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안개처럼 속삭이는 자매 ‘오수미’ 와 ‘윤영실’
아직도 안개처럼 속삭이는 자매 ‘오수미’ 와 ‘윤영실’
  • 김두호
  • 승인 2007.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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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스타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일순간에 사람의 일생이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에 슬픈 감정이 북받친다. 그들을 생각하면 사랑도 돈도 인기도 그리고 생명도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필자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비롯된 취재노트며 기사자료 따위의 기록물에 대한 수집벽을 30여 년간 버리지 못하고 살았다. 용도가 끝나도 그냥 생각없이 모아둔 것들인데 지금 들춰보다가 그들을 만났다.


한때 꽃처럼 아름답고 별처럼 반짝이던 젊은 연예인이었으나 어느해 덧없이 생을 마감하고 허공으로 스러져 간 불운의 형제인 영화배우 ‘오수미(본명은 윤영희) 윤영실’ 자매와 다시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신상옥감독의 내연의 처였던 오수미와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녀에게 나는 비정한 기자이면서도 서로 신뢰하며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이며 카운슬러였다. 나의 집에는 생전의 오수미가 준 두가지 기념품이 있다. 자작나무로 만든 작은 새 한 마리의 조각품과 천둥번개가 치는 어두운 날에 셔터를 누른, 수양버들이 늘어선 페이브먼트 소품 사진 한 점이 그것이다. 손바닥 크기의 사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활동한 국제적인 사진작가 김중만씨의 작품이다. 김중만 씨가 한때 그녀의 남편이었을 때 남편의 사진 전시회에서 오수미가 소품 한 점을 내게 선물한 것이다.


금방 굵은 빗줄기가 하늘에서 눈물처럼 쏟아질 것 같은 그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간혹 그것에 그녀의 암울하고 슬펐던 삶의 음영이 나타나 있고 외로운 작은 새의 조각품에서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 그녀의 간절한 열망이 음각돼 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프게 살다가 한 마리의 철새처럼 종적도 남기지 않고 소리없이 먼 하늘로 사라졌다. 생전에 그의 크고 힘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는 언제나 눈물이 금 새 나올 듯이 적막하고 쓸쓸 했었다. 그래서 그는 삶의 그늘진 늪과 불행에서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을 업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저예요. 수미”


그녀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올 때나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첫마디는 언제나 똑같았다. 소근 대는 듯 하면서 맥없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




1993년 하와이 여행길에서 타고 가던 승용차가 뒤집혀 비명횡사한 비보를 영화배우 출신 디자이너 하용수씨와 영화감독 김호선 씨에게 비슷한 시간에 가장 먼저 전해 듣는 순간 나는 기사를 쓸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일생에 단 한번 짧았지만 떳떳하게 맞이했던 행복을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낯선 나라의 알 수 없는 곳을 떠돌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데는 나의 책임도 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것은 1986년 6월 5일 밤 자정이 다가 올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전화가 걸려 왔다. 오수미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당시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로 와 줄 수 없느냐는 부탁 겸 요청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늦은 밤에 나를 찾을 일이 특별히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 그 무렵은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북한을 탈출한지 석 달 후였고, 그들의 신상 주변이나 관련 인물들의 여러 뒷이야기들이 쉬지 않고 화제의 초점이 될 때였다.


나는 급히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초보 운전 시절이었는데 목동 집을 빠져나와 강변로를 겁도 없이 과속으로 달렸던 기억이 난다. 오수미의 25평형 현대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어려울 때 늘 그랬듯이 금방 울어버릴 것 같은 슬픈 얼굴로 인사도 나누지 않고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곁에는 역시 무표정한 모습의 김중만씨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4년째 탈 없이 부부로 살아왔다.


김중만씨는 매우 이성적이고 지적인 감각을 가진 사진작가다. 그는 의사인 아버지가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 오지로 봉사의 길을 떠나면서 성장기를 해외에서 보냈다.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국제사진전을 통해 작가로 인정받았고 서울에 돌아온 후에도 패션이나 인물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성격도 순수하고 오수미처럼 착했다.


나는 급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 어색한 긴 침묵이 흐른 뒤 오수미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불화 끝에 파경의 현장에 나를 증인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것도 두 사람의 생각이 같았는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주위의 시선을 피해가며 몰래 만나던 연애시절인 1983년 12월께 기자는 그들이 떳떳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사실상의 부부’로 결합했음을 처음 기사화 했다. 두 사람은 이제 결별에 따른 마무리 기사까지 내게 의뢰한 셈 이었다.


그때 밝힌 파경 이유는 ‘갈수록 성격 차이가 심하게 나타났다’, ‘생활과 사고방식에서도 서로 가치관이 다른 게 많고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로가 고민을 이해해주지 못한 상태에서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대체로 많은 연예인들이 헤어질 때의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성격차이’인데 그들도 비슷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결국 특별하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금씩 쌓인 불만을 해소하지 못해 이날 밤 헤어지기로 합의했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 그동안 행복하게 살아왔는데 결별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이들이 마지막으로 화해를 위한 대화를 갖도록 권했다. 아파트 현관을 나오면서 “지금 한 말이 후회가 되면 즉시 신문사로 전화를 해 달라”고 요청한 것도 행여 결심을 바꾸면 기사화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부부싸움 정도를 결별로 기사화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오보가 될 수도 있고 또 당사자들의 성급한 판단으로 전해준 기사 때문에 그들이 평생 후회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오수미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반쯤이 지난 뒤였다.


“저 수미예요. 가실 때 하신 말 있죠. 혹시 생각이 바뀌면 전화해 달라고...우리 기사 쓰지 말아 주세요.”


현관을 나설 때 혹시나 하고 남긴 빈 말이 사실로 돌아온 것이다. 현기증이 날정도로 난감했다. 이미 두 사람의 결별 기사가 아침에 배포될 마지막 판 지면에 실려 수 십 만부가 돌고 있을 때였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를 반복하며 쩔쩔 메는데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화해를 하고 살 사람들이 그 기사로 인해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묻기가 부담스러워 나중에도 당사자들에게 물어 본 적이 없다. 분명한 것은 기사가 나간 뒤 두 사람은 결별 소식을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부부관계를 청산했다는 점이다.


당시 평화롭던 그들의 가정생활이 흔들리고 수습할 수 없는 파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아무래도 신상옥 감독의 북한탈출에서 비롯된 직간접적인 동요와 심리적 갈등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오수미에게는 신감독과 사이에 낳은 두 남매가 있었으므로 운명적인 인연의 고리를 외면하고 살 수도 없었다.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제 신 감독은 북한 탈출 후 미국에 살면서 친지를 통해 두고 간 두 자녀를 포함해 기약없이 헤어졌던 오수미와 안부를 주고 받았다.


신 감독은 북한 납북사건 전인 1977년 서울에서 최은희와 이혼했고 그와 함께 오수미와의 관계도 노출됐다. 짧았지만 남의 눈을 의식 않고 압구정동 아파트에서 신 감독의 아내로 떳떳하게 산 것은 1년뿐이다.


신 감독은 북으로 간 뒤 최은희와 재결합했다. 신 감독은 유럽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통해 북한 탈출에 성공한 직후의 심경을 “영화 장면 같구나”라고 밝혔다지만 그 순간뿐만 아니라 실제 그의 삶의 행로가 영화였다. 그리고 그의 두 여자, 최은희와 오수미의 생애도 그대로 한편씩의 영화였다. 다만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밝은 조명아래 화려한 눈길을 받기도 했지만 오수미는 늘 고독하고 황폐한 무대의 뒷전에서 ‘떠도는 배우’로 살았다. 1973년 영화 ‘이별’의 파리 로케이션 때 신감독과 내연의 관계로 발전했을 무렵 오수미의 나이는 23살이었다.

1967년 세기상사의 신인배우 공모에서 군계일학의 유망주로 선발되면서 영화 ‘어느 소녀의 고백’을 데뷔작으로 오수미의 출연 작품은 50여편에 이른다. 출생지는 제주시 건입동.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한 평범하지만 다복했다는 집안의 1남 3녀중 둘째 딸이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오수미(본명 윤영희)의 바로 밑의 친동생 윤영실도 언니에 앞서 한 점의 흔적도 남겨두지 않고 불행하게 사라졌다.


톱클래스의 모델로 활동하면서 영화배우로 인기를 모았던 윤영실은 1986년 5월 실종됐다. 어느 날 갑자기 살던 집에서 사라진 후 20년이 지난 지금껏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수사기관에서도 윤영실의 실종사건과 관련된 수사 과정을 제대로 발표한 적이 없다. 세월이 지나도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윤영실의 실종 미스터리에 큰 관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자살설과 타살설로 분분했지만 남긴 것이 없으니 근거도 없는 뜬 소문들만 무성했다.


한때 이들 비극의 자매는 정지영 감독의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에서 극중 자매로 출연하며 잠깐이었지만 선망의 눈길을 받기도 했다.


“저예요. 수미..”

“오랜만이군요. 집도 옮긴 것 같은데 그동안 어디서 뭘 했어요?”

“여기 제주예요. 압구정동 집 정리해서 제주에 커피숍이 딸린 집을 세얻어 스튜디오도 마련했어요.”

“스튜디오라니?”

“사진 찍으려 다녀요. 재미있어요.”


오수미는 사진작가와 사는 동안 사진에 취미를 느껴 열심히 배웠고 고향에 내려가 소망했던 스튜디오까지 마련했었다. 그녀에게 모처럼 새로운 삶이 열리는 듯이 느껴졌다.


신감독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신 감독을 빼닮은 아들 하나와 자신을 닮은 딸을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그렇게 홀가분한 독신생활로 돌아섰다. 제주로 떠난 것도 미련을 정리하겠다는 결심이 서 있었던 것 같다.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하와이 여행길에 교통사고로 숨진 그녀의 시신은 영화일로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신감독을 대신해 그의 직원과 가족들이 수습해 고향땅에 묻어주었다. 나는 사진작가로 새 삶을 시작한 오수미의 근황을 짧게 신문에 소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처절한 사망소식을 기사화 하는 것으로 오수미와의 오랜 관계를 정리했다. 끝으로 지금은 오수미 만큼 마음씨 착하고 예쁜 모델출신 아내를 만나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김중만 교수에게 실명을 거론하며 과거사를 언급한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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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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