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엔테테이너,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②
피아노의 엔테테이너,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②
  • 소혁조
  • 승인 200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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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혁조의 인터미션


[인터뷰365 소혁조] (계속)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예술인들 중엔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독특한 정신세계와 기이한 행동을 하는 괴벽을 가진 이들이 많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런 괴벽적 자아에서 예술적 영감이 솟아 오르는 것 같다. 호로비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대단히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였고 이러한 성격을 대중들에게 내비치며 대중들을 애타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활용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그 사례를 하나씩 살펴보면


1. 난데없는 네 번의 은퇴와 번복 2. 피아노를 직접 갖고 다니며 연주회를 가졌던 유일한 연주자. 그는 자신의 전용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니며 해외공연을 다녔다. 3. 연주회 시간은 언제나 일요일 오후 4시였고 4. 그가 가는 곳엔 항상 그의 전속 요리사를 대동했다. 심지어 마시는 물마저도 까다로워 정수기를 갖고 다녔다. 5. 뿐만 아니라 단 며칠간 머무를 호텔방도 그가 원하는 식으로 완벽하게 리모델링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는 호로비츠가 자신의 연주를 기대하고 오는 수많은 청중들에게 자신의 베스트를 보여주기 위해 가질 수 있는 특권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전용 피아노만이 최상의 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육식을 하지 않기에 전속 요리사가 필요했고 다른 나라에 가서 몸에 맞지 않는 물을 마셨다가 배탈이 나면 큰일이 날 수도 있기에 정수기를 갖고 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연주회 시간을 일요일 4시로 고집했던 것엔 그 시간대가 청중들이 가장 여유롭게 연주회를 찾아올 수 있다는 배려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어린 아이와도 같은 까다로운 성격들은 호로비츠가 들려주는 최상의 연주에 모두 상쇄되었다. 그만큼 그의 연주회는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확실히 호로비츠는 레코딩보다는 라이브에 무척 강한 연주자였다.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압도적인 힘의 타건과 살인적인 기교. 그의 연주회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뭐라고 표현하기도 힘든 충격에 휩싸였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의 라이브 음반을 듣고 있는데 정말 사람이 이런 연주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아노가 부서지게 내리치는 압도적인 소리에 깜짝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을 깜짝 놀라고 있노라면 청중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어김없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의 명성을 얻고 살았던 동시대의 연주자들의 행적과 비교해볼 땐 너무 튄다는 생각을 쉽게 지우기 힘들다. 리히터는 소련의 전역을 돌며 어렵게 사는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교회의 낡은 피아노로 연주회를 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 호로비츠와 함께 미국을 대표했던 피아니스트이며 쇼팽 연주의 대가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은 항상 사람들을 상대할 때 밝고 겸손했으며 편안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175 센티의 작은 체구의 사나이. 어릴 적엔 꽤 부유하게 컸으나 집안이 바로 풍비박산이 나서 생계를 위해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연주회 개런티로 의식주만 해결되면 대만족이었을 정도로 어렵게 살았던 소년 시절. 그리고 일신의 성공을 위해 조국을 떠나 해외로 건너가 자신만의 신화를 이룩한 입지전적인 인물. 이처럼 자수성가형의 인물들은 자신도 잘 모르는 자신만의 에고(ego)에 갇혀 사는 경향이 알게 모르게 존재한다. 호로비츠도 바로 그런 부류가 아니었을까? 온갖 고생을 하며 이 정도의 성공에까지 이른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해서 자신의 어둡고 고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가 작용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고향으로의 61년 만의 귀향


1925년에 러시아를 떠난 호로비츠. 그는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일신의 성공을 위해 고국 러시아를 떠나야만 했고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한 피아노 스타가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고국의 풍광과 남겨둔 가족들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그때까지 걸렸던 시간이 무려 61년이었다.

61년만의 귀향. 러시아를 떠난 호로비츠가 다시 러시아에 돌아와 연주회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최대 이슈거리였는데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냉전체제를 대표하는 양대강국인 미국과 소련은 국방, 과학, 경제, 문화, 체육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우주선 발사도 그랬고 올림픽 종목에서 소련과 미국의 1, 2위 다툼이 항상 그랬다. 음악 또한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많은 예술가들을 정책적 선전용으로 서방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하이페츠와 함께 세계 바이올린계를 양분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강철타건의 대명사 에밀 길렐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명지휘자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첼로의 로스트로포비치 등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이 대열에 합류하여 서방세계에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며 전세계적인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소련의 훌륭한 예술가들에 비해 미국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럽의 예술가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라흐마니노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야사 하이페츠,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과 아르투르 루벤스타인,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정도였다.


미국으로선 자국에서 탄생한 예술가들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 보다는 동구권을 비롯한 유럽에서 망명한 예술가들이 미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안전한 비호를 받으며 뛰어난 예술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호로비츠였다.


호로비츠는 러시아 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니 소련군부의 입장으로 보았을 땐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이나 미국의 입장으로 보면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알리는데 이보다 더 좋은 선전효과용 예술가는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산 원석. 미국으로 와서 세계 제일의 보석이 되다. 바로 이런 이미지, 선전용 문구가 가능하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러시아가 싫어 미국으로 온 사람. 그리고 미국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우수한 예술을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사람. 미국으로 봐선 정치적 선전용의 환상의 꽃놀이 패가 바로 호로비츠였던 것이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집권 이후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급격한 개혁과 개방의 물결을 맞게 되고 서방세계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해빙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6년엔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힘입어 드디어 호로비츠의 역사적인 귀향 연주가 성사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반세기를 통해 계속 되어야 했던 이념간의 갈등이 빚어낸 냉전체제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의 시초가 되기 때문인 것이다. 영화 쉬리에 나오는 대사처럼 오욕의 세월은 가라~ 분단과 질시의 세월도 가라~ 의 분위기가 된 것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양 강대국에서 태어났고 성장하고 성공하여 불세출의 신화를 창조했던 80세 노년 피아니스트의 역사적인 귀국 공연. 이 공연은 예술적인 평가를 떠나 지극히 감동적일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는 미국과 소련 정부의 입장에서도 예술을 이용한 대국민 홍보에 안성맞춤이었음은 틀림없다.


당시 이 공연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처럼 잘 편집되어 DVD로 판매하고 있다. 호로비츠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보여주고 그가 얼마나 조국을 그리워하는지, 조국에 돌아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러시아 국민들이 얼마나 환호하며 환영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으며 연주회장의 그 감동적인 분위기도 잘 나타내고 있다.


호로비츠가 러시아에서 귀국연주회를 가졌던 것을 보도하는 타임誌 커버의 선정적인 문구에서 읽을 수 있듯이 오랜만에 가진 형제간의 만남을 지나치게 미화시켜 선전용으로 써먹고자 한 미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61년만의 감격스러운 귀국연주회를 마친 호로비츠는 그 후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각광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은 거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그가 묻힌 곳은 그의 조국 러시아도 아니었고 그의 성공을 열어준 제2의 조국인 미국도 아니었다.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었던 그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동반자이며 스승이었던 장인 토스카니니가 묻혀있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에 그의 장인과 함께 묻히게 되었다.


호로비츠가 남긴 음악


호로비츠는 가는 곳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했던 피아니스트였음은 분명하지만 그가 남긴 음악에 대한 평가는 그의 인기만큼이나 높은 것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위대한 예술가를 판단하는 세 가지 기준(곡의 완벽한 해석, 대중적 흡입력, 다양한 레퍼토리)을 놓고 판단해 볼 때 호로비츠는 여러모로 허점을 보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치명적인 결점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레퍼토리의 편협성이다. 호로비츠가 주로 다루었던 레퍼토리를 살펴보면 쇼팽, 슈만,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등이다. 이 중에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그가 평생을 두고 가장 잘 연주했던 주요 레퍼토리였고 라흐마니노프 역시 그렇다. 특히 3번 협주곡은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어렵기로 소문난 곡인데 호로비츠는 이 곡을 두고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을 위해 만든 곡이라며 자신감을 보였고 그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모든 음반은 이 곡을 대표하는 명반 중의 명반이다.


그 외에 그가 어린 시절 큰 영향을 받았던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의 곡이 있는데 만일 그가 연주하지 않았더라면 스크리아빈이라는 작곡가의 이름조차 생소했을 정도로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널리 알린 점은 그가 남긴 최고의 업적으로 인정 받는다. 그 외에 쇼팽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고 리스트의 곡을 자주 연주하는 편이었다. 또한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같은 고전파 작곡가들의 곡도 간혹 연주하기도 했으나 주목 받을 만큼은 아니다.


호로비츠의 치명적인 결점 중의 결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베토벤이다. 그는 베토벤을 잘 연주하지 않았고 베토벤 연주에 있어선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피아니스트로서 진정한 거장 중의 거장이 되기 위한 관문인 베토벤을 잘 연주하지 못했다는 것. 이는 교회의 목사가 성경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좋지 않은 평가이다.


또한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스페셜리스트이면서도 쇼팽의 연습곡마저 전곡 녹음을 하지 않았고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소나타, 협주곡 등 그 어느 것도 전곡녹음을 한 적이 없다. 이런 그에게 위대한 거장이라고 쉽게 부를 수 있는가에 하는 점이 항상 논란의 쟁점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호로비츠는 그 누구보다도 라이브에 강한 연주자였다. 라이브에서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능력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였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니, 호로비츠 이후에 등장한 그 누구도 호로비츠만큼의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호로비츠의 음악성에 논란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만의 매력이다.


젊은 시절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압도적인 기교와 힘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피아니스트가 된 사나이. 그리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눈물의 귀국연주회를 할 수 있었던 그 사나이. 어린 아이처럼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피아노 앞에 앉아 있으면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것 같은 환상적인 멜로디를 들려준 그 사람. 그렇게 온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든 사람. 우리는 호로비츠를 그렇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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