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얼굴이 유명한 상궁연기의 달인 장희진
이름보다 얼굴이 유명한 상궁연기의 달인 장희진
  • 김두호
  • 승인 200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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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언제나 스탠바이 상태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탤런트 겸 영화, 연극배우 장희진. 인터넷 검색창에서 뜨는 이름은 온통 새파란 젊은 탤런트 장희진이다. <인터뷰 365>가 만난 탤런트는 1983년생 장희진이 아니고 1944년생 장희진이다. 동명이인 두 사람이 모두 연기자라는 데서 혼란이 생긴다. 사람들은 노(老) 장희진의 이름을 잘 모른다. 그런데 얼굴을 보면 금방 안다.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마주친 낯익은 얼굴 덕분이다. 길에서 그와 마주치는 사람들도 이름을 기억 못하고 얼굴만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한다.


장희진은 스스로도 TV사극드라마에서 상궁 배역의 전문 연기자라고 자랑한다. <조선왕조 5백년> <대원군> <자고가는 저구름아> <왕과 비> <명성황후> <태조 왕건> <장녹수> <대조영> 등등 그녀가 상궁으로 출연한 드라마는 한참을 헤아려야 한다. 왕이나 왕비 곁에서 머리를 숙이고 시중을 드는 상궁역은 그야말로 조명의 음지에서 잠깐씩 얼굴을 내미는 조연 배역이다. 그러나 드라마 작가나 캐스팅을 하는 연출자는 대궐을 무대로 한 사극 드라마일 때 주인공이 정해지기도 전에 장희진을 먼저 상궁으로 배치해둘 만큼 캐릭터가 상궁으로 못이 박혀 있다.


상궁역 못지않게 어머니 역할도 단골이다. 나쁜 엄마와 좋은 엄마, 고전적인 엄마와 현대적인 엄마 등 가리지 않고, 마다하지 않고 주는 배역을 덥석덥석 잘 챙겨 쉬는 날이 많지 않게 바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스탠바이(Stand By 출연준비 지시 언어) 상태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목소리가 경쾌하고 즐거워 보인다. 연기를 하며 사는 것이 행복해 보인다. 스타소리를 듣지 못하는 연기인이지만 항상 시간과 인간관계의 중압감 속에서 표정이 밝지 못한 주연 연기자보다 그녀가 더 기름진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인기의 커튼 뒤켠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연기인 장희진의 인생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자.



만나고 보니 정말 낯익은 얼굴로 친밀감이 간다. 출연한 드라마를 많이 보았다. 과거 KBS-2TV <사랑과 전쟁>에서 며느리를 다그치는 시어머니역이나 어머니역으로 많이 출연하지 않았는가?

나쁜 엄마역만 기억하는 것은 서운하다. 자상하고 따뜻한 어머니역도 많이 연기했다. 어머니 배역보다 내 주특기는 상궁마마 연기다. <조선왕조 5백년>을 비롯해 왕이나 왕비가 나오는 사극에서 상궁역은 빠지지 않고 출연해 대본이 없어도 흐름에 맞추어 분위기를 잡아갈 수 있다.


상궁연기의 달인이라고 해도 되는가?

연기에도 달인이란 말을 쓴다면 내가 상궁연기의 달인이다.


그동안 상궁으로 출연한 작품이 몇 편쯤 되는가?

일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젊을 때부터 사극에 거의 빠지지 않고 나왔다.




상궁 연기 중에 추억으로 남아 있는 일화가 있는가?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배역의 작품이 있다면?

<장녹수>에서 제조상궁으로 출연했을 때 타계하신 이낙훈 선배가 내시 김처선으로 나왔었다. 나는 그를 먼 벌치에서 사모의 눈길로 바라보며 짝사랑을 하는 역이다. 상궁은 왕의 손길을 평생 간절히 기다리며 사는 외로운 여자다. 평생 하룻밤도 왕을 모시지 못하고 마음을 태우며 늙는 상궁들이 참 많을 것이라는 감정을 연상해 가며 내시 처선을 연모하는 상궁역을 내 나름으로 깊이 있게 소화해 냈다. 물론 잘했다는 찬사도 많았다. 천둥소리가 치는 밤에 소리없이 연모의 정을 달래는 잠깐씩의 연기를 위해 2시간 이상을 떨며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상궁 역은 대사가 없는 단역 정도의 연기도 하게 되는데 때로는 연기자로 불만도 따르겠다.

프로 연기자에게는 작은 연기자는 있어도 작은 역할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젊을 때는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 악역 같은 것은 피하고 싫었다. 지금은 악역도 연기라면 연기자는 기꺼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영국의 전설적인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1907-1981)는 왕으로만 출연한 것이 아니고 어린이 납치범 악당역도 보여주었다. 그의 양손에는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상과 골든라즈베리 시상식 최악의 남우주연상이 함께 쥐어져 있었다.


연기자로서의 프로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언제부터 연기를 시작한 것인가?

나는 서울 계성여고 졸업반 시절에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내 학교친구의 아버지가 연극연출가 이원경 선생이었다. 1963년 <지평선 넘어>라는 연극무대를 경험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3년 프랑스 작품으로 김명일 연출의 <대왕 죽어가다>부터였다.

1982년에는 <노녀들의 발톱>으로 동아연극상을 수상했다. 연극은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천일의 앤>은 내 대표작 중의 하나다. 1980년에 체홉의 <벚꽃동산>, 2007년에 <달님은 예쁘기도 하셔라>, 얼마전에 뮤지컬 <넌센스>에 출연했다.


오히려 TV연기보다 연극배우로 더 화려한 길을 걸어온 것 아닌가?

원로 영화배우 최은희여사가 우리 이모다. 우리 엄마의 친동생이다. 아마도 내가 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잡고 간혹 이모의 연극무대를 찾아다닌 데서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언젠가는 나 혼자 책가방을 끼고 몰래 이모의 연극을 보러갔다가 객석에서 나를 발견한 이모가 엄마에게 일러 혼이 난 일도 있다.


최은희 여사와 그토록 가까운 혈연관계라면 함께 겪고 나눈 일화도 많을 것 같다.

그렇다. 이모가 설립한 안양예술고등학교에서 연기지도 교사로 근무도 했고 납북되시면서 버려진 극단 배우극장의 운영을 맡아 1978년부터 16년간 대표로 활동했다. 연극도 많이 제작했지만 한번 수익을 올리면 네 번 정도 손해를 보는 어려움으로 고생도 했다.




TV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1980년 KBS-TV <토지>부터 꾸준히 출연해왔다. 특히 <토지>에서는 비중이 큰 석이네 엄마역을 맡아 2년6개월간 매달렸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젊었고 촬영으로 겪는 고생을 보람으로 생각했다. 작품의 무대인 경남 하동에 오픈세트를 짓고 카메라가 돌아갔다. 주요 출연진과 함께 서울에서 심야에 출발하는 침대열차를 타고 내려가 촬영을 하면 사천비행장에서 항공편으로 서울에 오는 일정을 반복하며 참 즐겁게 연기활동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1981년 <물망초>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그 때는 TV드라마의 제작물량이 많아 겹치기 출연도 많았다.


연기활동이 아내나 엄마역할 등 가정생활에 부담을 준 일은 없는가?

나는 대학시절 이모부가 되는 신상옥감독의 영화사 연출부에서 스크립터로 활동했다. 그때 알게 된 감독과 1966년 결혼해서 남매를 키우고 1983년에 헤어졌다. 남편과 결별하기는 했지만 연기활동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여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국문과에 진학해 2학년을 수료하고 결혼과 함께 학업을 중단했다가 뒤에 명지대로 옮겨 대학을 졸업했다. 우리 아이 중 딸은 결혼해서 학원강사로 활동하고 아들은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이유를 물어도 되는가?

자식들과 함께 살아 독신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쉬지 않고 연기활동을 해온 내 인생은 언제나 스탠바이 상태다. 비중이 큰 배역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출연기회가 많고 다양한 연기 경험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지금도 이모인 최은희 여사와 자주 만나는가?

살고 계시는 방배동으로 자주 찾아뵙는다. 휴일은 모시고 성당엘 간다. 간혹 미국도 모시고 다녀온다. 전화를 드리면 언제 올 거냐는 말씀부터 하신다. 고교를 졸업하고 한 때 이모집에서 살며 정이 많이 들어 조카를 편하게 생각하신다.


영화도 출연 작품이 있는가?

젊을 때 연극을 해서인지 TV드라마보다 영화 연기가 내 몸에 더 맞는 것 같다. 간혹 출연을 해왔다. 2년 전에도 <초승달과 밤배>에 출연했다. 드라마는 주로 고정된 세트시설에서 연속성을 유지해 가며 연기를 해야 하므로 싱거운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영화는 장소와 동작에서 한 장면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분위기 때문인지 카메라 앞에서 흥분할 때가 많다.


비중이 크지 않은 배역으로 개런티에 불만은 없는가?

연기자는 등급이 정해져 있어서 불만을 가질 수 없다. 단지 드라마가 대부분 젊은 시청자를 의식해서 만들고 출연자도 젊은 연기자 중심으로 제작해 소외감을 가질 때가 없지 않다. <가문의 영광> 같이 연령층이 다양하게 출연하는 드라마가 나이든 연기자에게는 호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영옥 선배가 여고 선배 된다. 언제나 나이에 어울리는 좋은 연기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부럽게 보인다.


연기활동 외에 하고 있는 일은 없는가?

살고 있는 고양시에서 가톨릭국악합창단이 구성되어 지난 토요일부터 정기 연주회를 시작했다. 나도 멤버로 참여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씩 단원들과 노래 연습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또 KBS 지하 체육관에서 연기자 댄스동우회가 만들어져 틈틈이 취미생활을 하고 있다.


시종 즐거워 보인다. 늘 그렇게 웃고 사는가?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나며 살다보니 즐겁게 웃으며 살아야 한다. 식당을 가면 식대를 안받겠다고 해서 억지로 주고 나오지만 나설 때의 기분이 참 즐겁다. 참, 얼마전에 숲해설사라는 자격증을 땄다. 녹지공원 같은 곳에서 방문자들을 안내하고 해설하는 일인데 일산 호수공원에서 국제행사가 열리면 활용할 생각이다.


다시 태어나도 연기자를 선택할 사람 같이 느껴진다.

고교시절에 국립국악원에 다니며 노래와 춤을 배웠다. 다시 태어나도 예술인을 지망하겠지만 배우가 다시 되는 것은 생각해 봐야겠다. 배우가 되어 불편한 것이 많다. 그중에 언제 어디서나 얼굴관리 몸관리에 신경을 쓰고 살아야 하는 것이 가장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그리고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다.




방송국 커피숍에서 만난 그녀는 인터뷰가 끝나고 다음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빠트린 질문이 있다면 전화로 연락 주기를 바라며 주고 간 연기인 ‘장희진’여사의 명함은 사극드라마에서 보여준 상궁배역 차림의 인물 사진이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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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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