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활동 접고 동심으로 돌아간 자연음악가 예민
가수활동 접고 동심으로 돌아간 자연음악가 예민
  • 김우성
  • 승인 200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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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희어지면 노인의 목소리로 다시 노래할 터” / 김우성

 

 

 

 

예닐곱 살쯤 되었을 아이들 눈이 똘망똘망 반짝이며 선생님의 손을 응시한다.

 

“이 악기의 줄을 조여주면 소리가 어떻게 변할까요?”

“............”

“자, 여기 있는 상혁이 얼굴이 가죽이라고 치고 선생님 손가락이 줄이에요. 잘 보세요”

 

이윽고 선생님이 양손으로 한 아이의 볼을 사방으로 한껏 쥐어 펴자 아이가 고음의 소리를 지른다. 순간 지켜보던 아이들의 웃음보가 터진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이었나 새삼 느낀다.

 

[인터뷰365 김우성] 예민이 운영하는 뮤뮤스쿨(Museum & Music School)을 찾았다. 지난 2001년부터 자연과 동심을 찾아다니며 분교음악회를 진행해오던 예민은 최근 음악인류학, 고고학, 음악교육학에 근간을 둔 새로운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제안 중이다.

뮤뮤스쿨 프로그램을 참관하기 위해 서울 구로구에 도착한 것은 정오 무렵. 날씨는 흐릿하고 어두웠으나 허름한 건물 2층 전체에서 새어나오는 형광등 불빛이 따뜻했다. 계단을 올라 교실에 들어서자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홀짝홀짝 차를 마시고 있던 아이들 모습에 미소가 번졌다.

 

주입식이 아닐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아이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소통 할 줄은 몰랐다. 아이들과 함께 자신도 바닥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그가 잠시 후 아이들을 모두 눕히고 눈을 감게 한다. 파도소리가 나는 악기를 들고 아이들 머리 위를 천천히 도는가싶더니 갑자기 있는 힘껏 악기를 흔들어댄다. 천둥번개소리에 주변의 어른들은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아이들은 ‘깔깔깔깔’하며 마냥 웃는다.

수업에는 50 여개에 이르는 전세계의 진귀한 악기가 동원된다. 직접 다뤄보는 체험은 기본이고, 두드리고 만지고 냄새도 맡게 한다. 악기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생겨난 악기인지, 어떨 때 쓰는 악기인 지만 알면 된다. 아이들은 악기의 소리가 아닌, 두꺼비 소리와 비 오는 소리, 바람의 소리를 느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아이들에게 예민이 질문을 던지자 기상천외한 대답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1주일 뒤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꽤 깊숙한 골목에 접어들어서도 좀처럼 발견하기 쉽지 않은, 천장이 나지막한 백반집으로 필자를 초청했다. 뜨끈한 방바닥에 몸을 녹이며 시작된 대화는 한강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의 작업실로 자리를 옮겨 계속됐다.

 

 

음악을 통해 아이들을 자연으로 이끄는 광경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음악의 제목은 무엇이고 누가 만들었다’는 식으로 배우게 될 대부분의 아이들이 딱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소리와 악기를 통한 자연과의 교감이 아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건 우리 모두의 미래라고 할 수 있어요. 날 때부터 음악은 음악인 건데, 아쉽게도 우리는 그러한 음악의 본질을 서양음악의 틀 안에서 마치 지구의 모든 음악을 이해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언어가 있나요. 인도네시아만 해도 수백여 개의 언어가 있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언어와 음악관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가 여태 간과해왔다는 거죠. ‘아이들의 미래가 어떨 것이다’라고 지금 생각할 순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나눴던 음악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 이야기들을 10년 후가 되었든 20년 후가 되었든 아이들이 한 번 되돌아서 생각해보는 시기가 있을 거라고 봐요. 그랬을 때에 훗날 본인들이 몸담고 있는, 내지는 하고 있는 일에 어떠한 영향을 끼쳐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긍정적인 영향이겠지요.

음악이 있어서 행복한가를 물어볼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행복하다고 느낄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되돌아보자는 겁니다. 과연 인간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 음악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음악은 인간에게 어떠한 역할로써 지금껏 함께해 왔는가를. 그런 걸 얘기해주는 학교도 학원도 없었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갖게 해주고 싶은 상상력이 바로 그런 겁니다. 어느 날 피아노가 떡하니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피아노가 내 앞에 오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음악과 인간의 가장 소박하고 진실한 만남, 어떠한 이권도 없었을 만남을 아이들이 느꼈으면 한다는 거죠. 지금의 음악은 수많은 경제논리와 상업논리에 본질을 잃어가고 있잖아요. 우리 수업을 함께한 아이들은 차후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맞닥뜨렸을 때 그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를 음악에서 배우는 겁니다.

 

 

 

 

 

 

나는 아이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수업에 앞서 아이들에게 차를 대접해주더군요. 항상 그렇게 한다죠? 아이들을 하나의 성숙된 인격체로 대해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의 형이 커피를 타주는 거예요. 처음으로 누군가 타주는 커피를 마셔보면서 ‘아 나도 이제 어른이 됐구나’ 하는 우쭐감 비슷한 기분이 들었어요. 어릴 때는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는다는 게 참 기뻤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앉을 공간에 이름표도 놓아주며 ‘이 자리는 이 아이한테 예약 되어있다’라는 의미를 갖게 해요. 공간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할 때 지금 어린이들 교육이라고 하는 것, 아이들이 진정 있어야 하는 곳인가 조차도 의심이 드는 그런 몰려다니는 논리와 몰려다닐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부터 적어도 예민이 만난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특별한 대접을 받게끔 해주고 싶어요. 항상 특별한 만남이 되도록...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어른으로부터 난해한 시집 한 권을 선물 받으며 기분이 묘하면서도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요. 대접받는 아이들의 기분이 상상이 갑니다.(웃음)

처음엔 그랬어요. 내가 어른이니까 아이들에게 차를 대접해주어야지... 그런데 요즘은 내가 어른으로서 아이들한테 차를 타주는 게 아니라, 내 어릴 적 그때 그 아이들에게 소꿉놀이 하듯이 타주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사실 저는 아이들을 특별히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웃음)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 뜻밖인데요?

스스로 어떻게 이런 일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 음악의 모티브에 참 많은 부분이 동심이었고, 그렇게 아이들을 만나옴으로 해서 내가 내 어린 모습으로 돌아가 아이들과의 놀이를 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동등한 만남이 된 거군요. 자연스럽게.

그렇죠.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의 저는 어떻게 보면 조금 더 경험을 많이 한 애라고 할까.(웃음)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가 느낀 이런 얘기는 들어보지 않을래?’하면서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분교음악회 얘기로 넘어가보죠. 시작한 지가 벌써 만으로 7년이 넘었는데요. 어떤 결심으로 시작하게 된 건지, 첫 음악회를 갖기 이전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음악은 무엇인가’에 대한 사고가 당시의 저를 이끌어줬던 것 같아요. 나한테 있어 음악은 무엇일까. 주어진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 노래를 부르던 게 일반적인 견해였고 형식이었는데. 과연 음악이 인간을 그렇게 만났을까? 음악을 통해서 나 자신을 치유하고 표현하는, 이러한 부분을 뒤로한 채 어떤 형식적 틀에 갇혀 그것만이 음악활동이고 그것만이 옳은 표현이라며 살아왔던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 노래가 항상 내 입을 쫓아다녔던 거예요. 그렇다면 이 노래가 어울리는 곳, 이 노래가 불려졌을 때 행복해하는 공간이 있을까 역으로 생각을 하다보니 노래가 행복했다는 제 기억 속 한 부분에 1997년경 조그마한 분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노래하던 시간이 떠올랐던 거죠. 그래서 한 1년 동안 ‘내 노래가 있고 싶어 하는 곳에 가보자’하고 떠난 겁니다.

 

 

 

 

 

 

노래를 부를 때 말 걸던 분교 아이들

 

 

‘분교’라 하면 사방이 자연으로 둘러싸인 최소한의 인공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상상만 해도 황홀해 지는데요. 예상치 못했던 경험도 많으셨겠죠.

말씀하시는 그러한 ‘그림’ 때문에 상당히 많은 방송프로그램에서 오류를 범했어요. 피아노 연주자, 성악가, 바이올리니스트 이런 분들을 초청해 분교에 무대를 설치해놓고 마을 분들을 모셔서 음악회를 열고 그러잖아요. 그건 우리가 생각할 때의 아름다움이죠. 그 곳에서는 그것만큼 어색한 일이 없어요. 그분들은 학교에 모이는 날이 1년에 고작 한두 번, 한 번이라고 하면 운동회예요. 운동회 때 뭐하는지 아세요?

 

(공굴리기와 이어달리기 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돼지고기 삶아서 나눠먹고 막걸리 마시고 그래요. 그게 그곳의 문화예요. 그런 곳에서 클래식 공연을 한다 해도 마을 분들은 어찌되었건 운동장에 오셨으니까 여느 때와 똑같이 먹을 것 나눠먹고 하는 거죠. 현장이 어떻겠어요. 분교라는 공간과 공연이 안 만나지는 거예요. 그런 광경을 아름다운 음악회로 편집해서 내보내는데, 도시문화가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지...(짧은 한숨) 좀 회의적이예요 저는.

 

분교음악회는 비슷한 경험이 없었나요.

처음에 분교음악회를 갔을 때 노래를 불러주는데 아이들이 떠드는 거예요. 대여섯 명 뿐인데도 떠들어요. 항상 집중해주는 곳에서 노래를 불러왔던 제가 어디서 그런 상상을 해봤겠어요. 이건 정말 저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말까지 걸어요. 노래 부르고 있는데 아저씨 이거 옥수수 드시라고.(일동 웃음) 그게 저한테는 분교음악회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고민의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당연히 ‘그들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때부터 프로그램이 계속 조금씩 수정되고 보완되어서 지금에 이른 거예요. 아이들하고 차를 마시는 것도 그래서 추가가 된 것이고요. 한 가지 안타까웠던 게 아이들과 장래희망을 이야기를 할 때 한 명이 선생님이라고 하면 너도나도 선생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2002년에는 대한민국 분교의 모든 남자아이들 꿈이 축구선수였고요. 하하. 전국 분교 통틀어서 아이들 꿈 리스트 작성해보면 한 스무 개 되려나. 그래서 아이들한테 꿈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문화예술계 여러분들을 모시고 가기도 했어요.

 

효과는 어땠나요.

아이들 입장에서 피아노는 3분 지나면 그다음부터 누가 쳐도 그냥 피아노예요. 성악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게 딱 3분에서 5분 지나면 끝이예요. 그래서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앞서 말한 것들 외에도 특이한 재료로 만들어진 전세계의 악기를 하나둘 모으면서 악기와 관련되어진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게 됐어요. 그러면서 악기들도 하나둘 늘어갔고요. 지금은 노래 세 곡 정도 해도 아이들이 말 한마디 안하고 조용하게 들어요.

 

문화소외층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에서 한 번쯤 되새겨봐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는데요.

노래를 한 곡 불러야겠다는 목적이거나 연주 목적으로 가면 안돼요. 그런데 지금의 찾아가는 공연 대부분은 가서 이것을 보여주겠다하는 목적이잖아요.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두세 시간 동안 결국 누구하나 흡족해하는 만남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공연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냥 아이들 손 붙잡고 맛있는 거 해먹고 놀다 오는 게 차라리 낫다고 봐요. 자신들이 누구에게 가고, 그리고 그 사람들의 문화적 관심사가 어느 지점에 있을지, 자신들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죠. 분교에 가서도 바로 노래 안해요. 다 무르익은 다음 “내가 여기 오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내 노래를 너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데 들어주지 않으련?” 이랬을 때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져요.

 

 

 

 

 

 

대학생이 된 분교아이들로부터 온 편지

 

 

아이들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얻는 것들도 있을 테지요?

그럼요. 아이들과의 소통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깨우치고 시도하게 됐어요. 교습법에 따른 아이들 반응에 의해서 뮤뮤스쿨을 운영하는 데에 많이 참고가 됐고요. 아이들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흡수하느냐에 대한 것들이 도시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재창조 된 것이지요.

 

한마디로 뮤뮤스쿨은 ‘도시의 분교음악회’라고 볼 수 있는 거네요.

형태는 같다하더라도 전 분교음악회와 뮤뮤스쿨을 다르게 생각해요. 제가 똑같은 걸 가지고 하나는 분교에, 하나는 뮤뮤스쿨에 줬다고 한다면 그 가치가 똑같을까요. 받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다분히 의미가 달라요. 간단한 예로 코코아를 타주면, 분교 아이들은 안마셔요. 한 모금 딱 마시고 ‘맛있다’ 그러고서는 안마셔요.

 

왜죠?

아껴먹느라고.(웃음) 그러다가 ‘자 이제 저쪽으로 옮기자’ 그러면 그때 이제 한꺼번에 마시고. 하하. 같은걸 뮤뮤스쿨에서 타주면 그날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녀석은 녹차 달라고 또 어떤 녀석은 다이어트 때문에 마시지 않겠다고 해요. 코코아라는 본질은 같아도 어떻게 다른지 아시겠죠. 그렇기 때문에 분교음악회를 할 때는 교육적 측면보다는 서로 마음을 통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이날 잘했다 좋았다’라는 평가의 기준이 돼요. 반면에 뮤뮤스쿨은 아이들이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이해했느냐가 기준이 되겠지요.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서로 일종의 대류역할을 해요. 분교에서의 아이들이 가르쳐준 교습법을 도시의 뮤뮤스쿨에 적용하고, 뮤뮤스쿨에서 목적으로 하는 효과적 교육방법이 분교의 어린이들에게 가는 순환의 구조가 된 것이지요.

 

아이들의 오감이 활용되는, 뚫고 만지고 냄새 맡고 하는 것들도 그동안 쌓여온 교습법이겠죠?

일단 악기가 냄새난다는 걸 상상 못하잖아요.

 

특히 그게 재밌더라고요.

(뿔로 만든 악기의 끝부분을 필자의 코에 갖다대며) 맡아보세요. 좀 심하죠? 하하.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보면 저희가 가지고 있는 교육의 특성이예요. 자연을 소재로 한 악기이기에 냄새가 있고 촉감이 있는 것이죠.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지 않고는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세계의 다양한 악기를 접하면서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인류애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아이들의 생각이) 달라지죠. 예를 들어 이 옆에 있는 악기가 하프인데, 얘가 사실은 활이예요. 활 모양이잖아요. 줄이 좀 많을 뿐이지 활이라고 생각하면 활인 것이죠. (활처럼 줄을 길게 잡아당기며) 활을 튕겼을 때 나오는 소리, 그 줄이 많아지면서 하프가 된 거거든요. 이렇듯 생활의 도구로 시작한 악기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아이들이 생각할 때는 상당히 새로운 이론이죠. 악기하면 피아노나 바이올린 이런 것들을 생각하잖아요. 돈 주고 사야한다는 생각을 떠올리는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한테는 그러한 생각에 변화가 와요. 그런데 그 변화를 지속시킬 수 있는 사회조건이나 환경이 아직은 아니기 때문에 저는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누었던 이야기는 그냥 거기서 끝내고 싶어요. 그 아이들이 언젠가 다시 꺼내어보는 시점이 있을 거라고 믿거든요. 때문에 짧은 만남이라하더라도 제 마음을 다 주려고 해요. 그래야만 그 만남이 아이들의 마음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생명력을 갖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가 필요에 의해서 탁 튕겨져 나올테니까요. 실제로 지금 분교음악회에서 만났던 아이들 중 대학생들이 있어요.

 

얼핏 헤아려보니 정말 그러겠네요.

이 아이들이 어떻게 알고서는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오는데, 그 때 만났던 두 시간 세 시간의 기억을 이렇게 곱게 정리해서 가지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놀라요. 그 시절에, 그 장소에, 그런 프로그램이 가서 그렇게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예요. 그 프로그램이 도시에서 똑같이 행해졌다고 해서 같은 효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해요.

 

 

 

 

 

 

단 한 개의 분교가 남게 될 그날까지

 

 

서양악기와 음악이론 속에 잃어버린 음악적 상상을 찾고자 한다고 언젠가 밝힌 적이 있습니다.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또다른 삶의 가치관을 심어주는 교육. 뮤뮤스쿨에서 지향하는 게 전반적으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필요치 않다를 떠나서, 피아노를 배우는 데 6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한 아이가 세 시간의 뮤뮤스쿨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간과 음악이 어떻게 만났고, 이 다양한 재료들이 악기로 만들어지면서 이 악기들이 무얼 위한 악기였나. 사람을 위한 것인가 자연과 이야기하기 위한 것인가’ 하는 것들을 알았을 때 그 아이의 피아노 배운 6년이라는 시간들이 더 가치 있고 영향력 있고 알찬 것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겁니다.

 

기존의 가치가 더욱 빛나고 의미 있어진다는 측면에서 볼 때 자연스럽게 대안교육 과도 연결이 됩니다... 교육자로서 앞으로의 큰 계획은 어떤가요.

사회가 이러한 프로그램을 필요로 하는 시점까지 꾸준히 자료화하고, 아이템들을 개발하며 계속 해나갈 생각이에요. 지금 국내에는 없거든요. 분교음악회 같은 경우 올해는 많이 못했어요. 늦여름부터는 고려인 아이들 캠프에 참가하느라 우즈베키스탄에 다녀왔고, 겨울에는 정선에 들어가 살아야 하고... 분교음악회 10주년 되는 해에는 처음 시작할 때처럼 1년 동안 150개 정도 분교를 쭈욱 다녀볼 생각이에요. 아직 섬을 많이 못 가봤거든요.

 

음악회를 열었던 분교가 상당 수 폐교됐다죠? 결국 모두 폐교될 거라고 보시나요. 분교음악회 같은 의미있는 움직임을 계기로 생명환경에 대한 중요성이 일어나서 부모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다시 산골 분교로 돌아가리라는 기대를 가져볼 법도 한데요.

그동안 인터뷰를 통해서 밝히지 않은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분교를 지켜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일체 언급한 적이 없고요. 또 하나는 분교의 실정에 대해서도 밝힌 적이 없어요. 지난 8년 동안 전국 각지의 180 여개 분교를 다니면서 현재 분교에 계시는 선생님들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게 되었어요. 선생님들은 지역 내 분교에서 길어야 3년 계시거든요. 그거 아세요? 강원도 분교와 전라도 분교가 다르고. 전라도 분교와 경상도 분교가 또 달라요. 예컨대 강원도의 경우 부부선생님이 분교에 동시에 발령 받아서 관사에서 같이 살기도 하는데요. 타지역에서는 그게 불가능해요. 또한 특수한 분교도 많아요. 한센병 마을 아이들은 본교가 가까움에도 본교 학부모들의 반대로 분교를 다니는 거예요. 그런가하면 특정종교인들의 분교도 있고요. 지금 우리나라 분교를 단지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분교 존폐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을 안하시는 거군요.

그것보다도 제가 언급할 사항이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그게 분교음악회가 갖는 생명력이고요. ‘관심 갖지 말고 우리 것만 하자’... 분교음악회 중간중간 우리의 움직임에 힘을 얻고자 하는 곳들에서 연락이 많이 왔었는데 모두 거절했어요. 영화에서도 음악을 쓰게 해달라는 요청이 왔었는데 그것마저 못쓰게 했죠. 분교와 관련되어진 다른 기관의 행사에는 참여를 안했고, 이외에 파생될 수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 역시 언급을 안했었습니다.

일체의 정치성을 배제하는 것. 분교음악회를 오래 이끌고 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말이죠?

앞으로도 분교음악회가 기업의 후원이나 정부의 예산지원에 기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마지막 분교음악회도 음악회 처음 떠났던 그런 느낌, 그런 모습일 거예요. 그때와 달라진 건 없으니까요.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 배경 된 어린 시절

 

 

음악과 삶, 자연에 대한 경외를 가르쳐주셨다는 아버지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지나와서 생각을 해보니 어렸을 때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 생활공간, 주변 모든 것들이 저의 생각이나 음악,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만들어준 것 같아요. 아버지는 화가도 아니신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그림을 그리셨어요. 남기신 작품이 200 여점이나 되거든요. 그리고 항상 음악을 들려주셨어요.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노래가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가곡(가고파)이었어요. 학교에서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어 이거 우리 아버지 노랜데’하며 되게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아버지는 음악과 미술 종교 이런 모든 부분을 가지고 본인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셨던 분이었어요. 삶에 대한 가치를 제가 따라 배우고 싶을 정도로 큰 걸 가르쳐주셨죠. 무엇보다 아버지와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 공장이 경기도 의왕에 있었는데 옛날에는 꽤 먼 거리였어요.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경기도 어지간한 곳은 시외버스 타고 갔잖아요.

그렇죠. 전철이 74년도에 생겼는데 전철타고 안양역에 내려 시외버스 갈아타고 가서 또 20분을 걸어 들어가는, 서울에서도 두 시간이 넘는 거리였어요. 거기에 조그만 농가주택을 하나 사셨는데요. 밭은 한 2백평 정도 있고, 집은... 지금 생각해보면 한 30평이나 됐을까? 아버지가 페인트 공장을 하셨는데 그 집을 1년에 대여섯 번 색깔을 바꾸셨어요. 어떤 색이 좋다하면 그걸 가지고 와서 주말에 둘이 같이 칠하는 거예요. 분홍색 초콜릿색 빨간색... 그러니까 동네에서는 유명했죠. 도대체 저 집이 무슨 집이길래... 하하. 정원도 예쁘게 가꾸셨어요. 그래서 제가 꽃이름을 많이 알아요. 채송화 씨받아서 키우기도 하고, 땅콩도 심어보고 양배추 심어보고.. 가지 토마토 양파 고구마 부추 등등 잎사귀 보면 다 알아요. 부추와 파가 어떻게 다른지, 파 중에서도 씨받는 파가 다르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자연과 가까이 할 수 있는 흥미있는 전원생활을 시켜주신 거죠. 그게 아주 컸어요.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같이 시골에 대한 풍광 얘기 나오면 다 그 동네 얘기예요. 그 동네 개울가며...

 

자연음악가이자 교육자로서 활동하는 지금의 모습이 이미 <아에이오우>(1990)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대화를 나누면서 유년시절의 감성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걸 보니, 그렇다면 훨씬 더 오래전부터 지금의 모습이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에 이르는 시간 속에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나요.

제가 사실 요즘 너무 게을러졌어요. 의욕도 재미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하하. 그런데 어머니가 엊그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너는 어렸을 때 그렇게 바빴다고. 가만히 있질 않았다고. 제가 되게 순하게 자랐는데, 여동생과 7살 차이나니까 집안일을 많이 했어요. 시장 봐오는 거나 은행 심부름 같은 것들을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혼자 서울에서 의왕을 오가면서요. 그런 아이였는데 글도 모르던 5살 때 교회 성가대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교회음악이. 그렇게 어머니를 졸라서 성가대에 들어갔고, 중학교 때까지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연습을 했으니 10년 가까이 서양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을 교회에서 익힌 거죠. 그래서 제 음악에 기독교음악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운 하모니가 기본으로 깔려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하게 된 건 언제였죠?

고교 때 그룹사운드를 만나면서 대중음악을 듣게 됐고, 그러면서 교회음악과 자연히 멀어지면서 성가대도 그만두게 됐어요. 지금에 와서는 두 가지 다 나에게 필요했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해요. 어렸을 때 종교음악을 바탕으로 한 시간을 보내왔다면, 고교 때부터 93년도 유학을 가기 전까지는 대중음악을 통해서 활동을 했고, 이후 ‘내가 음악을 왜하지, 어떻게 해야하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어요. 그게 내 음악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걸 알고 그에 대한 해답을 한국에서 구체화시키기 보다는 미국이나 중국 인도 등 여러나라에서 정리해왔어요. 그러다보니 세계음악의 나눔이라는 부분, 다양한 음악에 대한 이해가 ‘필요성’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 같아요.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가 있었다고요?

2002년도 당시 분교음악회가 크게 이슈가 돼서 속된말로 돈 벌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CF도 들어오고 했는데 별안간 그냥 떠났어요. 그렇게 미국에 있었는데 이듬해 이라크전이 발발했어요. 그 전쟁이 벌어진 날 길거리의 사람들이 여느 때와 똑같이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점심 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어제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 이게 전쟁이 난 나라인가.. 저쪽에서 포탄이 터지고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공포에 휩싸여 있는 그런 상황을 이들이 알까... 지난 10여 년 간 관계를 맺어왔던 미국이라는 곳도 이제 떠나야겠다고 생각해서 찾아간 곳이 인도였어요. 그런데 도착하는 날부터 공항에서 갑자기 호흡곤란이 왔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가진 돈 전부와 신분증을 보여주며 그야말로 ‘죽을 것 같다’고 했어요. 열병이었어요. 겨우 살아나서 원래 목적한 곳에 갔는데 몇 개월 후 다시 열병에 걸렸어요. 제가 너무 경솔했기 때문에 인도에게 한 방 맞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 때문에 한국에 돌아와서 공황장애가 생겼어요. 눈앞에 건물과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 집을 얻은 것도 그 때문이죠. 지금은 괜찮아졌는데 인도에 아직 짐이 그대로 있어서 내년쯤 가서 가지고 올까 싶어요.

 

머리가 희어지면 노인의 목소리로 다시 노래할 터

 

 

생활은 어떻게 하고 계세요. (그는 분교음악회를 자비로 진행해 왔다)

철모르고 음악 했을 때, 그러니까 90, 91, 92년 이 시기에 활동했던 것들이 다행히 저작권을 갖고 있어요. <아에이오우>나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같은 곡들은 아직도 많이 사랑해주시고요. 제가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저작권료 수입으로 분교음악회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작곡가로서 벌어들인 돈을 가수한답시고 탕진했다랄까. 하하.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하는데 작년에도 올해도 앨범을 냈거든요. 이번 앨범은 저의 삶에서 만났던 곡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어요. 뭔가를 깨끗하게 싹 정리 해놓으면 제가 60, 70살이 되어서 다시 앨범을 한 장 내보고 싶다고 할 때 좀 더 가벼운 마음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90년대 초반 예민은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도 활동했다. 박선주의 데뷔곡이자 나얼이 리메이크한 <귀로>, 여행스케치의 <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어>, 수작들로 채워진 하수빈 데뷔앨범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스스로는 <아에이오우>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는데, <서울역> <가시야> <변명> <다가서고 싶어> 등 그 시기 앨범에 함께 수록되어 있는 서정적이고 아릿한 음악들은 8, 90년대를 살아간 이들의 정서에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후 3집 ‘노스텔지아(1997)’, 4집 ‘나의 나무(2000)’를 거치며 자연의 품에서 삶을 관조하던 그는 지난 5월, 20여 년의 음악활동을 정리하는 앨범 ‘오퍼스’를 내고 가수로서의 활동을 끝낸다. 이 앨범에서 80대 노인 김영매 할머니가 부른 <나의 할머니, 그녀의 첫사랑>은 음악과 인생에 대한 그의 철학이 짙게 배어있다.

 

 

그렇지 않아도 좀 궁금하긴 했었습니다. 가수로서 더는 계획이 없는 건지요.

제 마지막 앨범을 보면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로 끝이 나요. 그게 뭐냐면, 음악을 음악가만이 하는 전유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이었어요. 아이들이 진정 음악을 만나는 과정에서 음악가들만이 음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기의 삶을 노래하고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서 여기길 바랐거든요. 제가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뒤에서는 가수로서 노래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말로는 음악 어쩌고하면서 ‘그래도 넌 대중 앞에서 노래하잖아’라는 말을 듣는다는 게 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음반은 안 낼 거예요. 염세적인 말이지만, 죽기 전에 한 번 내고 싶어요. 노래를 하게 된다면 머리가 좀 희어지고 나서 <산골소년의 사랑 이야기>부터 다시 불러보고 싶어요. 머리가 희어서, 노인의 목소리로 다시 부르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존중이요. 존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아이들한테 뭘 줘야 할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떻게 줘야할 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 생길 것이고. 그 아이들은 ‘무엇을 받았다’는 기억보다는, ‘어떤 사람이구나’라는 기억을 갖게 될 겁니다.

 

 

김우성
김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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