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진압 현장의 최고참 소방관 황인영 소방위
화재진압 현장의 최고참 소방관 황인영 소방위
  • 김우성
  • 승인 2008.11.1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과 싸워 사람 구해내는 이 자리가 나의 숙명”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 지난 9일,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에서는 제46회 소방의 날을 기념해 그동안 재난현장에서 헌신 봉사해온 385명 22개 단체에 대해 표창을 수여했다. 남매 소방관, 부자 소방관 등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던 중 ‘26년차 화재진압대원’이라는 수식이 눈길을 끌었다. 1982년 소방호스를 잡은 이후 대형화재 현장에 빠지지 않고 있었다는 황인영 소방위가 주인공이었다.


그의 직함은 ‘영등포소방서 영등포119안전센터 부센터장’이다. 쉽게 말해 화재가 발생했을 시 가장 먼저 달려가는 이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직위다. 직위 때문이 아니더라도, 위험이 상존하는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나도 될 때가 진작 지났건만 그는 화마와 맞서 싸우기를 고집하고 있다. 황인영 소방위를 만나기 위해 ‘소방의 날’ 기념식이 열렸던 날 밤 영등포소방서를 찾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지던 소방관들의 강인한 이미지와 달리, 수줍은 듯 온화한 어조로 그가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밤늦게까지 일해도 괜찮으세요? 저희들이야 당연한 거지만..”



소방관을 처음 시작할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 볼 때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진압현장을 중심으로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80년대는 산업시대였잖아요. 영등포 전체가 공장지대였어요. 경인공업단지의 시작점이었죠. 밤새 가동하는 공장이 부지기수이다 보니 매일 화재가 일어났어요. 당시에는 또 영등포를 포함해 관악, 구로, 양천, 강서지역까지 관할을 하고 있었어요. 겨울철에는 보통 하루에 열 세 건 정도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소위 정예부대가 밤새 출동하는 거예요.(웃음) 지금은 화재 발생빈도는 줄었지만 건물이 위로 솟고 지하로 내려가면서 출동기법이 판이하게 달라졌어요. 소방력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음은 물론이고요.


반면 과거보다 아쉬운 점은 없나요?

건물이 고층화 심층화되니 진압현장의 위험성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지금이 더 해요. 고가사다리의 경우 10층에서 12층 정도까지만 전개가 가능한데, 지금 그 정도 층수면 고층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한계는 계속 생길 것이기 때문에 전술기법 역시 꾸준히 개발되어야겠죠.


26년 간 외길을 걸으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였죠?

큰 재난현장에서 인명을 구하는 일도 뿌듯하겠지만 노량진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새벽 세 시쯤에 신고가 들어왔는데 노인 한 분이 맨홀 속에 틀니를 빠뜨렸다는 거예요. 현장에 갔는데 행색이 무척 안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멍하니 앉아 계시더라고요. 얼른 맨홀 뚜껑을 열고 틀니를 꺼내드렸죠. 그렇게 고마워하실 수가 없었어요. 뭉클했죠. 지금도 친구들하고 술 한 잔 하면 그때 얘기를 종종 해요. “그건 소방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도 할아버지를 도울 수 없었다”고 말이죠.



위험한 순간도 많았겠지요.

대여섯 번 정도 고비가 있었어요. 양평동 지하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철수상황인 걸 모르고 혼자 남겨진 적이 있어요. 한 줄기 빛도 없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출구를 잃었어요. 진입한 반대쪽으로 막연히 찾아갔는데 뱅뱅 돌기만 했어요. 간신히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또 출구가 없고 산소는 바닥이 나고..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죠.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가만히 있으니까 미세하게 소리가 들렸어요. 겨우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건물이 무너져 내린 적도 몇 번 있어요. 대림시장 화재 때는 뒤편에서 진입하는데 화세가 엄청나게 밀려오는 거예요. 그걸 피해 어느 집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있는데 바로 눈앞에서 집이 가라앉았어요. 그 때 동료도 잃고요.


동료를 떠나보낸 적도 적지 않으실 텐데요.

10명 정도 됩니다.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그 직원들 생각하면 가슴 아파요. 저도 가정이 있고 애들을 키우는데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 남겨진 아이들은 어떻게 커가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요. 소방관 일이라는 게 숙명적인 것 같아요. 모두가 빠져나오려고 하는 곳을 들어가는 사람들인데 위험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숙명으로 받아들이죠.


처우가 열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위험하기까지 한 현장을 고집하는 데에 있어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아이가 아빠를 훌륭하다고 생각해줘요. 집사람은 항상 걱정하지만 표현은 잘 안 해요.


소방관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 꿈이 남을 돕는 거였어요. 양로원 같은 걸 만들고 싶은 꿈이었죠. 일반회사에 다니던 중 우연찮게 소방관이 되었어요. 당시에는 소방관이라는 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 일반시민들이 보면 경찰하고 분간도 잘 안 갔으니까요. 지금은 퇴직했지만 먼저 소방일을 하던 군대 동기가 “너 들어오면 성격에 딱 맞을 것”이라며 권유를 했어요. 왜 나랑 맞는지 물어보니까 “내가 니 생각을 아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 친구가 시험 날짜도 알려주고 책도 빌려주고 했죠. 고척동에 재직공장이 있었는데 소방관으로서 처음 화재현장에 투입이 되어 관창(소방호스 앞쪽 쇠 부분)을 잡았어요. 나한테 맞는 일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불을 끄고 다녔는데 한 달 지나고 나서 봉급도 주는 거예요.(웃음)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나요.

많았어요. 봉사하는 쪽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소방관이 숙명처럼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집 앞에서 벌어진 실제 화재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는데요. LPG 폭발로 인한 전소였는데, 불길이 순식간에 집을 삼키던 광경이 충격이었습니다. 불이 무섭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나요.

화재 현장 안에서 공포를 안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소방관이 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은 냉철한 판단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막상 불길과 맞닥뜨리면 온몸의 털이 다 서는데,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동요가 없어야 합니다.


항상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가 진압장구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굉장히 뜨겁고 호흡하기도 힘들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진압이 끝난 건물에 들어가도 뜨거워서 숨을 쉬기가 힘들어요. 열기가 너무 뜨겁다 싶으면 물로 자기 몸에 보호막을 쳐요. 그리고 옛날에 산소호흡기가 없을 때는 ‘분무방수’를 했어요. 물을 쫙 퍼뜨려서 산소를 발생시켜 호흡하는 거죠. 관창을 잡고 통로 진입해서 화점 찾아갈 때는 또 열기로 찾아가요. ‘왼쪽이 뜨끈뜨끈’하다 하면 왼쪽을 찾아가는 거죠.


불과 대면하며 버릇처럼 되뇌는 말은 없나요. 생사를 넘나들며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나요.

“한판 붙어보자!” 전쟁을 벌인다는 표현이 딱 맞아요. 사람과 사람의 전쟁이 아닌, 화마와의 전쟁 말이죠.


어느 직업이든 일정 경력이 쌓이면 지휘관리계통으로 물러나지 않습니까. 현장을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요.

존엄한 생명을 다루는 직업은 많지 않아요. 그 중에서도 재난현장 활동은 직접적으로 생명을 구해내는 일이지요. 아울러 스스로도 현장 경험이 있다고 생각해요. 화재 현장은 하나도 똑같은 게 없거든요. 매뉴얼만 갖고는 부족해요. 대처능력과 상황판단이 중요해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아들뻘 되는 후배들이 놀아주니까 더 젊어지는 것 같아요. 이 나이에 누가 놀아줘요. 하하. 그것만으로도 큰 행복이죠.


오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점은 안타깝다’ 내지는 ‘억울하다’ 싶은 게 있다면요? 국민들 사이에서 잘못 알려진 소방상식도 있을 테고요.

설날 같은 명절에 집에 안 가고 비상근무를 하거든요. 중요대상 건물에 소방안전 확인 차 방문을 하는데 문전박대 당하는 경우가 있어요. 주택가에 소방통로 확보하러 가서 차를 빼달라고 하면 ‘불도 안 났는데 왜 그러냐’며 화를 내세요. 소방차가 회전을 못한다고 잘 설명을 드려도 삿대질 당하기 일쑤죠. 황색선은 저희가 주차단속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럼에도 욕이란 욕은 다 듣고. 언제 어디서 불이 날 지 모르는데도 그런 점은 무척 안타까워요. 소방구역이 소방관 게 아니고 그 지역 주민들 거잖아요.


언제까지 현장을 지킬 계획인가요?

26년 내내 현장에만 있었던 건 아니고요. 잠시 행정계통에도 있었는데 현장이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 물론 행정도 지원하는 봉사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을 못하겠어요. 불과 싸워서 사람을 구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장비를 메고 사람을 구하려면 지구력과 체력도 있어야 해서 산행도 게을리 하지 않아요. 특히 장거리 산행을 자주해요.


오랫동안 국민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이제는 국민들에게 바라는 게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더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소방으로 거듭날 테니 많이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세요.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청년이 불길 속에 뛰어든 지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6년이 지났다. 초로에 묻힌 세월만큼이나 가슴에 품은 이야기가 많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차분하게 이어가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소방관을 천직으로 여기고 묵묵히 걸어왔을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김우성
김우성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