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10)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10)
  • 유지형
  • 승인 2009.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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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여배우의 꿈 / 유지형




(10) 은막


[인터뷰365 유지형] 조씨는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문엔 금강산에 백일기도를 드리러 갔다고 했다. 웬 백일기도? 그 나이에 아들 딸 낳아 달라고 지극정성을 드릴 일도 없을 테고... 그 방직공장 사장한테 돈푼께나 뜯어 낸 모양이다.

하여튼 그녀가 백일씩이나 집을 비운다니... 그건 천만 다행.. 두 다리 쭉 뻗고 잘 일이다.

얼마 전 까지 조씨는 정숙을 얼마나 귀찮게 했는지 모른다. 이십일 간의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극단은 몇 일간의 휴무로 들어간다. 단원들 모두에게는 제법 두툼한 월급봉투가 돌려졌다. 가뜩이나 공연에 관객이 몰려 매일 매일을 만원사례봉투를 받은 단원들이다.

보통 봉투 안에는 10전에서 1원 정도로 배우나 스태프, 그리고 수표, 매표, 기도주임, 관리인, 청소부까지 구분 없이 모두 받는 돈으로 10전의 경우는 객석이 찬 경우, 그리고 1원은 입석 까지 가득 들어찼을 때 받는 보너스 같은 것으로 공연 다음날부터 극장이 입석까지 가득 차는 만원사례를 이뤘으니 그 금액만도 만만치 않다. 정숙도 이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으고 출연료 봉투까지 챙겨 조씨에게 안겼다.

조씨는 우리 딸 고생 했다며 정숙을 미스꼬시 백화점 숙녀복 매장으로 데려가 최신 유행하는 양장을 춘추복과 추동복 까지 서너 벌 씩이나 맞추고 뒷굽 높은 뾰족구두까지 색색으로 서너 켤레를 사준다.

정숙은 괜히 미안하고 고마워서,

“이참에 엄마도 옷 한 벌 해요. 요즘 중국 비단에 좋다던데... 한복부가 어디지?”

“애야 난 됐다.”

조씨는 굳이 손사래까지 치며 거절하며 한복부로 가려는 정숙을 잡아 당겨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백화점 2층에는 양식부 식당이 잘 꾸며져 있다.

입구에는 구십 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보이의 안내로 모녀는 햇살 좋은 창가에 마주 앉는다.

보이가 컵에 물을 따라주고 다시 정중하게 메뉴판을 내민다.

“애! 정숙아 너 뭐 먹을래?”

“엄마가 주문을 하세요.”

“이 집은 비프 스테키가 맛있단다.”

“그럼 그렇게 해요.”

“저.. 보이양반! 비프 스테키를 너무 굽지 말고 가져 와요. 그리고 삐루도 한 병 부탁해요.”

“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다시 보이는 정중히 물러가자 연신 기분이 좋은 조씨이다.

“얘! 거길 보렴. 저기 인왕산이며 경복궁이 다 보이지 않니?”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시원하게 트인 창밖을 바라본다. 실로 오랜만에 모녀는 외식을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맥주 한잔 술에 취기가 오르는지 조씨는 손수건을 눈가에 찍으며 눈물을 흘린다.

“너에게 잘못 한 게 많구나. 이 어미가 잘못 했다.”

“아이...또 이래요. 누가 보잖아요?”

정숙은 주의를 의식하는 척 조씨를 달랜다.

조씨는 아랑곳없이 더욱 눈물을 훔치며

“배우가 천직인 걸 모르고 남자들이나 만나라고 했으니 너도 이 어미가 원망스럽지? 밉지 그렇지?”

더욱 자격지심이 동 한 듯 묻는다.

“참... 엄마도 주책이네..아니면 망령이라도 떠는 건가?”

“이년아! 니 속에 화가 열 길이면 내 속에 화는 백 길 천 길이다. 내가 왜 그걸 모르겠니?”

“아이 정말 왜 그래요? 이러려고 나왔수? 정 이럴 거면 그만 집에 갑시다.”

정숙은 짜증을 내는 척 한다. 오랜만에 모녀지간의 다정한 회포, 비록 나를 낳아준 친모는 아니지만 월화는 한 번도 남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녀 역시 그럴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는 나도 모르게 그런 그녀의 인생이 가엾고 나 자신 역시 불쌍해진다.

그런 조씨를 달래기 위해 한강까지 전차를 타고 가 놀이배도 타고 저녁에는 극장에 가서 활동사진도 보았다. 영화는 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슬랩스틱 영화로 동물원에 간 찰리가 그곳에서 동물들과 뒤죽박죽 소동을 부리며 웃음을 자아내는 내용이었다. 조씨는 배를 잡고 웃으며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못해 정숙의 어깨를 때리며 웃다 지쳐 눈물을 찔끔 짤 정도로 박장대소이다. 그러면서 내일은 창경원에 동물구경을 가자고 한다.

그런 조씨가 보름 만에 금강산에서 집으로 돌아 왔다. 비록 찌그러진 대문이지만 활짝 문을 열어 재끼고 들어서는 조씨는 부엌일을 하는 어린 복동이를 불러 내 대문 앞에 소금을 뿌리라고 했다. 그러더니 대뜸 정숙에게 하는 말이

“얘... 너 내 꿈을 사렴.”

마치 돈에 독이 오른 장사꾼처럼 거래를 터 온다.

“꿈이라뇨?”

“내가 동무들과 금강산 해금강을 다녀오지 않았겠니? 해금강은 산과 바다가 인접한 곳이라 지신, 산신, 해신이 함께 사는 곳으로 보통 신묘한 곳이 아니란다. 그런데 어젯밤 잠자리에 이 세 삼신이 내 꿈에 현몽하여 지신은 꽃신을 신기고, 해신은 곱디고운 비단 옷을 입히고, 산신은 번적 번쩍 빛이 나는 금관을 내 머리에 씌우는 게 아니겠니? 분명 이 꿈은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 헌데 다 늙은 년에게 꽃신이며, 비단 옷이며, 금관이 무슨 소용이 있겠니? 그래 그 길몽을 우리 딸년에게 주십사 사 내 단숨에 이리 집으로 달려 왔느니라.”

“난 또 뭐라고?”

정숙은 싱겁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간다. 조씨는 큰일 날 것처럼 정숙을 따라 들어가며

“아니? 이년이 이 어미의 지극정성도 몰라보고, 이 꿈은 분명 네 년이 창명 광휘할 꿈이 분명 해! 두고 봐라. 분명 내 년한테 사흘 안에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더욱 답답하다는 듯 투덜댄다. 그러면서 더욱 바싹 다가서며

“얘야.. 지전 한 장만 날 줘보렴.. 분명 너한테 좋은 일이 있을 테니?”

사정없이 애원하는 조씨이다. 정숙은 우선 귀찮기도 하고 혹시, 행여나 하고 지전 한 장을 건넨다.

오늘은 오후에나 되어서 정숙은 극단 연습실로 향했다. 요즘은 마땅한 공연도 없고 해서 그저 소일거리로 배우들이 모여 연기 워크숍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워크숍은 뒷전이고 끼리끼리 모여 잡담들을 나눌 뿐이다. 남배우들은 담배를 나눠 피며 술과 여자이야기가 전부인 듯 낄낄 거리고 여배우들 역시 용모와 몸매관리가 최대관심사인 모양이다.

“큰일이야... 요즘 허리가 너무 굵어 졌어.”

“그래도 날씬 한데 뭐?”

서로의 몸매들을 확인하는 눈빛들이 곱지가 않다. 그래도 그중에 정숙이가 제일 날씬하다. 무용학원을 다니다 극단으로 들어온 허소정이 묻는다.

“정숙아! 넌 허리가 몇이니?”

“나..? 글쎄.. 손 뼘으로 서너 개?”

“어머.. 어머! 정말 개미허리네.”

여배우들이 수다를 떨자 설희가 혀를 쏙 내민다.

“흥... 조심해! 개미허리 부러질라.”

오늘도 여장을 한 이응수가 그런 설희의 밤낮 없이 삐지는 꼴이 가당치 않은 듯 한마디 한다.

“넌 화장이 가부키 배우처럼 그게 뭐냐?”

“저 맨 얼굴인데요? ”

“어쩐지 특이한 분장이다 그랬지.”

그 말에 설희는 울상이 되고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이때, 백남이 종화와 함께 극단 연습실을 불쑥 들어왔다. 백남이 연습실을 들린 것은 오랜만이었다. 보통 하루에 한번 씩은 극단 사무실에 들른 것 같았으나 요즘은 단장실에만 있을 뿐 바로 옆방인 연습실은 찾지 않았다.

백남은 뭔가를 구상하는 듯 바쁜 나날을 보냈고 단장실에는 처음 보는 듯 한 양복쟁이들이 다녀가고 당꼬 바지에 도리우찌를 쓴 예리한 눈빛의 콧수염의 사내가 찾아 와 긴 밀담을 나누고 가기도 했지만 단장실 안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걸 보면 그 자는 사찰과 형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백남은 몇 달 전 조선최초의 연예잡지 <예원>을 창간 한 일과, 또 다른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정숙은 알 수도 없었고 알아야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백남이 불쑥 연습실로 들어와 말없이 여배우들의 얼굴을 한명.. 한명...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 했다.

춤을 잘 추는 허소정. 대사를 잘 외는 이영자. 전혀 재능이 보이지 않는 김애심, 연극에 관해 모든 것이 완벽한 김설희. 그런 백남의 시선이 설희를 한참 바라보다가 제 딴엔 여역 이라고 함빡 교태를 부리는 이응수를 건너뛰고 정숙의 얼굴에 꽂혔다. 그리고는 정숙의 얼굴과 몸매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정숙은 그 시선에 어쩔 줄 몰라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렇게 한 참을 보더니 백남은 시선을 돌려 말없이 연습실을 나갔다. 그 뒤를 종화도 빠르게 뒤쫓아 나간다. 긴장의 순간이 안개처럼 밀려 연습실을 빠져 나갔다.

여배우들이 참새처럼 재잘대기 시작했다.

“곧 공연에 들어가려나 봐.”

“공연이 아니고 활동사진을 찍는다나봐.”

“활동사진이라니? 우리 조선에서도 드디어 활동사진을 찍게 되는 거야.”

“내가 들은 소문엔 총독부와 체신국에서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제작하는 영화를 우리 단장님께서 각본과 감독을 맡으셨대.”

“와!”

순간 환호와 함께 여배우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남배우들도 궁금증에 한곳으로 모여든다.

“제목이 뭐라던가?”

“뭐...?월하의 맹서라나?”

“제목 한번 발칙하군! 달빛아래 맺어진 남녀의 로망스라 핫하..”

“호호.. 로맨틱하고 좋지 않아요.”

남녀 배우들의 배를 잡는 웃음소리가 연습실을 퍼져 나갔다.

곧, 여배우들의 웃음소리는 자조적인 시름으로 변한다.

“우린 별 볼일 없어... 단장님께서 정숙이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나가셨잖아.”

“조선최초 은막의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로군!”

이 말은 노골적으로 질투의 눈빛을 보내는 설희의 발언이었다.

“설희야? 내가 어떻게 활동사진에 출연해?...설마 나 일려고?”

이렇게 변명 해보지만 정숙은 정말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고 빈다. 또 한편, 꿈을 지전 한 장에 산 행운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본다. 그런데 정숙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간 후 백남에게 선 아무 기별이 없다.

“그럼 그렇지? 조선에서 활동사진 제작이라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혹시 연쇄극이라면 또 모를까?”

남녀 배우들도 실망한 눈치이다. 이미 오래전 조선은 당시 일본과 미국 구라파 등 외국에서 만든 활동사진들이 수입되어 관객들이 극장에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이 분짜리로 활동사진의 기술적 진화를 보여주는 영화들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영화가 기업화 되며 모든 영화는 극영화의 형식을 띠게 된다. 미국영화는 코미디 영화와 서부극이 많았고 수십 명이 말을 몰고 광야를 달려가는 장관을 연출하며 주인공 보안관이 악당을 향해 쌍권총을 뽑아들면 변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불 나간다! 불 받아라!”

큰 소리로 소리치고 입으로 탕! 탕! 총소리를 내며 으윽- 악당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소리까지 낸다. 그러면 극장 안은 박수가 쏟아지고

“저 놈! 나쁜 짓만 하더니 잘 죽었다!”

관객들은 통쾌한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온다. 특히 코미디 영화는 바스트 키튼이나 헤롤드 로이드 등의 희극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와 찰리 채플린의 초창기 영화가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일본영화는 신파극이 차지했다. 주로 가정비극과 화류비련극의 로맨스, 그리고 사무라이의 칼쌈영화가 주류였다. 특히 불란서 영화 <지고마>는 파리의 일간신문 연재물로 악당을 주인공으로 경찰을 골탕 먹이는 범죄 심리극 영화 이다. 이 영화는 조선에서 첫 번째로 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영화로 기록되기도 했는데 나라를 빼앗긴 민중들이 경관을 실컷 골려주는 악의 영웅에 내심 힘찬 박수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이 수없이 수입되어 극장에 관객들이 몰리자 이에 고무 받은 흥행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우리도 활동사진을 찍어 보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 비용이나 기술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만들어 진 것이 연쇄극이다. 연쇄극이란 연극도중 영화를 잠시 상영하여 극의 진행을 돕는 형식으로 불과 그 길이가 사 오 분의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관객은 필름 속에 살아 난 조선 사람의 힘으로 만든 이 필름에 감격하며 갈채를 보내 왔고 연쇄극이 공연되는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 찼다. 정숙은 백남이 연쇄극이라도 만들어 보기를 원한다. 연쇄극을 통해서라도 스크린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이 보고 싶다. 과연 내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나의 연기력은.. 또 한 나의 미모는... 과연 어떨까? 무대 위에 연극으론 그걸 통 알 수 없지 않는가? 그렇게 사나흘이 지났다. 연습실 문이 열리고 종화가 빠금히 얼굴을 내민다.

“정숙아! 선생님이 부르셔.”

정숙은 순간, 행운의 세 선신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알았다. 옷차림을 단정하게 한 후 심호흡을 하고 단장실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엔 백남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며칠 전부터 들랑거리던 양복쟁이 사내들도 있고 당꼬 바지에 도리우찌를 눌러 쓴 콧수염의 분명 형사는 아닌 사내도 정숙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백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얼떨떨하게 서 있는 정숙을 가리키며 소개한다.

“이번 활동사진을 박을 주인공 여배우요.”

그 말에 제일 놀란 건 정숙이다.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다.

“그것도 내가 주인공 여배우라니?”

먼저 입을 연건 도리우찌 쓴 촬영기사 이다.

“마스크가 아주 좋아.”

일본어 였다. 그러자 다른 사내가 또 한마디 거둔다.

“얼굴이 희어서 조명발을 잘 받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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