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랑한 여자 최은희
[인터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랑한 여자 최은희
  • 김두호
  • 승인 201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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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고백 인터뷰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2월 17일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19일 북한의 공식 발표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과연 어떠한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인가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세간의 관심은 여배우 최은희 여사에게도 쏠렸다. 최 여사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의해 납북되어 8년여 동안 북한에 머물며 지근거리에서 김 위원장의 여러 면을 봤다. 인터뷰365는 2007년 11월 최 여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 위원장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그 인터뷰를 다시 소개한다. [편집자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 한번 나누고 그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구도 그를 잘 모른다. 그러나 지근(至近) 거리에서 보호를 받으며 8년여 머물렀던 영화배우 최은희는 말할 수 있다.


고전적인 미색의 대표적인 여배우 최은희.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신이 내린 80여년 삶의 여정은 행복과 슬픔, 행운과 비운의 양극이 반복과 반전을 거듭한 대하장강(大河長江)의 드라마였다. 남과 북으로 갈라 선 현대 민족사의 기구한 비극까지 몸 안에 녹물처럼 녹아 있는 풍운의 여배우 최은희. 그럼에도 화장을 하고 다소곳이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난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디에도 그 무겁고 거대한 생애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수줍음이 있고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따뜻하고 지고지순한 아내이며 어머니의 모습이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라는 운명 속에서 영화와 삶을 함께 나누었던 남자, 납북과 탈출로 함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숙명적인 동반자 신상옥 감독도 이제 그녀의 곁에 없다. 그녀는 황혼 속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또 누굴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신감독이 별세한지 1년 반이 지났다. 많은 사람들이 최여사가 외로움과 허전함을 어떻게 달래고 사는지 궁금해 한다.
아직도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금방 현관문을 들어서며 “최여사”하고 부를 것같다. 어디론가 떠난다 해도 잊을만하면 내 옆으로 돌아왔던 사람이라 빈자리가 잠시라는 생각이 든다. 또 주위 사람들이 나를 외롭게 버려두지를 않았다. 슬퍼할 새도 없이 지내고 있다. 감독님 (최여사는 부군을 감독님으로 부르며 살았고 신감독도 생전에 부인을 최여사로 불렀다)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다. 그 일에도 내가 할 몫이 많고 영화관련 행사나 각종 초청 모임에 나가는 일로도 분주하다. 한동안은 감독님과 나의 자서전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또 지난 10월말에는 과거 정을 나눈 사람들이 독촉을 해서 미국을 다녀왔다.


기념사업은 기념관을 세우는 일이 먼저인데 어디에 마련되는가? 신감독 타계 후 사단법인체로 추진해온 ‘신상옥감독 기념사업회(회장 강신성일)’ 명칭은 최여사의 이름을 포함시켜 ‘신상옥 최은희 기념사업회’로 바꾸는 것이 뜻이 있다고 본다. 부부로서보다 영화인으로서의 활동과 업적에서도 두 사람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데 자기 이름의 기념사업을 한다는 게 괜찮은지 모르겠다. (외국은 사례가 많고 국내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생존 인물이 미리 자신의 기념도서관을 만들어 두고 있다는 설명에 그녀는 매우 상기된 표정으로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직 기념관을 세울 땅을 구하지 못했다. 감독님은 평생 영화를 만들면서 돈도 많이 벌었지만 영화만 알았지 돈을 모르고 산 사람이라 남긴 것이 없다. 많은 후배 영화인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언젠가 꿈을 이룰 것으로 본다. (신상옥감독 기념사업회는 최여사와 인터뷰 때 나온 인터뷰365의 제안을 받아들여 명칭을 그후 ‘신상옥 최은희 기념사업회’로 개칭했다)


자서전은 언제부터 어떻게 준비한 것인가?

감독님이 살았을 때 써 둔 유고를 정리해 <나는 영화였다>는 제목의 신감독 자서전, 그리고 별도로 <최은희의 고백>이라는 나의 책을 따로 만들어 11월 27일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돈을 벌면 기념사업회를 돕겠다.


최여사의 생애를 표현할 때 흔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라는 말을 한다. 자신은 스스로의 생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파란만장하다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지만 굳이 물어오니 그게 나의 인생이었다는 대답이 나온다. 감독님과 나의 인연도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일,,,그것도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길이 숙명이라면 그렇게 꼼짝 못하고 겪어야했던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 이야기 중에는 사람들이 오해하고 잘못 알고 있는 헛소문도 있다.


사실 최여사가 겪은 사건 중에 사람들이 서로 아는 척하며 화제로 삼는 것들이 많다. 6.25 때 고생한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다. 국군 위문 길에 인민군에게 붙잡혀 평양부근까지 끌려 다니다가 국군의 도움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인민군들에게 여자로서 치명적인 고통을 당했다는 대목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인민군은 사상이 다르고 적대행위를 하면 무차별 살상했지만 사사로운 욕심에서 부녀자를 건드리지 않았다. 내 이종사촌 동생도 경찰가족인데 살고 있는 마을 뒷동산에서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했다. 그 무렵 내가 여자로서 당한 피해와 가해자는 오히려 우리 쪽에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물이다. 인민군들이 집단으로 내 몸에 수모를 가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1943년 극단 아랑을 통해 연기를 시작한 뒤 50년대부터 영화배우로 영화사에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북한에 가서도 연기활동을 계속해 신감독과 함께 대표적인 영화인으로 업적을 세웠다. 연기자로서의 생애에 스스로는 어느 정도 만족하는가?

남과 북에서 연기활동을 한 배우라는 생각에 이르면 나 자신도 묘한 기분을 느낀다. 어느 곳에서든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는 데 자부심을 갖는다. 이쪽에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열녀문> <동심초> <빨간마후라> <벙어리 삼룡이> 등 주로 신필름 작품에 출연해 편수가 130여 편으로 많지 않다. 그러나 젊고 인기가 많을 때도 겹치기 출연을 않고 이미지에 맞는 역을 선택했다. 후시녹음시대에도 내 목소리를 직접 살려 다작이 어려웠다. 아직도 하고 싶은 역이 있다. <보은의 구름다리>를 통해 비구니 역은 해봤는데 수녀 역을 못해봤다.



얼마 전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잠깐씩 만나고 온 사람들이 많지만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8년2개월의 북한 생활 중 그곳에서 신감독과 재회하기 전까지 5년여 동안 김위원장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한 최여사 만큼 김위원장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물론이다. 우리만큼(신감독을 포함) 김위원장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물에 대해 좋고 나쁜 것을 평가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곳에서 접하는 모든 뉴스나 이야기들이 찬사기 때문에 좋은 점만 부각된다. 시작이 어떻게 이루어졌던 김위원장과 나는 영화가 인연의 고리가 됐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대한 애정만은 깊이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알려진 대로 우리가 갖지 못한 <빨간 마후라> 등 옛날 필름들을 대부분 소장하고 있었다. 내가 출연한 50년대 작품도 그곳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남편역 신영균과 애첩 역 윤정희가 본처역의 나를 괴롭히는 영화 <저 눈밭에 사슴이>라는 작품을 보면서 김위원장은 얼마나 마음 아팠느냐며 위로를 해주었다. <상록수>는 그곳에서 영화 교육교재로 활용하고 있었고 <평양 폭격대> <빨간 마후라>는 반공영화인데도 잘 보존하고 있는데 놀랐다.


신감독과 함께 북한 탈출 후 미국에 머물다가 귀국한 직후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패널리스트로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쓴 수기를 읽고 두 사람에게 질문을 했지만 김 국방위원장이 최여사에 대한 호감이 특별했다는 점이 최여사의 운명을 바꾼 동기였고 그것이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가까이서 느낀 인간적인 면모를 듣고 싶다.

좋아하지 않았다면 나를 데려가지 않았을 것 아닌가? 남포항에 내려(1978년 1월14일 홍콩에서 출발한 납북선 ‘능라호’ 편으로) 마중나온 김 위원장이 “내가 김정일 입네다”라고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을 때 이젠 죽었구나 하고 겁이 났지만 함께 리무진 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면서부터 정중하게 대하는데 호의를 느꼈고 마음이 안정되었다. 처음부터 나를 최선생으로 불렀다. 좀처럼 하지 않던 배 멀미로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산보를 권하는 것까지 신경을 써주었다. 그 후 감독님(신상옥)을 그곳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5년간 살면서 김위원장의 특별한 배려가 따랐고 김위원장 가족들과도 만나며 지냈다. 사회주의의 생활 규범이나 분위기가 우리 사회와 다르지만 눈에 띄게 별난 성격 같다는 행동을 나에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특별한 배려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기억에 남는가?

생일 때마다 축하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언젠가 고향 생각, 가족 생각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점심을 먹지 못한 일이 있는데 그걸 알고 집안 일을 돕는 책임자를 불러서 “최선생이 고향 떠나 외롭게 사는데 왜 식사를 제대로 안 챙겨드렸나?”라며 꾸짖는 걸 보고 민망해서 혼났다. 모든 행동을 지도원이나 부부장직의 사람들이 보고를 한 것 같다.


김위원장의 영화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 밖에도 그와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면?

외국영화 필름도 1만여 편 소장하고 있었다. 외국 배우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좋아했다. 또 우리 배우 중 윤정희도 좋아했다. 우리 쪽 TV 드라마를 보다가 사미자가 나오자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감독님은 그곳에 온 후 탈출을 하려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고생했지만 나중에 나를 만나게 하고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감독님은 하루 두 세 시간 자면서 영화에 매달렸다. 우릴 인정해 주고 영화를 만들 수 있게 지원해준 것은 고마웠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살기에는 불편한 사회였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점들이 가장 불편했는가?

지도원이 교대로 와서 혁명사상과 주체사상에 대한 교육을 시킨다. 원래 공부하기 싫어하는데 그런 것이 힘들었다. 함부로 활동할 수 없어서 외로움이 깊어져 괴로워하면 집일을 돕는 여자가 마시지 못하는 술(인삼주)을 권하기도 했다.



최은희가 신상옥 감독과 살던 집, 이제는 혼자서 살고 있는 집은 서울 방배동의 언덕꼭대기에 있는 빌라형 아파트였다. 베란다에는 미국에서 가져온 앵무새 코코와 남편과 함께 가꾸던 화초가 있고, 거실 책장에는 신감독의 손때가 묻은 영화 테이프들이 그대로 꽂혀 있다. 그 중 외국에서 수집한 ‘징키즈칸’ 자료들이 문득 시선을 머물게 한다. 신감독은 생전에 “대하사극 <징키즈칸>을 만들겠다”는 꿈을 입버릇처럼 밝혔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감독은 영화 <징키즈칸> 연출에 대한 생각을 오래전부터 밝혔다. 자료도 많이 모았을 텐데.

한을 안고 떠났다. 아마도 북에 그대로 있었다면 제작비 걱정은 없으니 <징키즈칸>을 만들었을 것이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영화밖에 모르고 살았다. 사실 나와 숙명의 부부라고 하지만 아내도 영화에서 필요하다면 소도구로 활용했을 사람이다. 시간이 있어도 오락이나 다른 취미를 몰랐다. 돈도 영화를 만드는데 필요한 돈밖에 소중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 신상옥으로서 보다는 영화감독 신상옥에 대한 재평가를 받아 기념관사업을 제대로 하고 싶은 것이 지금 나의 소망이다.


불행한 일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화려하고 행복했던 때도 많았지 않은가?

좋은 영화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평가를 받을 때가 나에게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었던 시간들이다. 우리가 북에 있을 때 3년여에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불가사리> <조선아 달려라> 등 17편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물량이었다. 그 중 1985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때 <소금>(신상옥 감독)으로 내가 받은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두고 온 게 서운하다. 러시아산 청석에 지구를 상징하는 금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도 없지만 이곳 신필름 시절에 받은 수많은 트로피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간혹 우리 부부의 50여년 삶이 망각 속에 빨려들어 가 지워진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평소 맺혀 있거나 묻어 둔 이야기는 없는가?

이곳으로 돌아온 후 허전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영화와 함께 산 죄 밖에 없는데 우리 부부의 조국, 나의 조국은 멀리 있다는 느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북에서도 등을 돌린 우리를 곱게 생각지 않을 거고 이곳에서도 돌아온 후 긴 공백기를 극복하지 못해 뜬구름 같이 지냈다. 많은 것이 변해 있다. 감독님도 제대로 재기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떠났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연기활동을 할 수 있다는 기다림에서 산다. 한 번도 은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앉은 의자 정면 벽에는 32살 신상옥 청년의 꽃다운 청춘시절 사진이 걸려있다. 팔순의 최은희의 가슴 속에는 신감독이 여전히 불같이 사랑을 나누던 열혈 청년으로 살아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주인은 앵무새 코코에게 ‘안녕히 가세요’를 시켰지만 그 녀석은 벙어리 행세를 했다. 오는 손님에게 인사는 안 해도 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잘한다는데 장시간에 걸쳐 주인이야기를 엿들은 그 녀석은 생각할 게 많은지 침묵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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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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