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부터 짐 모리슨 까지 - 프랑스 공동묘지 관광
쇼팽부터 짐 모리슨 까지 - 프랑스 공동묘지 관광
  • 김세원
  • 승인 200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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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라쉐즈를 찾다. / 김세원


[인터뷰365 김세원기자] 우선 작가부터 살펴보자. 몰리에르, 라퐁텐, 오노레 드 발자크, 제라르 드 네르발, 마르셀 푸루스트, 기욤 아폴리네르, 알퐁스 도데,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


영화배우로는 이브 몽땅과 시몬느 시뇨레 커플, 가수 에디트 피아프, 작곡가 벨리니, 로시니, 비제 화가 앵그르, 도미에, 카미유 코로, 으젠 들라크르와, 테오도르 제리코, 마리 로랑생,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 샹펠리옹,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 경제학자 생 시몽, 물리화학자 가이 뤼삭, 은행가 제임스 드 로스차일.


이들만이 아니다. 폴란드 작곡가 프레데릭 쇼팽부터 영국의 희곡 작가 오스카 와일드,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 그리스 출신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 6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 사이키델릭 록 그룹 ‘도어스’의 리드 보컬 짐 모리슨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정답은 지난 200년 동안 파리에서 활동하거나 생을 마감한 유명인들로서 모두 한 곳에 묻혀있다는 것이다. 파리 20구 Rue de Repos 16번지에 있는 페르라쉐즈(Pere Lachaise)의 입구에는 유명인들의 무덤을 표시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지도에 적힌 유명인사들의 명단을 읽다보면 프랑스판 후즈후 인명사전을 보는 것 같다.


파리에 도착한 뒤 아침식사를 끝내자마자 페르라쉐즈를 찾았다. 지난 4년동안 파리에 다시 들르면 반드시 가 보겠다고 수없이 벼르던 바로 그곳이었다. 시선이 닿는 곳까지 크고 작은 돌을 깔아 만든 통행로를 따라 가로수가 줄지어 서있고 양쪽 가로수 너머로 크고 작은 무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 둥그런 봉분과 상석 묘비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공동묘지와는 달리 제각기 다른 모양의 묘석과 비석들이 경연대회라도 하듯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공동묘지라기보다는 산책하기 좋은 야외조각공원이란 표현이 더 맞는 듯 했다.돌보는 이 없이 오랜 풍상에 시달린 묘석들이 제멋대로 쓰러지고 푸르스름하게 이끼가 끼어있어 음산한 체코 프라하의 유태인 묘지와도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릿결, 터질 듯 한 육체를 간신히 가리고 있는 주름진 옷자락... 지금이라도 금방 묘석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관능적인 조각들이 풍화된 백골들을 지키는 수문장이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거기에 딱딱하고 차디찬 돌덩이와 한 떨기 붉은 장미의 기막힌 대비가 유한한 인간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이중주를 연주하는 듯 했다.


운 좋게 묘지 투어중인 프랑스 할아버지 할머니 그룹을 만나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유명인사들의 무덤을 골라 돌아 볼 수 있었다. 가이드를 맡은 무슈 르르와(Le Roi는 왕이란 뜻)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망자의 삶과 업적에서부터 무덤의 양식과 미학적 특징, 페르라쉐즈의 발전 과정에 이르기까지 시종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본명이 에디프 조반나 가시옹인 에디트 피아프(1915~1963)의 무덤 앞에서 그는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과의 사랑과 비극적인 이별, 148cm의 조그만 체구지만 열정만큼은 거인이었던 그녀의 삶을 옛날 사진들을 보여주며 설명한 뒤 준비해온 커다란 녹음기를 틀었다. 그녀의 대표곡이자 직접 작사한 ‘사랑의 찬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혀를 몹시 굴리는 프랑스 남부 발음에 우수에 젖은 그녀의 목소리가 일상의 외피를 뚫고 잠들어있는 정서를 일깨우는 듯 했다. 그는 무덤 주인공들의 생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을 넘겨 가며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삶과 사랑, 업적을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속삭이듯 듯 설명해나갔다.


프레드릭 쇼팽(1810~1849)의 무덤도 아직 시들지 않은 꽃다발로 덮여 있었다. 쇼팽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폴란드에서 가져온 흙으로 덮였으며 그의 심장은 누이가 폴란드로 가져가 폴란드 땅에 묻혔다. 쇼팽의 무덤을 지키고 있는 비탄에 잠긴 뮤즈는 그의 연인이었던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상드의 사위가 조각했다고 한다.

가장 인상적인 무덤은 신문기사를 통해 나폴레옹 3세의 사촌동생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스물 두 살에 죽음을 당한 빅토르 느와르(1848~1870)의 무덤(사진)이었다. 공화주의자로 왕정에 반대했던 그는 1870년 1월 10일 두 발의 총을 맞고 사망했으며 이틀 뒤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10만여명의 군중이 참석해 왕정 반대 시위를 벌였으며 결국 프랑스 제2 제정은 무너지고 만다. 그가 총을 맞고 쓰러졌던 순간을 포착한 무덤위의 청동상은 떨어진 모자, 망토와 자켓의 주름,풀어젖혀진 셔츠 사이로 박힌 총알까지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의 무덤에도 이제 피기시작한 백합과 장미가 여러 송이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페르라쉐즈에는 유명인의 무덤만 있는건 아니다. 이른아침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코를 찌르는 향냄새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유럽의 공동묘지에 향냄새라니. 호기심에 이끌려 향냄새를 따라 가보니 키가 자그마한 동양 할아버지가 동양식 비석앞에서 향을 피워놓고 절을 하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이민온 자신의 아버지 묘소라면서 아버지가 인도차이나전쟁에 프랑스군으로 참전해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자랑했다. 크리스찬의 묘지는 성모 마리아나 천사, 십자가상 등으로 장식돼 있었지만 유태인이나 이슬람교도의 묘지는 보다 단순했다.


서양 중세 스콜라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 파리대학 교수를 지내고 노트르담 성당 참사회원이었던 그는 동료 참사회원인 풀베르의 소개로 나이 서른아홉에 풀베르의 조카 엘로이즈(1101~1164)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된다. 엘로이즈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철학 문학에도 뛰어난 미모의 열 일곱 살 난 처녀였다.


독신이어야 하는 참사회의 규율도 버리고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 빠져들었고 두 사람은 22년이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에 휘말렸다. 이 사실을 알게된 풀베르가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했을 때 이미 엘로이즈는 임신중이었다.


엘로이즈는 아들을 낳았고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아벨라르의 장래를 위해 한 집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눈을 피해 만나곤 했다. 아벨라르의 권유로 엘로이즈가 수녀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풀베르는 불같이 분노해 사람을 시켜 잠든 아벨라르의 성기를 잘라버리게 한다. 나이 마흔에 거세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 아벨라르 역시 수도원에 들어간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못한 채 편지로 영적인 사랑을 나눴다. 1142년 아벨라르가 사망하자 엘로이즈는 시신을 거둬 매장하고 20여년 동안 그의 무덤을 지키다 숨을 거뒀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 알려졌다. ‘신 엘로이즈’를 쓴 사상가 장 자크 루소를 비롯해 후세의 숱한 문인과 작가들이 두 연인의 사랑을 소설과 노래로 기렸다.


2000년 뉴욕타임즈는 자신의 삶을 파멸시킨 열정을 선택한 뒤 주저와 후회없이 그 길을 걸어간 엘로이즈를 12세기에 21세기의 삶을 살다간 여인이라며 ‘나의 밀레니엄의 전형‘ 4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이 밀레니엄의 연인은 지금 페르라쉐즈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루이 16세의 고해신부였던 프랑수아 드 라쉐즈 신부(페르 라쉐즈)의 이름을 딴 페르라쉐즈공동묘지는 나폴레옹의 명을 받들어 1804년 5월21일 파리 동쪽 루이언덕에 동묘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건축가인 브로니아르가 전체 조경을 맡아 5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고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다양한 조형물을 건립해 로마스타일의 네크로폴리스(죽은자의 도시)로 꾸몄다. 파리 5구 7구 8구의 교회내에 있던 납골당이나 무덤의 유골들이 옮겨졌다.


도시 계획가였던 니콜라스 프로쇼는 당시만해도 도시 외곽에 위치했던 묘지이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1804년 파리시 당국을 설득해 극작가가 몰리에르와 우화집으로 유명한 라퐁텐의 유해를 이장하면서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했다. 1806년에는 나폴레옹의 명으로 앙리 3세의 왕비였던 루이즈 드 로레인(1601년 사망)의 유해가 이장됐다. 1817년에도 밀레니엄의 연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유해 이장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같은 마케팅 전략이 주효해 죽은 뒤 유명인들과 함께 묻히고 싶어하는 부자들의 무덤 구입 신청이 줄을 이었다. 이곳이 인기 매장지로 떠오르면서 이 땅의 원소유자였던 제임스 바론은 전체 땅값으로 받은 돈보다 더 비싼 값을 주고서야 무덤 한기를 살 수 있었다.


1776년 프랑스 국왕은 도시 위생과 공간 활용을 위해 묘지 정비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고 묘지에 조각과 조형물들을 설치하도록 적극 권장했다. 1786년에는 위생 상의 이유로 레알 식품시장 근처에 있던 이노센트 묘지가 문을 닫으면서 파리 시내의 공동묘지 건립이 금지됐다. 당시 파리의 하수도는 이미 포화상태였고 이노센트 묘지에서 나는 악취가 도시 전체를 뒤덮어 사람들은 질병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후 파리 교외 북쪽에는 몽마르트르, 남쪽에는 몽파르나스, 동쪽에는 페르라쉐즈 공동묘지가 각각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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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김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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