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40)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40)
  • 유지형
  • 승인 200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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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여배우의 길 / 유지형

유지형 감독이 쓰는 소설로 읽는 초창기 한국 영화사.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인 이월화(1903-1933)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조선 연극 영화계의 역사와 복고, 낭만의 시대상을 그려 낸다.

출생부터 기구했던 이월화는 극단에서의 혹독한 배우수업을 거쳐 윤백남의 도움으로 조선의 첫 영화 <월하(月下)의 맹서>에 출연,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가 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이월화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 한국 연극 영화사와 그 주역의 인물들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편집자주


등장인물


이월화(본명 이정숙)=이화학당을 나온 연극배우 출신 은막의 여배우. 계모의 손에 자라나 연극과 영화에 투신하고 자신을 키워준 영원한 스승 윤백남을 운명 직전까지 연모한다. 결국 기생으로 전락하고 중국남자와 결혼하여 일본에 가서 신혼생활을 영위하나 일본인 시어머니의 학대로 불행하게 그곳에서 죽는다.


윤백남 / 작가 연출가 영화감독=조선 연극 영화계의 거목. 이 월화를 무명극단에서 발굴해 연극계의 스타로 만들고 조선최초의 활동사진을 찍으며 이월화를 대 배우로 출세시킨다. 선비적 기질과 대쪽 같은 성격으로 월화의 방종을 보고 절연한다.


안종화 / 배우 감독=이월화의 평생 친구. 끝까지 순수함으로 월화를 대한다. 최근 발굴되어 화제가 된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감독이기도 하다.


박승희 / 배우 연출자=극단 토월회의 대표. 미주대사를 역임한 박정양 대감의 장남이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극단에서 여배우 이월화를 만나 사랑에 빠지만 약혼녀의 등장으로 결국 월화에게 상처만 주게 된다.


박승규 / 극장 단성사 부사장=단성사 사주 박승필의 친동생. 기생인 월화를 만나 동거하나 주위의 반대로 결국 헤어진다.


윤기성 / 연극배우=월화의 연하의 남자. 고아로 자라난 불우한 청년이다. 월화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나 결국 마약밀매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이응수 / 연극배우 여장배우=극단에서 월화를 만나 변태적 관계로 발전한다. 월화에게 많은 도움과 길잡이가 된다.


조씨 / 월화의 계모, 기생출신=고아인 월화를 키워준 은인이다. 월화를 괴롭히기도 자책도 하는 이중적 성격의 여인이다.




(40) 그 남자


[인터뷰365 유지형] “어머니! 놀이 나갔다 오겠수”

오늘도 다른 날 처럼, 저녁 무렵이면 그렇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는 월화이다. 오늘 역시 안방의 방문이 굳게 닫혀 있고 조씨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조씨는 부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 사나흘 전에도 마뜩찮은 얼굴로 조씨는 언성을 높였다.

“그따위로 기생 질을 하려거든 당장 때려 치거라! 기생 노릇 일 년이 여염 집 아낙 십 년 산 폭 이라는 걸 왜 모르누? 이제까지 돈 주고 집 사줄 서방이 안 나타는 걸 보면 네가 기생으로 재주가 없거나, 아니면 건성으로 기생 질을 하는 게 분명하거늘, 뭐 하러 손가락질 받는 일을 사서 하느냐 말이다.”

이런 말은 한두 번도 들어 본 것이 아니기에 월화는 그냥 무시하고 만다.

그랬더니 이젠 늙었다고 자신을 무시한다며 펑펑 눈물을 쏟으며 악다구니를 써 댄다. 더욱이 얼마 전까지는 어느 비렁뱅이 사내에게 반했는지 북창동 중국 요릿집까지 놀이를 나가서는 행하 한 푼 못 받아오고, 해우채 까지 본인이 계산 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계속 하더니 요즘은 그런 일은 없어 다행이긴 하지만, 워낙 마음이 여리고 착해 빠져 혹시나 질 나쁜 건달패나 만나지 않을까, 그게 늘 걱정인 조씨이다.

오늘은 안방에서 헛기침 소리조차 나질 않자 월화는 대청을 내려서 복동이가 곱게 닦아 놓은 꽃신을 신고 문밖에 대기한 인력거에 오른다.

“오늘은 어디예요?”

“네 아씨.. 국일관입죠.”

<조선권번>이란 옥호가 적힌 일본정통의 작업복인 검은 핫비를 조여 입은 인력거꾼의 대답이다.

인력거가 종로통으로 들어서자 옥인동과 누상동, 그리고 구리게 쪽에서 사는 기생들이 타고 온 인력거가 합쳐져 길게 행렬을 지으며 황혼이 물든 종로의 철물교 다리를 건너온다.

다리 둑길에는 구부정한 영감부터 시금털털한 중년, 그리고 여드름투성이의 십대, 그리고 벌거숭이 꼬맹이들 까지 모여 서서 향긋한 박하분 내음을 바람에 흩날리며 달려가는 인력거의 장관을 구경하며 마치 기생방을 제집 뒷간 다녀오듯 한 것처럼 이바구들을 하는데

“저 맨 앞에 인력거에 타고 있는 기생이 추월이야. 본래는 평양기생 이었는데 서도창을 아주 잘 부르지. 특히 수심가를 부를 때면 ‘님의 생각 간절하니 나 어히 할까요-’ 바로 요 대목에서는 마렵지도 않은 오줌이 졸 졸 세어 나오는데...”

직접 간드러지게 수심가 한 대목까지 펼쳐 보인다.

그러면 또 한 사내가 지지 않겠다는 듯 뒤따라오는 또 다른 인력거를 가리키며

“그 뒤에 오는 기생은 소향이가 틀림없으렷다! 소향아! 황진이의 애인이 서화담이고 춘향이 서방이 이도령이 분명 하다면 너 소향은 이 춘보의 것이니라.. 내 곧 널 찾아 갈테니 목욕재계 하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어느 세월에.. 소향이 다 늙어 꼬부랑 할멈 됐을 때?..”

와! 웃음이 터진다. 하루 벌어 밥 세끼 먹기 힘든 서민들도 이런 식으로 기생놀음을 즐기는 것이다.

인력거가 <국일관>에 도착하고 월화가 내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가 기다렸다는 듯 반긴다.

“이제 오시는 구료. 국실 손님이 점심 경부터 오셔서 월화가 왜 안 오느냐? 어서 권번에 전화를 넣어 보아라 라며 성화가 대단하십니다.”

신선노름에 호미자루 썩고, 기생놀음에 이춘풍 짝 난다는 걸 모르고 대낮부터 기생이나 찾는 이 위인은 도대체 누구인고?

월화는 국실(菊室)로 찾아 든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월화는 다시 방문을 나오려고 했다. 영화박사 그 사내다. 그는 혼자 받기 벅찬 술상에 앞에 놓고 앉아 월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더 이상 질질 끄는 것도 나나 이 사내나 못할 짓이다. 월화는 단판이라도 짖겠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사내 앞으로 다가와 마주 앉았다. 그래도 술상을 받은 손님이니 술은 한잔 따라 줘야겠지. 월화는 주전자를 들어 술잔에 따르려는데 이미 술잔은 가득 채워져 있다. 사내는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았으나 온통 눈에 흰 자위가 충혈된 눈빛으로 월화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더니 푹 얼굴을 술상에 박으며 쓰러진다.

“........?”

사내가 쓰러지다니? 그런데 술상에 얼굴을 박은 사내는 눈을 불끈 부릅뜬 채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다. 월화는 비명을 지를 뻔 하다가 겨우 참았다.

얼른 서둘러 방을 빠져 나왔다. 마침 술 주전자를 들고 오는 보이와 마주쳤다.

“김군! 지배인 불러서 얼른 내가 나온 방으로 가봐.”

그렇게 차분히 말하고 기생들이 대기하는 방으로 들어섰다. 월화는 이 방에 정답다. 마치 극장 무대 옆 분장실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기생들도 배우들처럼 정성들여 화장을 하고 고운 옷을 갈아입고 가재눈과 납작한 코를 비관하며 사내들 이야기에 농을 치며 호호 하하- 웃고 모습이 똑 닮아 있다. 불려 나간 월화가 바로 들어오자 한 기생이 묻는다.

“언니! 왜 벌써 나오우?”

그래도 기생들은 월화를 허물없이 대한다. 유명한 배우였거나, 아니면 가난에 팔려 왔거나, 제 팔자 사나워 화류계로 들어 온 이상, 따져 보아야 도토리 키 재기요. 제 얼굴에 침 뱄기다.

월화는 기생 하나에게 피고 입는 담배를 말도 없이 뺏어서 길게 들여 마신다.

담배를 쥔 손이 마구 떨려온다. 동시에 대기실 밖이 시끄럽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손님이 독약을 마셨다!”

“어서! 병원에 전화해서 의사를 불러!”

기생들이 문을 열고 내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월화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목이 타게 담배를 빨아 댄다. 잠시 후 병원 구급차가 와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 술꾼을 실어 갔다.

요정이 끝날 시간, 밤늦게 종로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월화는 지배인과 함께 종로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았다. 술꾼의 주머니에서는 세장의 유서가 나왔다. 한 장은 평생을 수절로 살며 외아들을 키운 홀어머니에게, 한 장은 처와 자식에게, 그리고 또 한 장은 월화 앞으로 쓴 것이었다.

사복형사는 대뜸 유서를 보이며 두 사람 사이가 어떤 사이였냐며 호통을 친다. 더욱이 형사가 직접 읽어주는 유서의 내용은 정말로 가관이다.

“지상에서 못 다 박은 활동사진은 저승에서 다시 박읍시다. 그때까지 부디 은인자중 만수무강 하소서.”

형사는 마치 신소설을 읽듯 감정을 넣어 큰 소리로 읽는다. 월화는 정말 어의가 없다.

“이 유서 내용이 다 말하고 있지 않소? 그 남자에게 활동사진을 박는다고 돈을 얼마나 뜯어내었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월화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긴 요즘 기생조합에서도 기생들을 동원해 영화를 찍는다는데 내가 이 작자를 꼬여내 영화를 찍겠다며 제작비를 갈취한 경우가 되었다. 허긴 처음엔 그런 공상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하루는 농담처럼 월화가 사내에게 물었다.

“당신의 부자 아버지는 언제 죽는데요?”

그러자 사내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미 십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부친이 살아 돌아기라도 했담 말이요?”

그러면 그날 명월관에서의 호언장담은 뭐람 말인가?

“돈 많은 아버지를 둔 친구 녀석들이 아니꼽고 한편 부러워서 해본 소리요.”

이런... 순 가난뱅이 이었잖아? 어느새 월화는 자신도 모르게 기생의 본색이 나온다.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고.. 어느새 나도 사내를 이재로 따지는 습성이 몸에 밴 것인가? 더욱이 그런 그가 이젠 보지도 않은 서구의 영화들을 잡지를 통해서 읽고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상식으로 떠벌리는 것도 이젠 짜증이 난다.

“영화의 이즘은 날로 변화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일어 난 순수영화와 초현실 영화를 비롯하여, 독일에서 나타난 절대영화와 표현주의 영화, 영국에서 시도되는 다큐멘터리 영화, 러시아에서 펼쳐진 몽타주 론 에 의한 영화, 오락성을 추구한 미국영화 등, 다양한 세계의 영화가 만들어 지고 있는 이때 조선의 영화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불시착에 지점에 추락해 헤어 나올 줄 모르고 있으니, 이 아니 통탄 할일이 아닌가?”

“그처럼 조선의 영화가 걱정된다면 영화판에나 뛰어 드시오?”

그러자 그자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다.

“나보고 그런 무식한 사람들과 어울리란 말이요?”

영화판 사람들이 무식하다? 그러면 백남 선생도 무식하고 그의 조감독인 이경손도 무식하고 종화씨도, 다 무식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날 이후, 그 사내를 만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내가 나가는 요정을 어떻게 알고는 오늘은 <태화관>에서 내일은 <국일관> 모래는 <아사원>의 입구에서 밤이 늦도록 서성이며 기다린다. 몇 번은 손님의 방에도 뛰어 들어와 월화를 내놓으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보이들에게 멱살을 잡혀 쫓겨나기도 했다.

그런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놀이가 끝나면 얼른 인력거나 택시를 타고 사라지고 때론 점잖은 손님을 골라 집까지 바래다 달라했다.

월화가 형사의 질문에 대꾸조차 하지 않자 지배인이 한마디 거둔다.

“이 분은 그런 예사 기생이 아닙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은막에 출연 하였던 이월화 양이 십니다”

“뭐요? 영화배우? 아니 그럼 이분이 이월화 여사? 어쩐지 많이 본 듯한 얼굴이 다 했지. 하하...”

금방 표정이 달라진다.

형사의 황송하고 극진한 전송을 받으며 월화와 지배인은 경찰서를 나왔다.

“죽으려면 무슨 용을 못 쓰겠소? 인명은 제천이라 다 지 명대로 사는 거지 뭐.”

그 후 며칠 후 경찰서에서 형사가 호출이 왔다. 병원에 입원해 의식불명이던 그 사내가 죽었단다. 형사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월화를 정중히 모신다.

“사망진단서를 끊으려니 마지막 목격자의 증언이 필요해서요. 유가족들도 그걸 궁금해 하고..”

형사가 가리키는 곳 한곳을 보니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린 늙은 노모와 입성이 구질구실 한 아낙, 그리고 역시 떼 국물이 쪼르르 한 어린 남매가 와 있었다. 그들은 가장의 죽음을 아직도 실감을 못 하는지 아니면 마땅한 직장도 없이 식솔이 밥을 굶는지 먹는지 모른 채 허구한 나날을 온통 영화생각에 골몰하는 그런 꼴이 지겨웠는지 멀뚱히 월화의 얼굴을 쳐다 볼 뿐이다.

노모는 굶주린 살쾡이의 눈으로 지 새끼 잡아먹은 월화를 노려보고 있다. 월화는 다가서자 노모가 악을 쓴다.

“이년! 사내를 잡으려면 돈 많은 사내나 잡을 것이지. 고린전 한 푼 없는 내 아들이 무슨 포한이 졌다고 죽이냐 죽이길. 이 불 여시 같이 악독한 기생 년아! 아이고 아이고.. 가엾고 불쌍한 놈 내 아들 장호아!”

그제야 그 사내의 이름이 장호란 것도 처음 알았다. 노모의 악에 바친 울음과 반대로 월화가 그들에게 바짝 다가서자 아내와 아이들은 도리어 겁을 먹은 표정으로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몇 살이니?”

월화는 사내애에게 묻는다.

“...열 살이요”

소년은 겨우 입을 연다.

“학교는?”

“보통 학교 3학년 이예요.”

월화는 그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음속으로 말한다.

“그래, 너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너의 아버지 같은 허깨비 영화박사가 되지 말고 조선영화를 빛낼 진짜 영화박사가 되렴.”

월화는 핸드백을 열어 그 안에 있는 지전을 모두 앙상한 아내의 손에 쥐어 주고 경찰서를 나왔다. 이제 그는 죽었다. 이제 그의 박식 찬란한 영화상식과 영화이야기는 다시는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어디에선가 그런 영화 박사는 수도 없이 생겨나고 만들어진다. 영화는 영화를 만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제 저승에서 영화잡지와 이론서를 뒤적이며 세계영화의 동향과 조선의 영화를 걱정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라 월화는 서글픈 웃음이 입가에 세어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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