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6)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6)
  • 임정진
  • 승인 200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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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16.‘미친 우먼’영어 선생




민호 아버지네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민호 아버지 황 선생은 3학년 담임이라 수학여행을 같이 가지 않았는데 수학여행을 다녀온 2학년들이 하나도 즐겁지 않아 보여 의아했다.

2학년 수업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왜 그런지 물었더니 아이들은 볼멘소리로 너도나도 말했다.

「하나도 안 즐거웠어요. 지겨워 죽을 뻔했어요.」

「5명 자게 된 방에 열두 명씩 자라잖아요. 이불도 모자라고 압사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에요.」

「밥은 완전히 꿀꿀이죽이었어요. 반찬도 너무 형편없구요.」

「전세 버스는 자꾸만 어디 갔다 오잖아요. 우린 버스 기다리느라 반은 허송세월이었어요.」

「다른 학교 애들도 만났는데 돈은 거의 똑같이 냈대요. 근데 걔들은 완전히 호화판이었어요. 모든 게. 우린 거지 같구, 신경질 나서 혼났어요.」

황 선생이 수학여행을 따라갔을 때도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은 더욱 심했던 것 같아 아이들이 딱했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와 수학여행을 따라갔던 김 선생을 만나 보았다.

「김 선생님, 어쨌길래 애들이 하나같이 수학여행에 대해 불만입니까?」

김 선생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겠어요? 이번에 총 인솔 책임자가 교무 주임이었잖아요.」

「해마다 그랬잖아요.」

「근데 이번에 교장이 해외여행 간다잖아요. 전보다 더 많이 뚝 떼어서 여행비 하시라고 보탠 거지.」

「아니, 벼룩이 간을 내먹지...」

「교무 주임이 아부하느라 애들만 고생시켰어요. 애들 보기 미안해서 혼났어요.」

김 선생은 담배를 피워 물고는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며 입을 다물었다.

보름 후, 교문에서 들어오자마자 있는 큰 게시판에는 교장이 로마, 파리, 나폴리, 아테네,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못가본 사람은 알 수 없는 외국 도시에서 찍은 2백여 장의 사진이 빽빽이 붙었다. 사진 전시회는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황 선생은 교장 귀국 환영회식이 <장원갈비집>에서 열린다는 회람을 보고 집에 제사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그냥 집으로 와버렸다. 그날 민호 아버지는 또 술을 서너 잔 마시고야 잠들었다.


성훈은 드디어 자기만의 오디오에 이어 비디오를 쟁취하고 말았다. 은인은 다름 아닌 이었다.

「어머니, 에서도 시험 문제가 나온다는데요?」

「그래. 나도 들었다. 교재 살 돈 달라구? 얼마래?」

「교재가 문제가 아니라 내 방에 우선 텔레비전부터 놓아야 하잖아요.」

「그렇구나. 거실에는 식구들이 왔다갔다하고 시끄러워서 안 될 테고 그렇다고 거실에 텔레비전이 없으면 다른 식구들이 너무 서운할 테고. 알았다. 당장 가서 사오마.」

그래서 14인치 칼라 텔레비전을 책상 옆에 턱 놓고 보니,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격으로 비디오도 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성훈은 어머니가 기분 좋은 틈을 타서 말을 붙였다.

「엄마, 내 통장에 있는 돈 꺼내서 재생만 되는 제일 싼 비디오 하나 살까 봐요.」

「비디오는 왜?」

「안방에 있는 비디오로 예약 녹화되니까 녹화해 놓았다가 새벽에 볼려구요. 그때마다 비디오 들고 왔다 갔다 할 순 없잖아요.」

「그냥 방송할 때 보면 되잖아.」

성훈은 진지한 얼굴로 어머니에게 비디오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독서실에서 한창 능률 오를 만하면 집에 와서 보려고 일어서야 되니까 영 안 좋아요. 그리고 전 새벽잠이 많잖아요. 그래도 텔레비전 보는 건 새벽이라도 눈이 떠지거든요. 그러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늘어나는 셈이에요.」

「알았다. 공부하는 뒷바라지라면야 뭘 못 해주겠니? 아버지께 상의해서 월부라도 들여놓아야지. 그나저나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 오던 그 기집애는 이제 정말 안 만나지?」

「그럼요. 요새 전화 안 오잖아요.」

성훈은 속으로 혀를 낼름거렸다.

(엄마, 그런 봉을 내가 왜 안 만나요. 돈 지가 다 쓰지, 예쁘지, 일류대 다니니까 내 체면도 살려 주지, 테크닉 끝내 주지... 다른 놈은 그런 여자 못 만나서 징징 우는데 굴러온 복을 내가 왜 차요. 내가 대학 가면 안 만나야지. 지금 걔는 내가 고시 공부 하느라 바쁜 줄 아는데 고등학생이라서 그런 걸 알면 기절할거야. 히히.)


봉구는 소연이에게서 최소한의 정보만을 입수한 채 2단계 작전을 꾸몄다. 서무실로 의젓하게 들어가 여직원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무슨 일이야, 학생?」

「2학년 5반 이은주 생활기록부 좀 가져 오시라는데요? 담임선생님이요. 아마 학부형이 오셔서 상담할 때 필요하신가 봐요.」

「그래?」

여직원은 별 의심 없이 서류를 찾아 주었다.

「대신 학생이 책임지고 꼭 반납해야 해. 선생님들이 바쁘셔서 흐지부지 잊어버리고 반납 안 하시면 괜히 나만 곤란해지니까.」

「그럼요. 걱정 마세요. 한 시간 뒤에 다시 갖다 드릴게요.」

봉구는 은주의 생활기록부를 보물처럼 껴안고 서무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주소와 전화번호를 베꼈다.

「응? 아버지 직업이 판사? 어쩐지 애가 귀티가 흐르더라니. 내가 여자 보는 눈은 높아.」

종교란에는 기독교라 써 있었고 다니는 교회 이름도 적혀 있었다. 봉구는 너무 좋아서 화장실 안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일요일 새벽, 봉구는 가방을 들고 몰래 나설 양으로 살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 집안은 조용했다. 발끝으로 조용조용 걸어서 현관 손잡이를 비틀었다.

「봉구얏.」

어머니가 안방 문을 열고 봉구를 불러 세웠다.

「너 새벽부터 어딜 가니? 더군다나 일요일인데.」

「독, 독서실에 공부하러 가요.」

어머니의 표정이 금방 환하게 밝아졌다. 어머니는 자식의 일에는 왜 그리 단순하고 민감한지...

「그래? 아니 그럼 어제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김밥이 라도 싸서 다른 먹을 것도 챙겨 주게.」

봉구는 어머니가 쉽게 자기의 말을 믿자 안심을 하며 더욱 의젓하게 말했다.

「귀찮게 해드리기 싫어서요.」

어머니는 한껏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으그, 내 아들이 이제 철이 들었군. 에미 걱정을 다 하구.)

「원 애두. 네가 공부한다는데 내가 뭔들 못 해주겠니?」

「저, 그럼 갔다 올께요.」

「잠깐만 기다려라.」

얼른 안방에 들어갔다 나온 어머니 손에는 만 원짜리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 대신 이걸로 맛있는 거 사먹어. 우동, 햄버거 그런거 말고 갈비탕이나 돼지갈비나 뭐 그런 거. 아니, 엔돌핀 많이 나오는 걸로다 사먹어. 햄버거, 콜라 그런 거 많이 먹으면 T임파구가 다 죽는댄다. 알았지?」

봉구는 돈을 받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고마워요, 엄마.」

「고맙긴, 공부나 열심히 해라. 더두 말고 네가 반에서 중간만 가면 이 엄만 한이 없겠다. 누가 너더러 일류대학 가래니? 그저 어디 서울에서 많이 멀지 않은 곳에, 전문대만 가면 좋겠다. 얼른 가봐, 차 조심하구.」

「네, 그럼 수고하십시오.」

인사를 꾸벅 하고 나가는 봉구를 보며 봉구 어머니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원 저 녀석은 한시도 장난을 안치면 좀이 쑤시나 봐. 엄마한테 수고하십시오가 뭐야. 웃기는 녀석.)

상훈은 12개월 할부로 사준 비디오를 십분 활용했다. 간간이 녹화한 것도 보고, 식구들이 다 잠들고 나면 빌려 온 비디오테이프를 감상했다. 포르노가 지겨워지면 무술 영화도 보고 그것도 지겨우면 코미디 영화도 보았다. 그 바람에 성훈은 아참마다 눈이 충혈되었고 학교에 가서는 잠이 모자라 시시때때로 엎드려 잠을 잤다.

짝 준식이 몇 번 깨워 보곤 했지만 성훈이 깨우지 말라고 화를 내는 바람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성훈은 유난히 성격이 날카로운 영어 선생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니 잰 뭐야. 보자보자 하니까 도대체... 수업 시작할 때부터 자는 거 봤는데 계속 자네. 선생이 앞에 있어도 우습다 이거야?」

준식은 놀라서 성훈을 흔들었다. 그러나 성훈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더니 계속 자는 것이었다.

「야, 너 안 일어나?」

앙칼진 영어 선생의 고함 소리에 성훈은 그제서야 부스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철썩.」

성훈은 방금 일어난 사건을 납득하지 못한 채 어릿어릿한 표정으로 뺨을 만져 보았다. 뺨은 화끈화끈거렸다. 아이들은 모두 놀라 숨을 죽이고 성훈과 영어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영어 선생님은 결혼한 지 2년 만에 이혼을 했다는 소문이 있는 마흔 살의 독신녀였다. 성질은 개 같아도 실력은 끝내 준다고 선배들이 얘기해 주었는데 실력은 이미 파악되었지만 성질 문제에 있어서는 이제야 알게 된 셈이었다. 성훈은 잠 좀 잤다고 따귀를 맞았다는 게 영 믿을 수가 없었다. 앞에 선 영어 선생은 잔뜩 화가 난 표정이어서 성훈은 자기가 잠잔 거말고 뭐 다른 잘못을 했나 생각해 보았다. 영어 시험 못 본 거는 지난 시간에 다 맞아 주고 끝냈고,아무리 생각해도 따귀를 왜 맞았는지 몰라서 일어섰다.

「선생님, 제가 왜 맞은 겁니까?」

「너 말다 했어?」

「아닙니다. 맞은 게 억울하다는 게 아니고 왜 맞았는지 잘 몰라서 그럽니다. 제가 좀 졸아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서요.」

「이게 점점... 너 교실 뒤로 가 서.」

성훈은 별수 없이 교실 뒤로 갔다.

「너 양말 한쪽 벗어.」

성훈도 다른 아이들도 어리둥절했다. 느닷없이 양말을 벗으라니.

「얼른 안 벗어? 얼른 벗어서 입에 물고 손들고 서있어.」

성훈은 양말을 벗어서 들고는 그냥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설마 진짜 물게 하지야 않겠지.)

「빨리 물어. 너 같은 인간쓰레기는 비싼 수업료 내고 여기 앉아 있기가 송구스러운 줄 알아야지. 양말 안 물어? 날 우습게 알면 네 인생 우스워져. 양말을 통째로 입 속에 틀어넣기 전에 얌전히 물어.」

성훈은 양말을 움켜쥐고는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후론 영어 시간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다음부터 영어 시간엔 절대로 졸지 않았다. 그리고 영어 선생의 별명은 <미친 우먼>이 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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