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서민적인 아버지 김승호
우리들의 서민적인 아버지 김승호
  • 김다인
  • 승인 2008.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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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추천으로 연기 시작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1956년작 <자유부인>의 대히트로 말미암아 가정이 있는 기혼자들의 애정관을 다룬 영화들이 잇달아 만들어졌다면, 1959년 조긍하 감독의 <곰>은 서민생활의 애환을 그리는 작품들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곰>의 주인공은 김승호와 <자유부인>의 김정림이었다.

기존의 남자 주연배우들이 모두 미남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었다면 김승호는 미남이 아니어도 주연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배우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 어려운 시절에 힘겹게 가족을 이끌어가는 한국의 아버지를 리얼하게 연기해낸 배우다. 지금도 숱한 중년배우들이 저마다의 아버지상을 연기하고 있지만, 김승호가 <박서방>이나 <마부>에서 보여줬던 서민적인 아버지상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김승호(1918.7.13~1968.12.1)의 본명은 해수, 강원도 철원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가족을 따라 두 살 때 서울로 터전을 옮긴 김승호는 청진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수송국민학교를 거쳐 당시 명문이던 보성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공부보다 연극, 영화 구경에 더 취미가 많았다. 중2 때 석금성이 주연을 맡은 연극 <춘향전>에 매료돼 무려 열흘을 꼬박 극장에 출근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길거리에서 <춘향전>을 공연했다. 입장료(?)는 성냥 한 갑이었다 하니 그 유명한 구두쇠 기질이 벌써부터 엿보인 것이다.

점점 더 공부에 취미가 없어진 김승호는 아예 학교를 중간에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러 다니고 뒷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이 시기에 듣고 보고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은 훗날 김승호가 서민적인 연기를 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김승호가 연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38년, 스무살 때였다.

여기에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종로패의 두목이던 김두한이 우미관을 자주 드나들던 김승호를 보고 연기 한번 해보라며 동양극장 청춘좌에 소개를 해줬다는 것이다. 당시 청춘좌에는 한은진과 언니 손을 잡고 온 일곱 살배기 꼬마 조미령이 있었다.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한 김승호가 처음 한 일은 난로불 꺼지지 않게 석탄 넣는 일, 시키는 잔심부름은 뭐든 마다하지 않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연극이 끝나면 징을 치는 일로 승격이 됐다.

비로소 무대를 밟게 된 건 영감 분장을 하고 괴나리봇짐을 멘 채 지나가는 행인 역이었다. 단역으로 출연한 <임자없는 자식>에서는 주인공 칼에 맞아 죽는 역을 맡았다. 주인공이 칼로 찌르면 그냥 소리없이 쓰러지면 되는 단순한 역이었다. 그런데 김승호는 주인공의 칼에 맞아 쓰러진 뒤 다시 벌떡 일어났다. 무대 뒤 스탭들은 난리였지만 관객들은 원래 대본에 그렇게 돼있나보다 하고 다음을 기다렸다. 당황한 주인공이 이번에는 좀더 액션을 크게 해서 김승호를 찔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승호가 “내가 그리 쉽게 죽을 줄 아느냐”고 없는 대사까지 하며 버텼다. 결국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김승호는 억지로 들려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버티기를 2년, 마침내 <아들의 심판>에서 아들 철수 역을 맡아 연기자로 신고식을 치르고는 감격에 겨워 밤새 술을 마셨다고 한다.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경위는 청춘좌가 공연했던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성공하자 영화로 만들게 됐고 청춘좌 전원이 출연하게 된 것이다. 김승호가 맡은 역은 주인공의 친구였다.

하지만 김승호는 화면에 비친 자기 모습이 별로 좋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라면 칼에 찔려도 다시 일어나거나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 좀더 관객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지만 화면에서는 그런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 김승호는 틈틈이 영화 출연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극단을 만들어 지방 공연을 떠나곤 했는데 돌아올 때는 언제나 징 하나만 달랑 든 무일푼 신세였다. 그의 모친은 대문 앞에서 징 소리가 나면 김승호가 또 맨주먹으로 돌아온 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한국전쟁중에는 국방부 종군기자단 연예부 소속으로 무대에 섰는데, 한번은 김승호가 무대에 올라가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그가 입은 군복 등에 까만 글씨로 ‘염색’이라고 쓰여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배우들이 옷이 없어 값싼 군복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길에서 군인에게 검문을 당하는 날이면 군복을 빼앗기거나 등에 커다랗게 ‘염색’이라고 써서 돌려보내곤 했다.

종전 후 김승호는 1955년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로 본격적인 영화 출연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1956년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로 김승호는 쨍 하고 해뜰 날을 맞았다. 영화배우로 출세를 시작한 것이다.

오영진 희곡 ‘맹진사댁 경사’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1955년 이규환 감독이 만든 <춘향전>과 함께 한국영화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관객들을 극장으로 다시 모여들게 한 것이다. 이 영화는 또 1956년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최우수희극상을 받았는데 우리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 영화에서 김승호는 맹진사 역을 코믹하고 완벽하게 해내 영화계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때 나이 38세. 연기자로 발을 들여놓은 지 18년 만에 비로소 조연 딱지를 떼고, 웬만한 남자배우들이라면 주연 자리를 내놓을 시점에 주연이 된 것이다.

이후 김승호는 승승장구, 196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25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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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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