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4)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4)
  • 임정진
  • 승인 200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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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24. 무전유죄, 유전무죄?



선도 위원회의 분위기는 상당히 강경하게 흘렀다.

「마땅히 퇴학시켜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동기야 어떻든 교내에서의 폭력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잠자코 상황을 살피던 윤리 선생이 얘기를 했다.

「이제 막 신흥 명문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학교의 입장을 봐서라도 처벌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죠. 결과만 가지고 처벌을 운운할 게 아니라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도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감 선생이 정 선생 말을 두둔하며 나섰다.

「정 선생 말이 옳아요. 가해자나 피해자나 어느 한쪽만 두둔하고 공격할 게 아닙니다. 객관적인 눈으로 상황을 재점검해 봅시다.」

그러나 강경파 선생들의 그렇지 않았다.

「아니 정 선생은 지금 폭력을 옹호하자는 얘깁니까? 요즘 애들이 어떤 애들인지 아세요? 국민 학생들이 100원 안준다고 친구를 때려서 논바닥에 암매장하는 세상입니다. 오죽하면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10대들에게 야간 통금령을 내리자는 얘기가 나오겠습니까?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면 학생들은 은연중에 폭력으로 일을 해결해도 뒤탈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러면 누가 알아요? 일본처럼 학생이 교사를 때리고 심지어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질지... 제가 극단적인 예만 든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번 일 같은 것이 생기다 보면 그런 끔찍한 일도 벌어질 수 있는 겁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겁니다. 폭력에 한번 맛을 들이면 점점 강도가 세어지는 법이에요.」

정 선생은 어떻게든 창수를 구해 주고 싶었다.

「물론 선생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제 얘긴 폭력을 허용하고 옹호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십대들의 속성 중엔 때로 이성으로 지배할 수 없는 우발적인 충동이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누가 이해해 줍니까?」

「바로 정 선 생과 같은 그런 무책임한 생각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정 선생 같은 편견에 가까운 이해심이 아이들에게 진정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을 자극하고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는 겁니다. 친구를 때리고 교사를 우습게 알던 아이, 좀 있어 보세요. 화염병 던져요. 그러다간 자기 말 안 듣는 사람은 다 때려서 의견 통일 보려고 할겁니다. 텔레비전들 보셨죠? 유흥가 세력 다툼한다고 사람 죽이고도 경찰서 와서 고개 빳빳이 쳐들고 멀뚱멀뚱 카메라 쳐다보는 거.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라요. 교내 폭력을 허용하는 건 우리 교사들이 폭력 사회를 만드는데 협조하는 겁니다.」

교장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더니 담인 선생의 의견을 물었다. 담임은 이런 회의가 열린 것부터가 불명예스러웠다.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어떤 결과가 되든 저는 학교 방침에 따르겠습니다.」

교장은 학생 주임 박 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태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학생 주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박 선생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있자니 평소의 느낌과는 달리 많은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척 감동스런 회의였습니다.」

박 선생은 겸연쩍어하는 몇 선생들을 쳐다보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가해자인 학생의 이름은 손창수. 피해자인 학생의 이름은 강문도입니다. 강문도의 아버지는 저명한 인사로 이름만 들어도 대충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우리 학교 육성 회장으로 매학기 적지 않은 돈을 내어 학교 운영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손창수의 아버지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꺼려해서 주눅 들어 보이는 구청 청소부 직원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려는 거요?」

「그게 이 문제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박 선생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상관이 있죠. 이번 일은 회의를 할 만한 성질의 것도 못 됩니다. 학생들끼린 때로 싸울 수도 있고 집단 구타가 아닌 다음에야 서로 화해시키고 반성할 기회를 준 다음 넘어갈 수도 잇는 겁니다. 그리고 동기도 우리 모두 납득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아마 나라도 주먹을 휘두르게 되었을 겁니다. 도대체 그 나이의 아이에게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십니까? 돈을 훔쳤다고 의심을 받는 일이, 더구나 집이 가난하니까 그랬을 거라고 의심받는 일이 얼마나 그 아이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문도도 양호 선생 말로는 그다지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학교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비상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창수 아버지가 국회의원이고 문도 아버지가 청소부였다면 이렇게 되었을까요? 문도가 가해자고 창수가 피해자였다면 이랬을까요? 의심스럽군요. 우린 지금 형평을 잃고 있습니다.」

「박 선생, 그건 당신의 편견일 뿐이요.」

교장 선생님은 약간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박 선생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럴까요? 여러분들의 편견이 아니라 제 편견 때문일까요? 담임선생님이 회의 시작 전에 잃어버린 돈이 돌아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다행히 돈을 찾았으니 창수는 누명을 벗었습니다. 오늘 창수는 오지도 않았으니 돈을 돌려줄 수가 없을 테니까 누군가 다른 학생의 소행이라는 게 증명된 셈이죠. 돈을 잃어버린 그 시간에 창수는 배가 고파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해보셨습니까? 어떤 학생이 어떤 환경 속에서 살고 있으며, 무슨 고민을 하고 있고 과연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원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저도 우연한 기회에서 창수의 환경과 고민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습니다. 공부 잘하고 집안이 좋은 학생들에게만 관심을 갖고 창수처럼 정말 어렵게, 고생스럽게 사는 아이들에겐 무관심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박 선생은 자기가 너무 길게 말했나 싶어 다른 교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강경했던 교사들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져 있음을 보고 용기를 얻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창수의 문제가 일방적인 학교의 체면이나, 형식적인 처벌만으로 해결된다면 창수도 그 벌을 달게 받을 겁니다. 물론 저도 같은 입장이 되어서 말입니다.」

잠시 회의는 정적에 빠졌다.


그 시간에 창수네 교실에서는 임시 학급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영어 선생이 갑자기 사표를 내는 바람에 뜻하지 않은 자습 시간이 생긴 것을 회의 시간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어머니를 뿌리치고 학교로 나온 문도도 학급 회의에 참석했지만 창수는 없었다.

반장이 앞으로 나왔다.

「잘 알고 있다시피, 지금 선도 위원회에서 창수의 퇴학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좀 건방질진 모르지만 우리의 입장도 선생님들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어 회의를 열게 된 것입니다. 민자의 돈은 돌아왔고 창수의 누명은 벗겨졌지만 창수가 문도를 때린 일을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부반장 효석이가 손을 들었다.

「반장 말대로 창수는 분명히 돈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도는 증거도 없이 개인감정으로 창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고자질을 한 것입니다. 마약 누명을 쓰고 주먹을 휘두른 창수가 퇴학이나 다른 어떤 처벌을 받는다면 문도도 마땅히 같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부반장은 기가 죽어 있는 문도를 째려보고는 앉았다. 그러자 촉새가 벌떡 일어섰다.

「그건 말도 안됩니다. 문도가 담임께 말씀드린 건 창수가 분명 체육 시간에 자리를 이탈했다는 것이었지, 돈을 훔쳤다고 고자질한 건 아니었습니다. 친구를 이 지경으로 만든 창수는 꼭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촉새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봉구가 자기 주먹을 쓰다듬으며 외쳤다.

「어이구, 저 자식도 같이 얻어 터져야 하는 건데...」

「맞아.」

천재도 한몫 거들었다.

소연이가 일어섰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창수에게 무관심했고 업신여긴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언제나 초라해 보이고 주눅이 들어 있는 창수의 모습 때문이었죠.」

달중은 소연이가 울먹이며 앉자 자리에 앉은 패로 말했다.

「맞아, 문도 저 새끼가 나빴던 거야. 이 일은 다 저 새끼땜에 일어났어. 짜식 잘 났으면 자기 아버지가 잘난 거지, 지가 잘난 거야?」

「굳, 마음에 들어. 대사 좋았어.」

천재가 맞장구를 쳤다. 촉새가 불쾌한 표정으로 다시 일어서려는데 문도가 촉새를 끌어당겼다.

「가만있어, 임마 넌 지금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종례 시간에 담임은 나쁜 소식 한 가지와 좋은 소식 한 가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창수의 처벌은 일단 보류되었다. 창수가 정상적으로 등교를 하고 개인적으로 문도에게 사과를 하기만 하면 아마 처벌을 없을 것 같다. 물론 반성문은 몇 장 써야 되겠지만. 혹 창수를 만나면 학교에 나오라고 말하도록.」

담임은 뒤돌아서서 칠판에 학기말 고사 일자와 과목별 시간표를 적었다. 아이들은 묵묵히 받아 적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담임은 무겁게 입을 떼었다.

「마침내 고2의 절반을 결산하는 날이 정해졌다. 물론 어제 우리 반에서 벌어졌던 불행한 일 때문에 여러분들의 기분이 정상이 아닌 것은 잘 안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한 가지만 충고하겠다. 너희들이 감상에 젖어 시간을 허비한다면 너희를 제외한 타 학급의 학생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내신성적이란 2학년 전체에서 각자의 취치를 나타내는 것이란 걸 명심해 주기 바란다.」

아이들은 모두 마음이 언짢았다. 담임선생인들 저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을텐데... 짐작은 하지만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다. 담임은 아이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음을 가슴 아파했다.

「이상.」

반장이 힘없이 일어섰다.

「차렷, 경례.」

아이들은 인사말도 없이 고개만 숙였다. 담임은 서둘러 교실을 빠져 나왔다. 더 이상 아이들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창수가 다신 학교에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들 이런 상황에서 학교에 오고 싶어 하고 싶을까, 나 같으면 그런 누명 쓰면 학교에 불 질러, 창수는 죽고 싶었을 거야. 창수는 손 다친 거 치료나 받았을까 하며 수군거렸다.

봉구와 천재는 창수네 집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달중도 얘기를 듣더니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수업이 다 끝나고 셋은 담임선생에게 들러 창수의 주소와 약도를 얻었다. 교문을 나서려는데 문도가 서 있다 봉구를 불렀다.

「문도잖아? 저 새끼 왜 자가용 타고 집에 안 가고 저기 서 있냐?」

천재가 중얼거렸다. 셋은 문도 앞에 섰다.

「저... 너희들 창수네 집에 간다길래... 나도 가려고... 기다렸어. 내가 사과해야 창수가 학교 나올 거야. 같이 가게 해줘.」

달중과 봉구, 천재는 문도의 뜻밖의 제의에 어리둥절했지만 문도의 말이 진심임을 깨달았다. 문도의 눈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넷은 함께 창수네 동네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집 찾는 데는 귀신이라며 큰소리를 땅땅 치던 달중도 미로 같은 산동네에 오르자 더 이상 큰소리를 칠 수 없었다. 약도를 들여다봐도 거기가 거기 같기만 했다. 넷은 비탈을 올라오느라 기진맥진했다. 달중은 약도를 계속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근처 인 것 같은데? 흩어져서 5분 동안 찾아보고 다시 모이는 게 어때?」

「근데 창수가 집에 없으면 어떡하지?」

봉구는 목이 말라 간신히 침을 삼켜 가며 말했다. 천재 역시 우람한 체구를 끌고 오느라 연신 육수(?)를 흘려댔다.

「집에 없으면 또 찾아 나서야지. 어떻게 해서든 찾아야 돼. 걔 이번 시험 못 치면 정말 퇴학이야.」

천재는 말을 끊고 멈춰 섰다.

「야, 좀 쉬었다 가자. 힘들어 돌아가시겠다. 정말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는 줄 몰랐어.」

천재의 말에 모두 담에 기대어 섰다. 잠시 쉰 후 다시 찾기로 했다.


은주는 집에 돌아가서 창수가 어떤 애였는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얼굴과 이름만 기억할 뿐 창수와 한 번도 얘기해 본 적도, 마주서 본 적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보니 짝인 소연이 외에는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음을 깨달았다. 누가 무얼 좋아하는지, 무슨 특기가 있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단지 아는 것은 반에서 10등 안에 드는 아이들의 석차 정도였다. 은주는 창수가 설사 퇴학을 당한다 하더라도 동정할 자격도 없었다. 알지 못하는 아이가 퇴학당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아이가 굶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주에게는 하나도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 일일 뿐이었다. 은주는 한반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가장 소중한 시절을 나누고 있는 친구들에 대해 아무 느낌도 없음이 슬펐다.

「무슨 생각 하니?」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있는 은주에게 은주 어머니가 다그치듯 물었다. 은주는 창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해봤자 어머니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는 일일 테니까.

「학기말 고사 시간표 발표됐어요.」

「그래? 그럼 또 오늘부터 엄마도 비상이구나, 알았다. 계획 잘 세워서 공부해라.」

어머니는 한약을 달이러 부엌으로 갔다. 그런데 은주가 쪼르르 쫓아나갔다.

「왜? 먹을 거 줄까?」

「아뇨. 집에만 오면 한약 냄새가 나서 골치가 아파요. 온 집안이 한약 냄새잖아요. 꼭 환자가 있는 거 같아서 싫어요.」

「그래? 알았다. 한약방에서 달여 오지 뭐. 요샌 다 달여서 조그만 병에 밀봉해서 담아 준다더라. 냉장고에 넣어 놓고 하나씩 데워 먹이면 된대.」

「근데 왜 진작 그렇게 안하셨어요?」

「한약은 정성이 있어야 한다길래 그랬지. 은주 너한테 조금이라도 더 좋으라고 내가 직접 달인다고 그냥 가져 온 거야.」

은주는 약탕기를 한번 쳐다보고 자기 방으로 왔다. 종이를 꺼내 시험 준비 계획을 간단히 썼다. 창수 생각을 하니 시험공부를 시작할 기분이 안 들었다.

(창수는 학교에도 오지 않고 어디로 간 걸까? 학교에 안가도 엄마가 뭐라고 안 하는 모양이지? 학기말 고사 전에 학교에 올까? 그때까지도 안 오면 퇴학이라는데, 퇴학당하면 어떻게 될까? 검정고시를 보게 될까?...)


간신히 창수네 집을 찾은 달중, 봉구, 천재, 문도는 열려진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손바닥만한 마당에는 수도꼭지가 달랑 서 있었다. 빨랫줄에는 주황색 청소원 작업복이 널려있었다. 조심스레 방문 앞으로 다가가서 창수를 부르려는데 안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나와 넷은 눈이 휘둥그레져 그냥 서 있었다.

「창수 어머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창수는 꼭 학교에 다시 나와야 합니다.」

방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천재가 작게 말했다.

「칠뜨기잖아? 여긴 웬일이지?」

봉구가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가락을 대어 보였다. 넷은 귀를 기울이고 방안의 대화를 들었다.

창수 어머니는 죄진 사람처럼 어쩔 줄 몰랐다.

「면목이 없구만유... 보낼 형편도 못 되지만 갸도 통 갈 마음이 없는것 같구... 이렇게 누추한 데까지 오셨는데 대접할 것도 없으니 죄송스러워서 어쩌...」

「창수 어머니, 창수가 지금 학교에 다시 안 나오면, 그렇게 되면 겨우 바로잡아 놓은 아이가 다시 나쁜 길로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학비 문제는 걱정 마시고 꼭 학교에 보내 주십시오.」

「... 참마로 고마우신 말씀이지만... 갸가 갈려고 할는지 모르겠네유. 게다가 집에도 들어오지 않으니...」

창수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창수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보더니 창수 아버지는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선상님, 다 이 무능한 애비 탓입니다. 남들처럼 호강은 고사하고 죽도록 고생만 시킵니다 그려. 애비를 잘못 만나서 애가 그 꼴이 되었으니 이 죄를 어찌 다 갚습니까? 어휴, 그 고생도 모자라서 이젠 쓰레기차까지 끌게 하니 어린놈이 집엔들 들어오고 싶겠습니까? 다 이 못난 놈 탓입니다.」

창수 아버지도 울먹이기 시작했다. 박 선생은 어떻게 창수 부모를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빗물로 얼룩진 벽지만 쳐다보았다. 밖에서 듣고 있던 넷도 마음이 몹시 심란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창수가 집에 오면 꼭 학교에 보내십시오. 저도 창수가 갈 만한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박 선생이 일어나는 기척이 보이자 넷은 얼른 대문 밖으로 나가 담 뒤에 숨었다. 박 선생이 저만치 내려가는 것을 보고 넷도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창수네 집에 들어가 봐야 자기들이 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동네를 내려오다 봉구가 갑자기 팔꿈치로 천재의 불룩 나온 배를 쳤다.

「욱」

천재가 그 자리에 주저앉자 달중과 문도가 쳐다보았다.

봉구가 태연하게 계속 걸어갔다. 천재가 벌떡 일어나 봉구를 따라붙었다.

「야, 왜 그래? 나한테 뭐 섭섭한 거 있냐?」

「너 공부 열심히 해,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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