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는 내 목숨, 내 인생, 내 살 같은 존재” 배우 김해숙
“연기는 내 목숨, 내 인생, 내 살 같은 존재” 배우 김해숙
  • 유성희
  • 승인 200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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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못한 모성까지 표현하는 것이 꿈 / 유성희



[인터뷰365 유성희] 우리나라 드라마 ‘어머니’ 역 연기자에는 계보가 있다. 바위 같은 어머니 강부자, 감수성 예민한 어머니 김혜자, 추상 같은 어머니 정혜선, 친구 같은 어머니 고두심 등. 거기에 김해숙의 어머니가 더해졌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것 같기도 하고 또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처렁처렁 신세 한탄을 하기도 하는 어머니.


김해숙(54)이 연기하는 모정은 어머니이기보다는 ‘엄마’에 가깝다. 1974년 MBC 공채 탤런트 7기로 데뷔, 35년째 연기를 하고 있는 김해숙은 어느덧 ‘국민엄마’라는 타이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위기에 처한 형사 아들을 지키는 소매치기 엄마(무방비 도시), 자폐아 아들을 향한 삐뚤어진 모정의 엄마(하얀 거짓말), 괴기스러운 엄마(박쥐) 등 김해숙이 연기한 엄마의 색깔은 이전의 다른 국민엄마 연기자들에 비해 훨씬 다양하다.


김해숙은 어느 인터뷰에서 “다이어트를 하지도 않고 보톡스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묻자 “나 같은 배우도 한 명쯤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엄마를 연기하는 김해숙의 얼굴은 세련되기보다는 푸석하니 꼭 우리의 진짜 엄마 같다.


김해숙은 올해 영화 ‘박쥐’로 칸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았다. 그리고는 연이어 없이 아침 드라마 ‘하얀 거짓말’과 주말 드라마 ‘잘했군 잘했어’에서 전혀 다른 캐릭터의 엄마를 연기했다. 숨가쁜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모든 작품을 끝내고 휴식기에 들어가있는 김해숙을 만났다. 어렵게 시간을 내 인터뷰에 응한 김해숙은 혹독한 ‘연기앓이’를 막 마치고 일상으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날씨가 예전 같지 않고 변덕스럽네요. 날씨에는 민감하세요?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거 싫어하죠.(웃음) 연기할 때는 주변사항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계절을 잊고 지낼 때가 많아요.


드라마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재충전은 하고 계십니까?

3주 정도 지났는데 마음의 병이 나서 조금 아팠어요. 항상 배우로만 살아오다 제 자신으로 오랜만에 돌아와 보니 배역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해서 상당히 힘들었어요. 제 인생이 아닌 배우라는 인생에 얼마나 올인을 하고 있었나 새삼 느꼈어요. 2주 정도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모든 작품이 끝날 때마다 항상 후유증이 있나요?

드라마 캐릭터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있어도 이번엔 조금 달랐어요. 배우로 지냈던 시간이 지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제 자신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거예요.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지만 막상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오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배우 맞구나’ 다시 한번 결론 지었어요.(웃음)



드라마에서의 친근한 엄마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컬트적인 엄마 역을 했습니다. 영화 ‘경축! 우리사랑’은 딸의 남자친구 아이를 가진다는 설정이었는데요. 특히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장면은 베드신만큼 강렬했는데 혹시 시나리오상에서 베드신이 있지는 않았나요?

시나리오에는 베드신도 있고 키스신도 두 번 있었어요. 늘상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만 불리는 엄마에게 이름을 되돌려 주고 싶다는 마음에 선택한 영화였기 때문에 베드신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어요. 일단 50대 엄마가 딸과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사랑을 한다는 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는 힘들잖아요. 다른 멜로 영화에서는 가능했겠지만, 50대 엄마의 베드신이 아름답게 느껴지기엔 우리나라의 정서상 아직까지는 힘든 것 같아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베드신으로 퇴색되지는 않을까 감독님과 많은 상의를 했는데 결국엔 베드신 대신 봉순이의 감정을 대신할 장면들을 촬영했어요.


아들 또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연기는 어떤 마음으로 하시나요?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잖아요. 데미 무어가 16살 차이가 나는 아들 같은 남자와 사랑을 하는 걸 보고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구나 싶었어요. 봉순이는 그 남자에게 소위 말하는 ‘밥정’이 애정으로 옮겨간 것이고, 남자는 자신을 따뜻하게 챙겨주는 봉순에게서 어머니의 마음이 사랑으로 발전된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연기하는 동안 데미 무어라고 최면을 걸었어요.(웃음)


처음 엄마 역할을 한 작품은 무엇입니까?

30대 때 어린이 드라마 ‘꾸러기’에서 이민우의 엄마였어요. 당시 민우가 초등학생이었으니까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여배우를 주제로 다큐멘터리에서 한 중년 여배우는 “대한민국의 모든 엄마가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는다. 제발 다양한 엄마 캐릭터를 만들어 달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누구의 엄마로만 기억되는 역할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달리 고심하는 점이 있나요?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지금까지 연기한 ‘조강지처 클럽’의 양순, ‘부모님 전상서’의 옥화, ‘하얀 거짓말’의 신정옥 등 저에게 주어진 역할이 다양하게 분포돼 있었고, ‘똑같은 역할, 비슷한 캐릭터는 있어도 똑같은 연기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인물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어요.


캐릭터에 몰두하기 위해 체중을 줄이고 늘이는 것은 물론, 메이크업도 안합니다. 그런 이유가 있습니까?

‘가을동화’의 순임을 연기하면서 여배우보다 배우로 남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배우에게 연기도 중요하지만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외적인 요소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순임이 울 때 시청자들도 울고, 순임이 웃을 때 같이 웃어주지 않겠어요. 개인적으로 연기를 하는 동안에는 배우로서 달리 보여져야 한다는 게 배우의 이기심이 아닐까 생각해요. 앞으로도 변함없는 생각이고요.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을 연기를 위해 기억에 담아 둘 때가 있나요?

제가 어떤 일에도 소탈하게 웃고 넘기는 편인데 얼마 전에 건강진단을 받았어요. CT촬영을 다시 하자는 얘기에 저도 모르게 정말 놀랐는데 ‘어디가 안좋은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제 감정을 느끼고는 ‘내 연기는 거짓말이었구나’ ‘아, 이런 감정이구나’ 그 심각한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하더라고요. 웃지 못할 상황이죠. 하하.




‘박쥐’의 캐스팅 소식에는 만세삼창을 부르셨다고요.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 박찬욱 감독님의 팬이 되었기에 만세삼창이 안나올 수가 없었어요. 하하. 박 감독님을 존경하는데, 존경은 나이와 상관이 없잖아요. 히스테리컬하고 괴기스러운 역할이었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그 모습에 모정이 들어있고, 희로애락이 다 표현되었기에 연기하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박쥐’를 하기 전까지 매너리즘에 빠졌었어요. 그동안 다양한 역할을 많이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박쥐’를 하면서 역시 연기의 끝은 없구나 깨달았어요. 그동안 주어진 역할에 최대한 가까워지기 노력하며 연기했는데, 라 여사는 제가 상상치 못한 인물이었어요. 몸과 마음은 괴로웠지만 제 연기 인생에 다시 불을 지핀 작품이에요.


‘박쥐’의 라 여사는 몸이 묶인 채로 눈으로만 연기를 해야 했기에 색다른 고충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힘들었다기보다는 저 자신과의 싸움이었어요.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 건가?’ 자책할 정도로 도전정신을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에요. 눈꺼풀을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움직이는 게 가능할 줄 알았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 보니 되지 않는 거예요. 그날부터 눈동자만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계속 연습을 했어요. 눈을 깜빡이지 못한다는 게 굉장한 고문이더라고요. 옥빈이가(김옥빈) 사과쥬스를 먹이는 장면에서는 몸이 마비된 사람처럼 쥬스를 넘기면서 기도가 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표현하고 연기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새삼 느꼈어요.(웃음)


연기한 작품 중에 마음에 남는 인물이 있다면요?

연기할 당시에는 모두 하나같이 마음에 남아요. ‘부모님 전상서’ ‘장밋빛 인생’ 얼마 전 종영한 ‘하얀 거짓말’, ‘가을동화’는 물론이고, 영화 ‘무방비도시’ ‘해바라기’ ‘경축! 우리사랑’ ‘박쥐’ 등 최근 작품이 많이 생각나네요. 정말 한 작품 한 작품 애정을 느끼고 있어요.



부산에서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혼자 나가서 놀기보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조용하게 지냈어요. 피아니스트를 꿈꿨을 때이니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책을 좋아해서 집에 동화책이 많았던 기억이 나네요. 말수가 많지 않고 조용했는데 형제가 없어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어요. 어머니 혼자 저를 키우면서 제게 많은 사랑을 주셨어요.


어린 시절 피아니스트를 꿈꿨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시키니까 자연스레 피아노를 접했고, 음악을 사랑한다고 느끼고 부터는 피아노를 치는 게 좋았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제 손가락이 짧다는 걸 알면서 자연스럽게 그만 뒀어요. 손가락 찢는 수술까지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더라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손가락이 길었으면 계속 음악을 했을 것 같아요.

배우를 간절히 꿈꿨던 것은 아닌데 MBC 공채 7기에 합격하면서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어요. 지금은 피아노를 그만둔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연기 자체를 너무 사랑해요.


자주 듣는 음악은요?

오페라 아리아와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요.


결혼 후 한 3년 동안 연기 공백이 있었죠?

결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기를 그만두게 됐어요. 그러다가 연기하는 동료들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연기에 대한 열망이 다시 살아난 거죠. 당시에는 결혼을 하고 다시 연기를 시작하는 배우가 거의 없어서 제가 복귀한 후에는 결혼한 것을 외부에서 거의 몰랐어요. 복귀해서 시작한 작품이 ‘백년손님’이었는데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좋은 기회가 많이 찾아왔죠.


자녀들이 ‘우리 엄마와 가장 가까웠던 캐릭터’라고 얘기한 작품이 있나요?

제 딸은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직업에 대해서 신경을 쓰거나 누구의 딸이라는 사실을 게의치 않았어요. 엄마의 일을 전적으로 존중해주고, 좋은 작품에 대해서는 얘기를 해주기도 하지만 유별나지는 않아요.“


연기자로는 잘 살아오면서 엄마로서 잘못 살아온 점이 있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나요?

엄마의 마음은 다 똑같지 않겠어요? 자식에게 다 줘도 아깝지 않은 게 부모사랑인데, 저는 반평생을 배우로 살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 미안한 일이죠. 가정에서나 일에 있어서 ‘엄마가 참 열심히 살았구나’ 라는 걸 아이들이 지금은 다 커서 알아주기도 해요. 제 좌우명이 ‘최선을 다하자’예요. 가정과 연기, 두 가지를 생각하면서 치열하게 살았어요. 그러다보니 그 흔한 취미도 하나 없어요.(웃음)


‘국민엄마’ 호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감사하고 영광스런 일이죠. 연기를 통해서나 가정에서나 엄마라는 역할이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제가 잘나서 붙여진 게 결코 아니기 때문에 배우로서 책임감도 느끼고 한편으로는 굉장히 두려워요. 지금까지는 배우로서 연기의 완성도를 생각했는데 이제는 제 연기에 대한 책임감까지 묵직하게 느껴져요.

제가 ‘박쥐’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 게, 연기에는 끝이 없음을 ‘박쥐’를 통해 다시한번 깨닫게 됐어요. 또 칸영화제를 다녀오면서 제가 얼마나 모래알 같은 존재인지,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 내가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국민엄마’라 불리는 김혜자 고두심 두 배우와 비교했을 때, 자신만의 독특함이 있다면요?

저만의 특별함보다는, 연기할 때 마음을 다해 연기할 뿐이지 어떤 정의를 내리지는 않아요. 모정은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까지 정말 다양해요. 앞으로 제가 맡아야 할 인물이 엄마이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모성까지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요. 김혜자 선생님, 고두심 선배님에 이어 국민엄마의 계보를 잇는다는 말씀에는 너무 감사해요. 두 분 외에도 이순재 선생님, 강부자 선생님, 정혜선 선생님의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보면서 후배로서 존경스럽고 그분들이 잘 닦아준 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에요.



최근 연이어 출연하거나 겹치기 출연도 있었는데 어떻게 각각의 배역에 몰두하나요?

제 자신이 없어질 정도로 철저하게 극중 인물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김해숙이 없어질 정도로 온 힘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같아요. 연기를 시작하면서 백지같은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어요. 백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리든지 가능한 배우가 되겠다. 어떤 역이든 소화 가능한 게 제 기쁨이자 배우로서의 겸손한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중년 여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철학이 있다면요?

남의 인생을 연기로서 대신 살아야 한다는 게 참 어려워요. 그러다보니 제 자신은 없어지고 제 인생 자체가 배우가 되는 거예요. 이번에 쉬면서 제가 느낀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혹스러웠어요. 연기는 제 목숨, 제 인생, 제 살 같은 존재예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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