당한 돈만 128만6천원으로 지금 돈 500억 원이 넘는 액수였어요. 거사를 준비하며 1912년부터 삼각산 봉황각 수도원에서 483명의 만세 선창 지도자를 양성했고 그 중 15명이 33인대표로 참여한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부터 외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것이 민족종교입니다. 1919년 3.1운동 직전 총독부가 집계한 교인 수가 300만이 넘었습니다. 일제는 3.1운동 후 천도교를 초토화 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같이 번져 1931년 ‘혜성(彗星)’이라는 잡지가 발표한 종교인 수는 기독교 27만, 불교 14만, 천도교가 600만이 넘었습니다. 2000만 인구의 30%가 넘는 교인이 있었기 때문에 3.1운동을 주도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10여만으로 교인이 줄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과 남북 분단, 또 정치적 종교적 사조의 변화와 함께 천도교는 점점 교세가 쇠잔해졌지만 민족종교로서의 150년 토대와 사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굳건해져 있습니다.

 

천도교는 한마디로 어떤 종교인가요?

양반가문의 귀한 독자로 태어난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 최제우 1824-1864)께서 1860년 경주 용담정에서 깨우친 도가 시천주(侍天主) 신앙인 동학(東學)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하느님 하나님 부처님 천주님 상제님 등으로 모시는 신격(神格)을 천도교에서는 한울님으로 부르고 모십니다. 시천주는 한울님이 계시지만 천상에 따로 계시는 게 아니고 사람마다 모시고 있다는 믿음이며 그것이 곧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교리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모두 한울님 같이 대해야 한다는 만민평등의 진리를 주창하며 동학을 창도한 수운대신사는 자신의 여종 두 명을 딸과 며느리로 삼았어요. 미국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은 1년 뒤에 나왔습니다.

당파싸움과 부정부패, 외세의 침범 등으로 국운이 기울던 조선 말기에 어진 선비들이 시천주 사상을 받아들여 구름처럼 몰려들자 조정은 혹세무민(惑世誣民) 무리의 괴수라는 죄명을 씌어 수운대신사를 참수했습니다.

 

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 선생(1827-1898)이나 3대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도 천도교에서 순교로 기록되고 있지요?

모두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해월신사는 항일구국 혁명으로 발전된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처형을 당했고 의암성사는 3.1 독립선언 후 고문과 옥고로 고생하고 병으로 출옥해서 곧 순도하셨지요. 백범 김구 선생도 황해 팔봉접주로 동학군을 지휘했는데 해방이 되어 귀국해서 가장 먼저 천도교중앙교당을 찾아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대강당은 독립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공사였는데 이 건물이 아니었다면 3.1운동이 있을 수 없었고, 3.1운동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있을 수 없었으며,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독립도 없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여러분들은 잊지말아야할 것입니다”라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청중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3.1운동을 일으킬 때 임시정부의 설립 계획도 준비된 것으로 봐야겠군요.

물론입니다. 당시 임시정부의 형태가 7개 정도로 구상됐으나 실체를 나타낸 정부는 한성임시정부 연해주국민회의정부 상해임시정부까지 3개였고 모두가 의암성사를 대통령으로 지목하고 자리를 비워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감옥에서 병보석 후 6개월만의 순도로 대통령에 추대될 수 없는 처지였어요.

 

 

 

 

 

 

 

 

 

천도교 중앙본당을 들어서면서 입구에 세워져 있는 ‘어린이운동발상지’ 기념비를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 천도교가 끼친 영향으로 어린이운동도 빼놓을 수 없지요?

어린이운동의 선각자인 방정환 선생이 3대 교주 의암성사의 사위였지만 교세가 왕성할 때 어린이운동을 비롯해 청년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도 처음으로 시작했고,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과 <혜성> <새벗> <조선농민> <부인> <신여성> 등 수많은 간행물을 발간하여 애국 계몽 교육사업을 왕성하게 했습니다. 보성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 동덕여학교(동덕여대) 교남학원(대구 대륜중고) 명신여학교(복명초등의 전신) 등을 운영하고 전국적으로 야학강습소를 통해 문맹퇴치와 민중 민족교육에 앞장을 섰습니다.

 

‘사람마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천도교의 신앙생활은 다른 종교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한울님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경천(敬天) 숭조(崇祖)의 신앙이 있었고 외래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나라에서 천제를 지내고 가정에서는 정화수를 떠놓고 행복을 빌었지요. 천도교는 아침 5시, 저녁 9시에 청수(淸水)를 떠놓고 가족이 기도식을 합니다. 청수는 생명의 기본이고 수운대신사께서 참형을 당하시기 전 청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린 데서도 뜻이 있습니다. 청수 앞에서 21자(字) 주문과 묵송, 경전을 읽고 청수를 분작(分酌)하는 것이 가정에서의 신앙생활입니다. 아침밥을 지을 때 가족 수 대로 한 숟갈의 성미(誠米)를 교회운영기금으로 모으는 것도 오랜 관습입니다. 일요일은 시일식(侍日式)이라고 해서 교회에 나가 교인들이 함께 주문 합창 설교 등의 시간을 갖습니다.

 

인류 사회는 어느 곳이든 혼란과 위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시대의 변화를 맞이합니다. 지금도 이 시대를 혼란과 혼돈의 시대로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천도교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나라가 망하면 종교도, 정치도, 개인의 부귀영화도, 자유도 잃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결국 모든 가치는 국가관을 초월할 수 없음을 일제 식민통치 때 체험했어요. 국가 위기란 외침과 내란의 위기, 경제 위기와 국민정신의 퇴폐로 인한 위기로 볼 수 있다면 모든 위기의 근원은 국민들의 정신 퇴폐로부터 시작됩니다.

작년 5월 7대 종단 대표들이 이명박 대통령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천도교 교령으로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경제 성장을 위해 애쓰는 대통령의 열정에 찬사를 드렸지만 대통령께서 바라는 만큼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밝혔습니다. 그것은 대통령의 정치 잘못이 아니라 국민의 심성이 갈기갈기 쪼개져 있어서 마치 빙판길에서는 운전을 잘해도 소용이 없다는 주장을 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국민의 심성을 순화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은 각자위심(各自爲心)으로 자기 당(黨), 자기 종교나 단체, 자기 연고만 생각하지 국민으로서의 의무감과 책임감은 약합니다. 그래서 국민의 정신적 구심체를 길러야 하는데 바로 3.1 독립운동정신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교령님의 말씀에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좋은 것을 지적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과 앞으로 그렇게 되도록 하겠다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천도교에 관심을 많이 나타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천도교에 큰 빚을 졌다는 말을 자주 하셨지요.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의 계승의지로 독립운동가들을 예우하고 지원방안을 제도화 시켰습니다. 천도교의 경주 용담정 성지화 추진사업에도 도움을 많이 주셨지요.

 

물질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풀기 힘든 과제가 빈부의 차이입니다. 그와 관련해 종교계의 시각도 저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정신문명은 황폐화 되고 있습니다. 우리 겨레는 천심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부모 공경과 이웃사랑의 예절을 지키며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일, 그리고 거짓 없는 농경사회의 전통을 대대로 이어왔어요. 서양의 물질문명이 들어오면서 빈부의 격차가 늘어나고 황금만능의 사회풍조로 돈을 벌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정치의 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치유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종교입니다. 그런데 종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발전해 왔지만 병든 세상의 치유는커녕 혼란과 범죄의 빈도는 늘어만 가고 있으니 종교인 스스로 자신을 돌아 볼 때입니다. 종교인 스스로가 먼저 물욕과 물질을 버려야합니다. 종단이 어떤 명분이든 재산을 축적하면 속세인은 한술 더 떠 앞장을 섭니다. 예수 석가 공자 또 수운, 어느 분도 물욕을 갖지 않았고 물욕에서 떠나야한다는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자원고갈과 자연환경의 훼손, 자연재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망망한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같은 것이 인간사회입니다. 태풍을 만나면 함께 죽습니다. 돈이 많다고 혜택을 받지 않습니다. 풍랑을 만나 배가 표류해도 살 수 있도록 한 톨의 식량도 아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세상 만물은 한 줄에 꿰어 있습니다. 그것을 동귀일체(同歸一體)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나친 물욕을 버리고 자연을 부모처럼 생각하고 사람을 한울님 같이 받드는 세상을 만들면 흔히 말하는 지구 종말론은 사라질 것입니다.

 

 

 

 

 

 


젊으실 때 TV 다큐프로에서 ‘한국판 페스탈로치’로 소개되셨다는데 천도교인이 되신 때는 언제입니까?

1961년이었으니 곧 50년이 됩니다.

 

동기가 있으신지요?

내가 설립한 대구의 보성공고(현재의 조일공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따금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어요. 천도교 대구교당의 간부라는 분인데 천도교에 대한 지식도 없을 때였고 관심도 없어서 외면을 했었지요. 그러다가 한번은 나에게 불쑥 ‘손병희 선생을 아느냐’고 물어요. 33인 대표라는 것을 누구나 아는 터였고 특히 내가 제일 존경하는 어른이라고 말하자 반색을 하며 천도교의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 무렵부터 교당을 찾았지요.

 

천도교를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에 이르신 것은 결코 요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살아오신 얘기를 들려주시지요.

나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경북 달성군 논공면 북리의 농촌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과정이 방송의 인간 다큐멘터리 소재가 될 정도로 좀 특별했습니다.

 

학교를 설립하시고 교육자로 활동하시기 전의 사연이 특별하신 건가요?

그렇지요. 어두웠던 시대를 함께 한 같은 또래들에게는 흔한 얘기가 될 것이지만 젊은이들에게는 특별한 체험담이 될 테지요.

 

잊을 수 없는 고생담을 몇 가지만 소개해 주시지요.

영하 12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겨울에도 짚신이나 일본의 나막신인 게다를 신고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일본인 선생의 체벌은 끔직했어요. 지금 학생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였지요. 지각만 해도 추운 겨울에 상의를 벗게 하고 양동이 물벼락을 맞게 하고 운동장 100바퀴를 뛰게 해요. 30바퀴만 돌면 쓰러지는데 그때도 물벼락을 안겨주며 정신을 차리게 해요. 나는 6학년까지 줄곧 반장을 하며 공부를 잘했지만 진학할 형편이 못됐어요. 담임인 박영재 선생께서 학비 절반을 도와준다고 해도 못 갔어요. 그러다가 마을에 분교가 생겨 그곳에서 사동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학을 시작해 중등과정의 고등공민학교에 진학했었지요. 끼니를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았던 시절에 이를 악물고 공부해 다른 학생보다 실력이 탁월했어요.

그렇게 해서 학비 없이 다닐 수 있는 체신고등학교에 합격했어요. 16대 1의 경쟁률로 가난한 수재들이 모여들었지요. 졸업 후 19살에 안동우체국에 발령을 받았는데 정규 공무원으로 호봉처리가 되어 60명 중 나는 세 번째인 5급15호봉이었어요.

 

공무원 생활도 하셨군요.

그러다가 군에 입대했었지만 군차량재생창 재정과 행정업무를 보면서 부정 회계처리에 대한 상관의 지시에 불복종으로 맞서다가 1년6개월만에 반강제로 의병제대를 하게 됐어요. 제대후 방직회사 경비직으로 취업해 야간 대학생활을 시작했어요. 경상대도 다니고 경주계림대도 다녔지요. 고생에 반비례해 정열적인 데가 많았던 나는 힘들 때마다 새로운 길을 찾아 시의원에 출마도 하고 내가 세운 보성공업고등학교 교장으로도 재직하다가 마침내 천도교인으로 뜻과 보람을 찾는 사업에 내 삶의 전부를 걸게 되었지요. 1977년 교령에 취임하기 전에는 11년간 천도교교육자회장으로 일하고 이어서 종단의 살림을 맡아보는 종무원장으로 있었지요.

 

교령으로 임기를 마치시고 최근 새롭게 시작하신 3.1정신구국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입니까?

3.1운동은 국가를 되찾기 위해 전 민족이 죽음을 두려워 않고 하나로 뭉쳐 총칼과 맞서 싸운 위대한 정신의 구국운동입니다. 그 정신을 되살리면 우리는 어떤 불행도 예방하고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화합하는 사회, 부패와 퇴폐를 경계하고 근면 검소한 사회, 자연을 사랑하는 사회 등을 이루기 위해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는 계몽실천 운동입니다.

큰 제방도 바늘구멍에서 무너지듯이 국가적 재난도 보이지 않는 작은 위기의 불씨를 미리 막아야 안전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거안사위(居安思危), 박정희 대통령의 유비무환(有備無患)이 모두 같은 뜻입니다.

 

그 운동을 어떻게 전개해나갈 생각이신가요?

막연한 구호나 외치는 운동은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나는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전개해 나갈 계획입니다. 먼저 서로 가까운 사람끼리 20여명 단위로 팀을 만들어 운영하고 한번 내면 더 이상 내지 않는 입회비 1만원씩을 받아 그 돈으로 지역단위의 교양강좌를 개최할 생각입니다.

또 법률자문이나 취업 정보의 교환과 알선, 회원끼리 생산물품을 중간 유통과정 없이 직거래하는 장터도 운영할 계획을 세워 두고 있습니다. 운동본부는 팀장들과 의견을 나누며 운영하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투명한 단체로 성공시킬 생각입니다.

 

 

 

 

 

 

 

 

 

아직도 하실 일이 많으시군요.

내 스스로를 위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일이 언제나 즐겁습니다. 죽어서 좋은 하늘나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다함께 지상의 천국을 맞이하는 정신이 구국운동입니다.

 

 

 

[인터뷰이 나우] 천도교 교령을 지낸 김동환 전 교령은 현재 3.1정신구국운동범국민연합회 총재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매월 정기적으로 서울 금천구 가산동 685 디지털엠파이어 빌딩 1004호(1호선 독산역 2번 출구)에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전민족이 한마음으로 싸웠던 3.1 독립운동의 정신을 재현하기 위한 지도자 양성 강연회를 주관하고 있다.


지난 7월 19일에는 “500년 역사가 끝나는 마지막 48년‘을 주제로 강연을 했고 또 이날 천도교 전 종무원장 이창번 씨의 ’윤봉길 의사‘편 강연이 마련됐다. 김동환 총재는 강연이 끝나면 청중과 자유토론 시간과 식사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연락처는 010-3815-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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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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