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구도자, 40년 연극배우 박웅
무대 위의 구도자, 40년 연극배우 박웅
  • 서영석
  • 승인 200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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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은 무대가 곧 종교여야” / 서영석



[인터뷰365 서영석] 연극계와 무대의 산증인 박웅(68)을 만났다.

성우로 출발해 연극에서 잔뼈가 굵어지고 40여 년 동안을 한결같이 극단 자유의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박웅이다.

180cm가 가까운 큰 키에 수려한 외모로 지금도 여전히 무대 위에서 연기중인 그는 연기와 무대를 숭고한 종교의식으로 여기는 배우다. 그래서 작금의 젊은 배우들의 ‘경박함’에 대한 일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박웅은 필자와 이태 전에 ‘갓바위’란 작품에서 같이 공연을 한 바 있다. 약속한 카페에 먼저 와 기다리던 그가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늦은 가을과 카페 분위기, 피우는 담배 연기가 썩 어울린다. 성우 출신다운, 정확하고 흡인력 있는 목소리로 그는 자신의 연극인생 그리고 연극배우들의 구도자정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건강하시죠?

(웃는다) 날씨가 꽤 쌀쌀해졌어요. (유난히 ‘쌀쌀’이란 발음에 힘이 들어간다)


참 오랜 시간 무대를 지키셨는데?

대학을 다니다 부산문화방송 라디오국에서 1년 성우를 했죠. 당시 지방문화가 없어서 말이 성우지 별로 할 일이 없어 막연히 서울을 동경했는데 마침 동아방송에서 성우를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언론매체 중 최고였던 동아일보사 계열 방송이었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쳤는데 부산에서 성우를 한 경험이 유리하게 작용해서 경상도 출신으로 어렵사리 합격을 했어요. 당시 성우 교육은 연극하는 분들이 시키셨어요. 제작극회의 조동화, 최창봉, 오사랑, 안평선 등. 그분들이 성우나 연극은 불가분의 관계다, 성우는 모습만 보이지 않을 뿐 변형된 연극 장르라는 논리로 강의를 했지요.


그래서 연극 무대에 유독 성우 출신들이 많은가 보죠?

당시 동아방송 성우 1기생들은 거의 연기자로 활약들을 하고 있어요. 동기인 이완호, 홍계일, 김무생, 사미자, 장미자 등. 그중 이완호씨는 지금도 ‘동물의 왕국’ 해설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죠. 당시 정식기수로 성우를 뽑아놓고도 우린 단역만 맡을 수 있을 뿐 주요배역은 거의 고참들 몫이었죠.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시기에 거의 무위도식 생활을 하려니 보통 고역이 아니었어요. 우연한 술자리에서 공부에도 도움이 되니 연습 겸 연극을 하면 어떨까 하고 누군가 제안을 했죠. 연극을 하게 된 계기는 이렇게 아주 우연이었어요. 바로 동아방송 내 동우극회가 결성이 되고 담당 프로듀서나 방송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연습을 하고 공연도 했습니다. 그 후 2~3년이 지나고 김을동(3기) 등 후배들이 동참을 하면서 강당이나 드라마센터로 진출을 하게 됐죠.



본격적인 연극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성우라지만 거의 백수나 다름없는 생활이었죠. 이래선 안 되겠다. 연극에 재미를 붙이면서 1968년 퇴사를 작심, 프리랜서로 방송을 하면서 연극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게 됐어요. 당시 연극계의 젊은 피라 할까, 최창봉, 최상현 등 대학극 출신들이 주축이 된 ‘제작극회’가 있었는데 직업이 있는 생활 연극인들이다 보니 큰 활동을 하지 못했어요. 1968년 이들이 뭔가 혁신을 이루고자 역량 있는 연극인들을 규합할 때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연극의 길로 접어들었죠. 1968년에 이병복씨를 중심으로 한 ‘자유극장’으로 소속을 옮겼고 이후 근 40년을 자유극장의 거의 모든 작품에 참여했어요. 연극계의 선구자 중에 성우들이 많고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이완호, 홍계일, 작고하신 김무생, 사미자, 전원주, 김영식 등 쟁쟁한 동기생들이 아직도 현장에서 눈부신 활약들을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나도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친구들이 사라졌지만 아직 무대에 살아남은 나를 보면. 아마 나이나 연극인 또래에 비해 큰 키(179cm)와 서구적 외모가 큰 영향을 하지 않았을까, 역에 배한 운이 많이 따랐거든요.


당시 연극계와 현재를 비교할 때 특이할 만한 차이점은 뭐가 있을까요?

정신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당시는 무대를 거의 신성화했거든요. 종교적 신앙심 이상이라 해도 될 겁니다. 너무 경직된 점이 배우의 연기에 방해가 되기도 했지만 요즘처럼 경박스러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전체 중의 하나의 배우였지, 공연을 통해서 스타가 되고 떠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참여가 중요했지 배역에 대한 개념이나 욕심은 거의 없었다고 할까. 배역을 충실하게 소화하기에 전력투구를 했고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인 자기 과신은 금물이었어요. 연기와 예술을, 무대를 종교인 못지않게 숭고한 의식으로 여겼다고 할 수 있어요.


경제적인 문제 말고도 힘들었을 때가 많았을 텐데요.

연극하면 춥고 배고프다, 이젠 그 말에 정말 질렸어요. 그나마 조금은 덜 힘들었던 것은 밥은 굶지 않았다는 거. 당시 연극계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힘들어서 정말 밥을 굶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난 방송부터 시작을 했으니 끼니 걱정은 하지 않고 연극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죠. 한 가지 웃기는 일은 잘 사는 집안의 자제들이 연극판에만 들어오면 거지(?)가 된다는 거예요. 집에서 연극에 반대를 하거나 연극인들과 휩쓸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주머니가 비어버리죠. 언젠가 좌절을 느껴 연극을 떠날까 고민을 했던 적은 있었어요. 배우나 성우에 있어 대사, 발음이나 액센트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경상도 출신이잖아요. 10살까지 시골에 살면 사투리 교정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어느 선배가 “빨리 보따리 싸서 집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서러웠어요. 엄청난 충격과 좌절감으로 방황을 했었죠. 내재된 태생적 핸디캡 극복을 위해 고생 많이 했어요. 지금도 비슷하게 흉내는 내지만 완전하게 극복은 못한 상태예요.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백 여 편 정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1976년 초등학교 교사였던 박우준씨가 썼던 ‘무엇이 될고하니’입니다. 몽타주 연극이라는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었던 작품으로 나를 비롯 오영수, 박정자, 김금지, 권병길, 손봉숙 등 자유극장의 모든 배우가 참여를 했어요. 당시에는 파격적이랄 수 있는 관객과의 대화, 춤의 도입, 극중 사물놀이의 등장, 이병복의 설치미술, 미적으로도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한복이미지의 의상 등 연극의 방법론에서 종합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이었어요. 일상적인 사고를 파괴하고 연극이 가진 시대상을 또 다른 창작으로 표현했죠. 극 진행 중에 배우가 당시의 시대상황을 시(詩)나 유행가를 통해 삽입하는 시도도 했었고.



배우들이나 연극인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업적도 상당하시던데요.

연극배우협회는 배우들의 숙원사업이었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무대에서는 주인공으로 폼이 나지만 이면에는 선택되어야만 무대에 설 수 있는 절대약자라는 수동적 속성이 있거든요. 적대적이 아닌 극작가, 연출가, 평론가와 당당하게 동등한 입장에서 연극의 발전을 위한 중추적 인물이 되자는 취지에서 40대 이상이 주축이 되어 발기인 대회가 있었고 대회장을 맡고 있다 보니 얼떨결에 연극배우협회(당시 임의단체, 현 사단법인) 초대 회장에 추대가 되어 1991~1997년까지 3회를 연임했어요. 사무실조차 없었고 그 어려움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끔찍해요. 배우협회회장의 연장선에서 연극협회이사장도 했는데, 아마 순수한 배우의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했을 겁니다. 이사장은 모두 연출가나 극작가들의 몫이었으니까요.


연극의 매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요?

연극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면 예술이 될 수 없을 겁니다. 너무 어렵고, 평생 연극을 했지만 이제 겨우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 놈 자체가 그럴 진데 매력을 꼽으라? (중압감이 느껴지는 듯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다양성이랄까, 천의 얼굴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무척 어렵구만. 귀여운 손주 녀석이라면 또 어떨까? 내 품에 들어왔다 싶다가도 어느 샌가 빠져나가버리는 얄미우면서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정체가 묘한 놈. 끝없이 파고 들어가도 결국 도달하지 못하는 무한궤도의 우주 같은 엄청난 존재.


그 시대에 대학을 다닐 정도면 사회적으로 상당히 엘리트 계층인데 굳이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연극에 입문을 하신 이유가 있다면?

팔자소관 아닐까요? 나이가 들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점점 운명론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요. 방송국의 성우라는 직업이 체질에 맞지 않았고 연극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니 적성이나 기질에 적합했던 것 같아요. 금전이나 명예와는 무관하지만 적성이나 관심이 많다보니 열심히 할 수 있었고, 남들이 좋은 배우라는 타이틀을 달아주니 신도 났고.

평생을 바쳐 연극을 하셨는데 손익을 따진다면?

손해?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요. 천직이고 감사하다는 생각만 했지. 연극을 한다는 것은 한 평생도 모자라는 작업이 아닐까요? 얻은 것은 많아요. 무엇보다 반려자를 얻은 것도 연극이었고 지금까지 지탱해 준 것도 연극이었으니. 다음 생에 인간으로 태어나도 다시 이 길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내 인생에서 연극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보물입니다.

한국 뮤지컬의 초창기 배우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그 당시는 뮤지컬이란 말조차 없었을 때죠. 그냥 연극이다 생각했죠. 다만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는 것이 신기했고 재미있었어요. 난 단역이었지만 집사람은 제법 큰 역을 했었어요.

부인과 연애하실 때 에피소드도 많았을 텐데요.

그 당시 사내(동아방송)에서 남녀 간에 차 한 잔도 못하게 엄격하게 규제를 했는데 우린 같이 방송을 하고 공연을 하다 보니 아무도 모르게 연애를 할 수 있었어요. 2년 가까이 연애를 했는데 그야말로 감쪽같았죠. 만남도 간첩 접선하듯이 연습하면서 그냥 쪽지에 몇 시, 이렇게 적으면 그게 암호야. 만나는 장소는 항상 정해져 있으니. 전화는 물론 다른 연락 방법이 없는 시기여서 연습이 늦어지면 그냥 몇 시간이고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요. 뭐가 그리 좋았는지 마냥 기다렸지.


부인과 같은 배우의 길을 걷다보면 장단점이 많았을 텐데요?

서로의 영역이 있으니 별로. 그 사람이 나보다 배우로서 뛰어난 사람인데 날 만나서 많이 희생했어요. 지금도 같은 작품에서 연습을 하고 있어요.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12월 16일 아르코 대극장에서 ‘인간의 시간’(배봉기 작, 김광보 연출)에서 오누이로 출연해요. 작년에 ‘황금연못’, 10년 전에 ‘춤추는 초상화’에서 부부로 출연을 했죠. 고운 얼굴이 많이 늙었어, 가슴이 아파.



집안 내력에 배우에 관련된 분이 계셨는지요?

나? 돌연변이에요.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았는데 지금의 내 모습은 그 당시 거의 결정지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깡촌에서 친구들과 연극놀이를 하면서 지냈거든요. 당시 시골에서의 문화는 거의 없었고 있다면 교회에서 특별한 날에 문화행사를 주도했어요.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성극(聖劇)에는 참여했었어요. 또 또래의 친구들과 ‘토끼와 거북이’를 했던 기억이 나. 그림을 그려서 머리에 쓰고 종이에 표를 만들어 팔았죠. 포장을 치고 공연을 하면서. 내가 연극을 하지 않았으면 아마 외교관? 역마살에 있어서 외교관이나 연극인이나 비슷하지 않을까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학교에 게시판에 개교기념행사로 ‘원술랑’(유치진 작)을 한다는 공고가 났어요. 대본을 읽고는 당장 김춘추 왕 역을 맡았죠. 공연을 마치고 허무감에 극장 앞을 서성거렸고 그 뭔가 모를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영화를 무척 봤어요. 유년기부터 잠재의식이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 오랜 세월을 무대를 지키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좋은 대본을 보면 힘이 절로 솟거든요. 참 예술이란 어려운 거예요. 연극이 왜 예술인지도 모르고 덤볐지만 나이가 들어 60이 넘어서니까 겨우 무대가 보이더라고. 참 어렵고 힘든 작업을 무슨 용기로 버텼는지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다 집사람 덕분이지만. 집사람이 나보다 훨씬 배우로 능력이 있는 사람인데 내 바라지하느라고 평생을 숨죽이고 살았어요. 항상 미안하다는 생각이지... 오늘 손이라도 한 번 잡아줘야겠어.


배우를 하시면서 후회랄까...?

마누라지. 보물을 옆에 두고도 가치를 모르고 살았으니 인생 헛살았어요.(웃음) 물과 공기가 없으면 인간의 생명이 촌각을 다투지만 우리는 그 존재가치를 모르고 살아요. 너무 흔하니까. 상 옆에 있는 마누라의 진가를 모르고 가끔 엉뚱한 시선을 돌렸으니.

당시 여대생들에게 인기가 많으셨죠?

그건..., 아직은 살날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어서 가정이 필요해요. 이 나이에 쫓겨나면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다음에 얘기하죠.


강단에서 후학들에게 배우의 정도(定道)를 강의하실 의향은 없나요?

교수,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에요. 강단에 선다는 것은 인격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엄숙한 자격이 필요하고 철저한 자기 성찰이 요구되는 작업입니다. 언젠가 스스로에게 만족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느낄 땐 후배들을 위해 한번은 하지 않을까, 할 수도 있겠지.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다면?

종교인들이 교리나 신에 대한 경의가 절대적이듯 연극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연극에 대한 관념, 자세가 없으면 연극인으로 자격이 없는 사기꾼입니다. 종교적 집념 이상의 숭고한 정신적 마음의 준비가 절대적이죠. 작품에 전력투구를 하지 않으면 좋은 연극의 탄생은 불가능합니다. 작가와 연출은 작품으로, 배우는 무대에서 얘기한다는 절대명제를 항상 가슴 깊이 간직하는 자세가 절대적이죠. 요즘은 실험정신이 사라져버렸어요. 종래의 답습만 하고 있을 뿐. 예술은 창조지 모방이 아니거든, 분발해야 되는데... 당장의 현실보다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연극계에 공헌하는 인물이 되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날 쯤 부인이 카페에 들어섰다. 같이 자리를 하면서 매듭을 지었다.


남편이자 배우 박웅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과묵해요. 배려를 많이 해주시지만... 안 해주면 어쩔건데? 시집살이 하면서 청춘 다 보냈거든요. 시할머니까지 모셨으니까. 심성 하나는 정말 훌륭한 남편이에요. 옛날에는 담배 피우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는데 지금은 미워 죽겠어. 아무리 닦달을 해도 마이동풍이니...





인터뷰를 마친 박웅 부부는 나란히 앉아 필자의 요구에 따라 사진 포즈를 취해줬다. 멋지게 찍어달라는 당부와 함께.

인터뷰 내내 노배우의 모습에 숭고한 구도자의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60을 훌쩍 넘기고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전혀 나이를 잊게 하는 멋이 있었다. 훌륭한 배우는 역시 어느 자리에서도 빛을 발하는 법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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