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 부군 박준서 총장이 말하는 ‘아내, 동료로 40년’
장상 부군 박준서 총장이 말하는 ‘아내, 동료로 40년’
  • 김우성
  • 승인 201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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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부터 포용의 리더십 남달라” / 김우성



인터뷰365에서는 창간 3주년 기획의 일환으로 7.28 재·보궐선거 최대 격전지인 서울 은평을 지역구를 찾아, 원내 의석 수 양대 정당의 두 후보 배우자들을 만났습니다. 이에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 배우자’ 추영례 여사의 인터뷰와, ‘민주당 장상 후보 배우자’ 박준서 경인여대 총장의 인터뷰가 게재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편집자주


[인터뷰365 김우성] “왜 사법시험 안 보고 신학을 해요?”

40여 년 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신학과로 막 편입한 청년 박준서에게 같은 과 친구 장상이 건넨 질문이다. 장상 역시 이화여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먼저 편입해있던 학생이었다. 지겹도록 받았을 질문에 박준서는 덤덤하게 답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는 건 저랑 별로 안 맞는 일입니다. 법관이 되는 게 저한테는 좋아 보이지도 않고요.”


민주당 장상 후보의 부군인 박준서 총장(경인여대)은 천생 학자다.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두 사람은 함께 유학길에 올라 예일대에서 신학석사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PTS,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나란히 신학박사를 취득했다. 귀국 후에는 박 총장이 연세대에서, 장 후보는 이화여대에서 교단에 섰다.

이후 장 후보는 정치권으로 운신의 폭을 넓혔으나 박 총장은 학문의 상아탑을 벗어나지 않았다. 30년 간 봉직했던 연세대에서 퇴임한 후에도 명지대 석좌교수와 같은 대학 기독교문화연구소에서 소임을 다했고, 지금은 경인여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 후보는 훗날 대학 시절을 회고하며 “공부하는 사람 특유의 순수함이 은근한 매력이었다.”고 박 총장을 기억했다.


그러한 박 총장의 등허리가 요즘 흠뻑 젖어있다. 장 후보를 알리기 위해 1분 1초를 쪼개어 은평구 곳곳을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10여 년 전 부인이 총리서리에서 낙마했을 때 “그곳에서 잘 나왔다”며 위로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던 22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선거캠프에서 만났을 때에도 박 총장은 어색해 보이는 어깨띠를 두르고 안면이 없을 법한 사람들과 연신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정치인 장상의 열혈 지지자로 만들었을까.


(총리 인준 청문회 당시 제기된 의혹과 그에 대한 장 후보 측 해명은, 이미 언론과 저서를 통해 수차례 공개됐으므로 본 기사에서는 자세한 내용을 생략한다)



부인이 다시 ‘여론의 장’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 때 심정이 어땠나요?

당시 총리 청문회, 또 그와 관련된 언론보도가 진실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저희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시간들이었습니다. 장 박사와 저는 교정에서 만나 사랑을 키운 캠퍼스 커플이었습니다. 유학 가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함께 일하며 공부하며 40여 년을 친구이자 동료이며 부부로 살아왔는데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지 않겠습니까. 그는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태생적으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부도덕한 사람으로 매도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모든 삶의 가치가 무너지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정치를 한다니 처음엔 저도 반대를 했지요. 보통의 세상살이도 어려운데 정치라는 것이 쉬운 세계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장 박사가 청문회 이후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아내이지만 깊은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그 정도의 큰 사건이 있고나면 보통 건강도 해치고,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길 텐데... 지혜롭게 극복하는 모습에서 아내의 새로운 면을 본 겁니다. 결국 그의 결정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 학자로 존경받고 명성을 쌓아온 부부가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뭔가요.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가장 큰 힘은 뭐니뭐니해도 정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나라가 경제만 가지고 선진국이라고 얘기할 수 없듯이 모든 것이 다 수준이 올라가야 할 텐데 정치가 바로 되지 않고는 요원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높은 존경을 못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한국정치를 바른길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데에 언젠가 누군가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미력이지만.. 정말 이거는(저희는) 미력입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부인의 어떤 점을 지지하는지요.

간단한 예로, 평소 운전할 때 교통규칙을 어기는 문제로 옆에 있는 장 박사에게 자주 야단을 맞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왜 차도 인적도 없는 한산한 도로에서 유혹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웃음) 누가 보지 않는다 한들 스스로 원칙을 지키려는 모습을 존경하고요. 또 하나, 추진력도 대단히 강한 사람입니다. 이화여대 총장을 맡았던 6년 동안, 조금도 과장이 아니고 이화여대를 말 그대로 세계적인 명문여자대학으로 만들었습니다. 전세계 어디를 봐도 여자대학으로 우수한 공과대학이 있고 우수한 의과대학이 있고, 또 우수한 법과대학을 갖춘 곳은 드물어요. 이화여대가 그전에도 유명했지만, 장 총장이 책임을 진 동안에는 학문적으로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학교로 변모했습니다. 처음부터 ‘이화여대를 업그레이드 시켜야겠다’하고 목표를 정하고 추진했던 겁니다.


은평을 지역구에 각 당에서 이른바 거물급이 모였습니다만, 산적한 지역현안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선거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장 후보의 ‘유’한 이미지가 지역유권자들 사이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회지도력이라는 게 강한 이미지만 장점이 아닙니다. 모성애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성애는 강한 이미지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진정한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장 박사는 겉으로 보면 말투도 아주 부드럽게 하고 체질적으로 독한 말을 못합니다만, 속으로는 굉장한 의지력을 가지고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성격입니다.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가 성장배경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장 박사가 고생한 티가 별로 안 나는 모양이에요.(웃음) 사실은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6.25직전에 어머니와 단둘이 월남을 했는데 장모님은 몸도 약하시고 경제력이 전혀 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자고 먹는 시간 빼고는 오로지 기도만 하시던, 신앙의 전형을 보여준 분이셨지요. 그래서 장 박사는 혼자의 힘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랬기에 사회의 낮고 낮음을 다 아는 사람입니다. 먹는 것 하나만 보더라도 알 수 있어요. 뭐든지 잘 먹어서 놀랄 때가 많습니다. 하하. 도리어 제가 음식을 가려도 장 박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장 후보는 어떤 사람인가요.

주부로서는 조금 낙제점수일 거에요. 주방에 들어가서 음식 장만을 한다던가.. 그런 건 이제 별로 기대를 안 합니다. 하하. 왜냐하면 워낙 시간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어머니로서의 역할은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그 바쁜 가운데서도 아이들 챙길 거 다 챙겨주며 어머니로서의 자리를 지켜내는 걸 보면서 든든했습니다. 아내로서의 역할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요. 하하하. 그래서 제가 가끔 농담 삼아서 커피 한잔 제대로 대접 못 받아봤다고 놀리기도 합니다.

장 박사는 시어머니와 친어머니를 10년 이상 모셨습니다. 두 노모와 저희 부부, 두 아들까지 여섯 식구가 함께 살았지요. 저희 어머니를 말씀드리자면 87세가 되실 때 까지 집안일을 다 봐주실 정도로 건강하셨습니다. 주변 분들은 “어떻게 연세 많은 어른께 집안일을 맡기느냐”라시며 불효한다고 오해하시는데, 저희도 “어머니 이젠 그만 손 놓으세요”라고 말씀을 드려봤지만 집안일을 직접 하시는 게 어머니로서는 ‘아이덴티티’였어요. 나도 집안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그래서 은행도 다녀오시고 장도 다녀오시고 다리 불편하시면 부축해드려서라도 직접 다니셨지요. 저희 어머니가 80세가 되셨을 때 영어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하하. 대단하시죠. 그런 어머니와 몸이 불편하신 장모님은 사돈지간임에도 서로 형제처럼 지내셨어요.그러니까 10년 이상을 같이 지낼 수가 있었고요.(웃음)


장 후보는 부군과의 첫 만남을 돌이켜 “솔직하고 소박한 친구였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박 총장께 장 후보의 첫 인상은 어땠습니까.

굉장히 리더십이 강하더라고요. 어디를 가도 타고난 리더였어요. 모든 걸 포용하는 리더십, 인간적인 리더십이 대학 시절부터 주욱 이어져 온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일대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유학하던 시절 얘기 좀 해주시죠.

제가 예일대에 1년 먼저 갔지만 장 박사가 곧 왔고, 석사를 마친 1970년 8월 15일에 예일신학대학원 마퀸드 채플에서 결혼을 했지요. 그 후 프린스턴에서 같이 박사 과정을 밟았는데 유학생활이 있었기에 부부 관계가 유난히 돈독해졌던 게 아닌가 싶어요. 프린스턴에서 공부할 때 첫째를 낳았는데 한국 같으면 육아에 대해서 도와주실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엔 아무도 없었어요. 육아에 대한 책을 구해서 그걸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아이를 키운 겁니다. 육아는 아내와 50퍼센트씩 나눠서 했어요. 둘 다 공부를 해야 하니까. 그런데 저희가 유학을 하던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당시 우리나라 형편이 지금처럼 윤택하지가 않았어요. 유학생은 환전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2백 달러 들고 공항에서 비행기 타면 그걸로 끝이었어요. 그때도 등록금은 5천 달러였을 때인데 말이죠. 물론 학교에서 어느 정도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 자체는 불가능했기에 둘이 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같이 고생하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더 가까워진 거예요. 어떤 분은 미국에서 공부를 했으니까 잘 지내지 않았느냐고 하시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하하. 뭘 했는지는 얘기 안 할 거예요. 하하하하. 도둑질하고 사기 치는 일 외에는 둘이서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유학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은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청문회 때 어느 국회의원께서 10년 동안 부부가 미국에서 공부했으니까 돈 많은 집안 아니었냐는 질문을 하셨어요. 하하. 그때는 저희 부부만 고생한 게 아닙니다. 같은 시기 외국에서 공부한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단지 우리는 특별히 같이 공부를 했기 때문에 더더욱 고생을 많이 했죠.


본격적인 신혼생활을 기숙사에서 했다죠?

처음에 프린스턴에서 공부할 때 기숙사 이름이 하지홀이었는데 이승만 박사가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 기숙사가 독신이 머무르는 곳이어서 주방도 없었지요. 값이 쌌기 때문에 들어가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어요. 학교에서 특별히 우리 두 사람을 배려해준 겁니다. 독신들이 사는 기숙사에 부부가 사니까 늘 주목의 대상이었어요. 하하하.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돈을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시작을 한 거죠.



유학시절 청년 박준서는 장상과 함께 여느 때처럼 캠퍼스를 거닐던 중 벤치에서 불쑥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준 사파이어 반지로, 단순한 선물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장상은 갑작스럽기도 하고 싱겁기도 한 박준서의 프러포즈를 받고 많이 놀랐지만 이내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국에 홀로 계신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갑자기 쓰는 것이 괜히 멋쩍어 나쁜 조건만 적어놓고는 ‘이런 사람이 있는데 어떡할까요’ 라며 편지를 보냈더니 어머니의 답장이 왔다. “상이 보아라. 너는 내 딸이니까 내가 잘 안다. 너는 공부는 A지만 신붓감으로 B다. 내가 보기에 네가 쓴 불평은 불평이 아닌 것 같다. 나이가 찼으니 결혼하거라.” 박준서의 집에서도 유학 간 아들이 혹 서양 여자와 결혼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에 이미 서울에서 얼굴 본 적이 있던 한국 여학생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흔쾌히 승낙했다.


어떤 점에서 ‘이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할 만하다’고 느낀 건가요.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었어요. 한 번 약속을 하면 어길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저희가 그때는 같은 학문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문의 동력자, 동지로서 평생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한 거죠.



누구에게나 내적으로 빛나는 순간이 있다고 하잖아요. 장 후보와 함께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있다면 언제인가요.

함께 공부하던 그 시절, 그때는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참 고생을 많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행복한 시기였던 것 같아요.(웃음)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기도 했고요. 첫아이를 낳으니까 경제적인 사정이 더 어려워졌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가까워지더라고요. 왜? 놀러도 못가니까. 돈이 있어야 놀러 다니죠. 하하. 저희는 미국 구경해본 곳이 별로 없어요. 되돌아보면 참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자제분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아들이 둘인데, 첫째는 LA에서 원래 컴퓨터를 공부하기로 했는데 지금 드라마, 연극을 하고 있어요.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이라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죠. 그러나 연극 좋아하는 사람은 말리려 해도 못 말려요.(웃음) 둘째 녀석은 미국하버드대학에서 신학으로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학에서 신학석사를 마치고 하버드로 간 겁니다. 그런데 둘 다 미혼입니다. 좋은 분 있으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저희 부부가 많은 분들을 소위 중매를 해드렸는데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하하.


두 분이 즐기는 취미는 뭐가 있는지요.

대단히 곤혹스런 질문입니다. 둘이 무취미가 취미가 됐어요. 실망되시겠지만.. 하하하... “그래도 취미가 있을 거 아닙니까”라고 하신다면 그저 책 읽는 거예요. 시간 남으면 책 읽는 것. 가장 평범한 대답이죠. 독서.



학계 은퇴 이후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 밝혀주세요.

많습니다. 제가 아직 철이 없어 그런지 몰라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대학에서 행정을 많이 하느라고 학문에 정진을 못했어요. 그래서 아직 머리가 돌아갈 때 학문을 좀 정리해야겠다 싶고... 그 다음이 집필활동이죠. 책을 좀 써야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퇴라는 말은 싫어해요. 은퇴라는 건 숨을 ‘은’에 물러날 ‘퇴’자 아닙니까. 물러나서 숨어라 인데 ‘퇴임’이란 말이 더 좋을 것 같네요. 자기 임무에서 물러난다...지금 고령화 사회가 되었는데 나이 든 사람도 원하면 봉사활동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상당히 좋은 경험을 가진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어떤 의미에선 국가적으로 낭비인 거죠. 그분들이 생산적으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사회시스템이 좀 더 갖춰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축구용어로 하면 후반전 아니겠습니까. 후반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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