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4)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4)
  • 임정진
  • 승인 200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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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4. 5분 동안 하늘을 보자




양호실 강 선생이 새로 오자 2주일 동안 아지트가 없이 방황하던 여선생님들이 제일 기뻐했다. 시간이 날 때마나 양호실에 모여 여자들끼리만 통하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다리도 쭉 뻗고 쉴 수 있는 재미를 되찾은 것이다. 그런데 전에 있던 노처녀 양호선생님은 하루에 한두 명 환자 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어쩐 일이지 강 선생이 온 후로는 쉬는 시간마다 환자가 3~4명씩 들이닥치고 수업 시간에 오는 환자도 심심치 않았다. 그래서 별수없이 여선생님들은 칸막이를 치고 양호실 안에 작은 공간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점심시간에 여선생 네 명이 커피를 끓여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비슷비슷한 나이라 얘기가 잘 통해 모여 앉은 적이 많았다.

「수학 선생님 그만둔 거 아시죠?」

「민 선생님? 진짜, 왜 그만 두신 거래요? 새학기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그만두면 애들은 어떡하라구.」

「종로학원에서 스카우트해 간 거래요. 스카우트비로 3천, 월 3백, 일년치 선불에 자가용 제공.」

「우와, 진짜예요?」

「민 선생님이, 하기는, 전에 왜 과외 한창일 때, 날리던 사람이란 소문은 들었어요. 고향에 과수원까지 샀다던데...」

「다시 과외 부활되니까 학원에서 유능한 강사 찾느라 난리래요. 학원끼리 강사 쟁탈전이 벌어졌대요.」

「그러니 민 선생님인들 어떻게 그 유혹에 견디겠어요? 학원 가면 하루 4~5시간만 강의하면 되지, 보수 많지, 환경 깨끗하지, 냉난방 잘해 주지, 청소 감독 안 해도 되지...」

「어어, 그러다 한 선생님도 학원가겠네.」

「가정 선생을 누가 스카우트해 가요?」

「가정 선생님들 연합해서 데모해요. 입시 때 가정 점수 80점으로 하자고. 그러면 가정 과목도 과외할 테니까······.」

「후후, 그럴까요?」

신참인 강 선생은 듣고만 있다 한 마디 끼어들었다.

「그럼 수학 선생님 자리 비어서 어떡해요?」

「교장 선생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어요? 민 선생님이 방학 때 미리 교장 선생님한테 언질을 주어서 그동안 교장 선생님이 계속 교육위원회 들락날락하셨대요. 8학군에서 선생님 한 분 보셔 올라고.」

「학교끼리 스카우트하네.」

「그래도 우리 학교는 공립이니까 이 정도로 점잖은 거예요. 내 친구 사립에 있는데 가끔 얘기 들어 보면 기도 안 차.」

「뭐요? 기부금?」

「아니, 들어갈 때 기부금 내는 거야 다 아는 거고, 선생님끼리 경쟁을 시킨대요. 애들 성적이 부진하면 다음해엔 영락없이 중학교나 야간으로 밀려난대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더 죽기살기로 애들을 몰아붙일 수밖에 없대요.」

강 선생은 섬뜩해졌다. 학교가 학생에게만 무서운 곳인 줄 알았는데 선생에게도 역시 무서운 곳이었다. 양호선생은 자신이 점수를 매기는 과목 교사가 아닌 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학교 방송반에서 내보내는 점심시간 방송이 끝나 가고 있었다.

「---- 좋고 신나는 일은 언제나 아쉽게 일찍 끝나는군요. 점심시간을 이용해 음악과 만나는 시간도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즐거운 오후 시간을 위하여 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마지막 곡으로 띄워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학교 전체가 우- 하는 함성에 휩싸여 붕 뜬 것만 같았다. 3학년을 제외한 전 교실에서 합창이 터져 나왔다. 강 선생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커피를 마시던 여선생들도 일어설 채비를 했다.

「아휴, 또 5교시에 애들이 얼마나 졸까.」

「좋잖아요. 조용해서.」

한 선생의 농담에 다들 웃으며 교무실로 갔다. 양호 선생은 천 8백 명이 부르는 대합창을 들으며 커피잔을 씻었다.



봉구네 반은 5교시가 체육이었다. 학생 주임님 박길호 선생님이 담당한 시간으로 언제나 신나는 수업이라 모두들 체육 시간을 좋아했다.

「오늘은 좀 쉬운 걸로 하자.」

박 선생은 다른 체육 교사들이 시키는 출석 점호를 하지 않았다. 반장이 인원 몇 명, 사고 몇 명 어쩌구 하면서 악을 쓰고 거수경례를 하는 것이 군대식이라 맘에 들지 않았다. 자로 잰 듯 줄을 서라고 하지도 않았다. 체육 시간은 몸을 튼튼히 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지, 줄을 딱 맞춰 사열식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고 믿었다. 인원 점검을 위해 네 명씩 쭉 세워 보고, 그 다음부터는 무더기로 다니든, 혼자만 뛰어다니든 내버려두었다. 체육 시간만이라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을 위해 박 선생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그런 소극적인 인심뿐이었다.

쉬운 걸로 하자니까 아이들은 놀이를 한다는 말로 알아듣고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발야구요 !」

「고무줄놀이요 !」

「눈 운동이요 !」

「숨쉬기 운동요 !」

아이들에게 가만있으라고 손짓을 한 후 박 선생은 천재를 찾아냈다.

「너 이리 나와서 시범 좀 해봐라. 네 몸 속에 있는 온갖 스트레스와 걱정거리를 다 쫓아내는 몸짓 말야.」

어리둥절하던 천재는 곧 박 선생의 요구대로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까 -----악-----」

괴성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면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떨어지는 천재를 박 선생은 웃으며 쳐다보았다.

「자, 시범 잘 봤지? 가장 큰소리로, 가장 큰 몸짓으로 몸속의 잡귀를 다 쫓아낸다. 시작----.」

봉구네 반 57명은 일제히 뛰어오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클 줄은 박 선생도 미처 몰랐다. 양호실에 있던 강 선생은 느닷없는 소란에 운동장을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 집단 발작이 일어나더니 금방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다들 4,5명씩 손을 잡고 운동장에 드러눕는 것이었다.

「아니, 재들이 왜 저래? 데모하나?」

그러나 그것은 데모가 아니었다. 모두들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너희들 하늘 본 지 오래 되지 않았냐? 흙 만져 본 건 언제냐? 5분 동안 대지의 숨결을 느끼고 하늘을 쳐다보자. 구름이 흘러가는 것도 보고. 잠시 조용히 자연을 느껴 보자.」

그러더니 박 선생도 남학생들 곁에 벌렁 누워 버렸다.

5분은 길게 느껴졌다. 하늘은 생각보다 맑지 않고 뿌옇게 버티고 있었다. 구름은 봄바람에 밀려 어디론가 자꾸만 흘러가고 있었다. 모두들 옆에 누운 친구의 손이 따뜻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은주는 자꾸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고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아무 걱정도 없이 한가로이 누워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도망자처럼 쫓겨가며 사는 자신이 갑자기 불쌍해졌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볼 틈이 없었다. 운동장에 누운 5분 동안 은주는 지난 17년 동안 느낀 것보다 더 많은 느낌을 받았다.

「삐-----삑.」

정적을 깨고 박 선생의 호루라기가 울렸다. 모두들 벌떡 일어나 박 선생을 쫓아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다들 뛰는데 천재는 그냥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잠시 마음을 놓은 채 하늘을 보니 긴장이 풀려 잠이 들고 만 것이었다. 아이들은 뛰면서 뒤돌아보고 킥킥 웃어댔지만 아무도 깨우러 가지 않았다. 천재가 모두를 대신해서 자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예수가 죄 지은 자들을 위해 십자기에 못 박히듯이 천재는 긴장 속에서 사는 다른 친구들을 위해 대지 위에서 코를 골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나면 옷 갈아입고 세수하느라 바쁘기만 하다. 그러나 달중과 촉새는 씻는 것을 포기하고 잽싸게 여학생 탈의실로 달려갔다. 탈의실 뒤쪽에 몰래 갖다 놓은 사다리에 올라가면 커튼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여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으윽, 나 죽네, 나 죽어.」

「야, 나도 좀 보자.」

달중과 촉새는 서로 더 많이 들여다보려고 사다리에 매달려 실랑이를 벌였다.

「민자, 보기보다 글래머다.」

「그래? 어디... 끝내 주네... 완전히 안소영이다.」

달중과 촉새는 얼굴이 벌개가지고 교실로 들어왔다.


봉구는 녹초가 되어서 집에 돌아왔다. 장학사 온다는 바람에 너무나 열심히 청소를 한 탓이었다. 집에 오니 동생 진수와 어머니가 싸우고 있었다. 봉구는 부엌에서 식빵을 집어다 뜯어 먹으면서 모녀간의 입씨름을 구경했다.

「갑자기 예고 타령이다, 얘가. 봉구 너 하나 속썩이는 것도 벅찬데 왜 네 동생까지 이러니?」

「엄마, 오빠 끌어들이지 마. 봉구 오빤, 오빠 나름의 인생이 있는 거고 난 나지, 왜 둘을 연결시켜요?」

「그래, 지금부터 레슨 받으면 예고 가긴 가는 거래?」

「엄만, 무식한 소리 좀 하지 마. 예고도 경쟁이 얼마나 센대. 누가 보장할 수야 없지. 한 9개월 남았으니까 열심히 하면 가능성 높대.」

「야, 네가 뭘로 예고에 가는 건데 그래?」

보다못해 봉구가 끼어들었다.‘진수가 예고에 가면, 예고에 예쁜 여자애가 많으니까 잘하면...’ 하는 속셈도 있었다.

「오빠, 나 그림 잘 그리는 거 알지. 미술반에서도 알아주잖아. 작년 크리스마스 때 내가 그린 카드, 오빠두 봤지?」

「그 정도로 예고 가면 누가 예고 못 가니.」

「거 봐, 네 오빠도 그러잖아.」

「엄마, 글쎄 내 말 좀 차근차근 들어 봐요. 내 성적으로는 연합고사는 붙겠지만 대학 가기는 위태롭단 말예요.」

「고등학교나 우선 들어가고 나서...」

「엄만, 딸의 앞날을 그렇게 허술하게 생각하면 어떡해요? 다른 집 엄마들은 그냥 어떻게든 대학 보내려고 조금만 성적이 모자란다 싶으면 성악, 무용, 골프, 스키, 첼로, 하프 뭐든지 시키려고 안달이라는데...」

「진수야, 예술은 아무나 하니? 재질이 있어야지.」

「요즘 누가 소질 가지고 진학해요? 어차피 마찬가지라니까요. 레슨 받다 보면 소질도 발견되고 대학도 가고 좋잖아요.」

어머니는 이미 딸의 신념이 확고한 것을 눈치챘다. 듣고 보니 미술 해서 예고 가고 미대 가면 그냥 공부하는 것보다 좀 수월할 것도 같았다. 아들도 아니고 딸인데 예술가로 키우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래,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예고 시험 봐라. 그런데 레슨은 어디서 받니?」

「내 친구가 아는 데 있는데, 미대 입시 전문학원이래요. 예고랑 미대에 50명씩 보낸대.」「그럼 거기 다녀 봐라. 그런데 학원비는 얼마래니?」

「20만원.」

「뭐야?」

봉구도 어머니도 놀랐다.

「엄마, 그거 비싼 거 아냐. 음악하고 달라서 미술은 매일 가지, 몇 시간씩 앉아 있지. 고3은 40만 원이래.」

「맙소사!」

어머니는 놀라서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진수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할수없이 진수와 어머니가 반반씩 양보하여 우선은 비용이 좀 싼 화실에 다니다 막바지 3개월만 입시 전문 화실에 다니기로 합의했다.

다음날부터 진수는 화실에서 늦도록 그림을 그리다 11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밤늦게 버스 정류장에 진수 마중 나가느라 고생하기 시작했고 봉구는 텔레비전 리모콘을 장악할 수 있었다.



월례고사가 시작되었다. 은주는 시험공부 하다 끝내 코피를 쏟고 말았다. 은주도 약간 놀랐지만 은주 어머니는 더욱 놀랐다.

「대학 입시도 체력 싸움인데 벌써 코피 나고 그러면 안돼. 내일 한의원 가서 약 좀 지어 와야겠다. 너 내일 나랑 한의원 가자. 진맥하고 약 지어야 체질에 맞는 약으로 고를 수 있으니까.」

「엄만--- 코피 한번 난 것 가지구----.」

「잔소리 말구 엄마 말대로 해. 엄마가 이만큼 챙겨 주지 않으면 네 성적 유지될 것 같니?」

은주는 방문을 열고 계속 공부했다. 그래야 거실에 앉은 어머니가 은주의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다음날 아침 은주 어머니는 은주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엄마, 나 괜찮아.」

「글쎄, 엄마 시키는 대로 해. 버스 타고 다니느라 괜히 힘 빼니까 정작 공부할 때 기운이 안 나잖아. 다른 애들은 여건이 안 되니까 버스 타는 거지, 걔들도 여건만 돼봐라, 다 자가용 탈 애들이야.」

은주 어머니가 운전하는 빨간색 르망은 날렵하게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보통때 은주가 내리던 곳을 지나쳤는데도 차는 계속 달렸다.

「엄마, 나 여기서 내려서 걸어갈래요.」

「피곤할 텐데 그냥 학교 안까지 타고 들어가.」

「아녜요. 걸어가겠어요.」

「남들 의식할 것 없다.」

은주 어머니는 은주가 다시 대꾸하지 못하도록 잘라 말했다. 교문 앞에서 학생 주임 박 선생이 은주가 탄 차를 세웠다.

「학생들 차는 교내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은주는 어쩔 줄 몰라 눈을 꼭 감고 말았다.

「선생님, 얘가 아파서 그래요.」

은주 어머니는 놀라 쳐다보는 박 선생을 뒤에 남기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은주네 교실과 가까운 현관 앞에 멈췄다.

아이들이 차를 쳐다보고 있음을 은주는 눈을 감고도 느낄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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