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마사고 딛고 재기한 국내 첫 여성기수 이신영
낙마사고 딛고 재기한 국내 첫 여성기수 이신영
  • 김우성
  • 승인 200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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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하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죠”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 사회 전반에 걸친 여풍은 더 이상 화젯거리가 아니다. 이제는 신체적 핸디캡으로 인해 오랫동안 ‘금녀’의 영역으로 고착화된 분야에까지 여성들이 진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여성의 진출을 허락하지 않는 분야도 여전히 있다. 알게모르게 여성을 ‘부정적 존재’로 보는 인식이 팽배한 분야가 특히 그렇다. 국내 첫 KF-16 전투조종사가 탄생한 게 일 년여도 안됐고, 여자선장은 아직 요원하다.


경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 뚝섬이 경마장이었던 1975년, 여성기수 이옥례씨가 6개월 간 활약한 적이 있으나 그로부터 한참 동안 모래주로를 질주하는 여성기수는 목격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99년 과천경마공원 ‘기수후보생 학교’에 다섯 명의 여성이 입교하면서 본격적인 여성기수 시대의 서막이 열린다. 벌써 7년차 베테랑이 된 이신영 기수가 그 중 한 명이다. 이신영 선수는 실질적으로 국내 첫 여성기수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승률 11.4% 복승률 20.4%라는 통산 성적이 말해주듯, 남성들과 당당하게 겨루고 있는 이신영 기수를 만나기 위해 서울경마공원을 찾았다.



기수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체육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고3 때 학교로 공문이 왔나 봐요. 어느 날 선생님께서 ‘이런 게 있는데 너한테 어울릴 것 같다’며 나중에 관심 있으면 한 번 시도해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연히 들었던 말인데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 올 때(그녀의 고향은 마산이다)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서 경마장이란 곳을 가봤죠. 기수들이 말 위에 올라서 경주하는 걸 보니까 생전 처음 봤는데도 굉장히 멋있었어요.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 시험을 쳤는데 덜컥 합격했죠. 그랬던 것이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사실상) 첫 여성기수였는데 제도적인 부분이라든지 문제는 없었나요.

저도 당시에는 처음이란 걸 몰랐어요. 여기서 여성기수를 겪어보지 않아서인지 오히려 시설이나 모든 면에서 최대한 배려를 많이 해줬던 것 같아요. 크게 불편한 건 없었고 더 대우를 받은 느낌이죠.


기수가 되기 위해 2년여 간의 고된 준비기간이 있었다면서요?

기수들이 할 일, 가장 기본적인 마필기승 훈련부터 말 만 탄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기승을 하기 위해서는 말이 뭘 먹는지 등 말의 상태도 알아야하니까 사양관리및 전반적인 마사관리 등을 배우는 과정이죠.



상당히 통제된 생활일 텐데 여성기수로서 불리한 점은 없는지, 반면 유리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성별을 나눠서 여성들끼리 했다면 유불리가 없겠지만 이건 여성이라는 자체로 불리하죠. 유리한 점은... 없는 것 같은데?(웃음)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새벽 4시 20분에 일어나서 새벽훈련 마치고, 너무 일찍 일어나니까 잠 좀 자고 오후에 다시 일어나서 체력훈련 해요. 그리고 취미생활 하다가 일찍 자고요.


이 생활을 7년 가까이 하신 거네요?

교육생 때부터 9년째죠.


식생활에 있어 지켜야 할 게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통 체급 경기 하는 분들도 체중조절 심하게 하시지만 경마처럼 매주하는 건 아니잖아요. 경기가 없는 기간도 있는 반면 경마는 이틀 연속 경기하고 또 다음주에 바로 하니까 체중조절이 심해요. 칼로리를 계산해가며 장기적으로 조절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10분후에 무게 재는 게 중요하니까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조심스럽죠. 우리는 음식물 보면 칼로리가 아니라 ‘아 이거는 몇그램 나오겠다’하고 다 알아요.(웃음)


그래도 워낙 오래 해왔으니 컨트롤이 잘 되겠네요.

아니요. 컨트롤 잘 안 돼요. 원래 못 먹게 하면 더 집착하게 되거든요. 하하. 그래서 여기 사람들이 식탐이 많아요. 평소 잘 못 먹으니까 심리적인 측면 같아요.



‘경마의 꽃’이라 불리는 기수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마사회 경마교육원 기수후보생 교육과정을 졸업한 자에 한해 기수면허를 취득해야 한다. 기수는 말과 함께 혼연일체가 되어 경주로에서 승부를 겨루고 그 결과에 따라 소득과 인기가 결정되지만, 생활의 안정을 위해 별도로 월정액을 지급받는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서울 68명, 부산 25명, 제주(조랑말) 27명 등 총 120명의 현역기수가 활동 중인데, 서울경마장 기수협회에 따르면 40세 전후 기수들의 성적이 가장 우수하다고 한다.


본인과 잘 맞는 경주마가 있나요?

음.. 시스템에 대해 먼저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기수라고 하면 ‘마방’이 있어요. 54개조가 있는데 각 조마다 감독에 해당하는 조교사가 있고요. 구단주에 해당하는 마주들이 자기 말을 위탁 관리시키는 거죠. 기수들은 기승을 하며 훈련을 하고요. 기수는 또 프리기수와 계약기수로 나뉘는데 저의 경우 계약기수예요. 제가 계약된 조에 서른두 마리 정도의 말이 있고 그 중 경주에 나갈 수 있는 말은 스무 마리 정도. 그 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경주에 나가거든요. 말들마다 주기에 맞춰 번갈아가며 훈련을 시키고 쉬어주고 다시 훈련시키는 걸 반복하는 식이죠. 특별히 친한 말이 있거나 한 건 아니예요.


우승도 심심치 않게 하셨죠?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웃음)


첫 우승 때 기억이 생생하겠어요.

네. 결승선에 들어올 때는 1등 한 줄 몰랐어요. 조금 앞서 들어온 것 같기는 한데 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내가 우승이다’ 하는 기분을 느끼면서 들어오지는 않았죠.



성적이 안 좋을 때도 있었을 텐데..

그럼요. 제가 기복이 굉장히 심한 편이거든요.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처음에는 졌을 때 헤어나오지를 못했어요. 나만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 같고. 그러다보니 혼자 너무 힘들어하고. 그러다가 다시 좋아지면 ‘다행이다 기분좋다’ 생각하다가도 또 안 좋게 되는 거예요. 그게 너무 반복이 되다보니 이제는 크게 연연해하지 않아요. 성적이 나쁘더라도 항상 똑같은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징크스는 없나요?

징크스는 안 만들려고요. 왜냐면 될 것도 안 되니까.


가장 크게 부상당한 건 언제였나요?

2006년 10월에 대상경주에서 결승선 300미터를 앞두고 전력질주 하고 있던 상황에서 경주마의 다리가 부러져서 인마전도(人馬顚倒)가 됐어요. 그때 말에 깔려서 크게 다쳤죠.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겠어요.

여기서 흔히 말하는 대형사고였는데 운이 좋아서 목숨은 건졌어요. 사고 직후에는 말에 다시 오르기가 무서웠죠. 그런데 또 시간이 해결해 주더라고요.(웃음)


근 10년 간을 돌이켰을 때 가장 좋았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우승하는 매순간. 그때는 다 잊어요. 힘든 순간이 훨씬 많거든요. 우승했을 때는 ‘내가 이것 때문에 아직까지 여기 있구나’ 싶어요. 결승선을 제일 먼저 통과했을 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죠. 세상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나만의 성취감.


스스로 승부사 기질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 실력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저는 감성이 앞서는 것 같아요. 좋게 말해 근성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나쁘게도 얘기할 수 있는. 남이 나한테 태클을 걸더라도 경기를 위해서 정신 차리고 본연의 모습으로 와야 하는데 저는 그게 안 되고 경기를 포기하더라도 복수를 해야 돼요. 나를 건드리면 앞으로 다시는 못 건드리게 해주겠다. 어떻게 보면 스승님이 그렇게 세뇌를 시키셨어요. 그 경주는 나 혼자만 하는 게 아니라 조교사, 마필관리사, 마주 등이 함께 있잖아요. “니가 여기서 제일 앞장을 떠라. 누가 가려고 하면 넌 경주를 포기해서라도 그 자리를 내주지 마라”고 가르치셨죠. 누가 경합을 심하게 하면 더 좋은 페이스를 찾아 차선의 선택을 하라고 주문하는 게 보통인데 저희 스승님은 그런 걸 절대 용서 못해요. 어떤 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최소한 “쟤는 저렇게 타면 절대 저 자리는 안 빼앗겨” 하고 덤벼들지 않는 건 있어요. 저의 스타일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거죠.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야구에서도 안타치고 나간 주자가 1루에서 상대방 선수와 얘기 나누고 그런다잖아요. 경주하면서도 얘기 오가나요?

하긴 해요. 쓸데없이 얘기가 오가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갈게. 잡아 달라.”는 식으로 외치죠. 그렇게 해도 안 해줘요. 하하. 말이 가속이 붙어서 제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뒤에서 다리에 걸려 넘어갈 수 있으니까 자리 비켜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절대 안 비켜주죠.


치열하네요.

그럼요. 그런 경우 말고도 스타트(출발선) 나와서 내 말이 비인기마고 옆에 우승마가 있으면 ‘내가 먼저 갈게’라고 말이나마 해보고.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경주를 하다보면 함성 때문에도 더 짜릿하겠어요.

함성은 신경 안 써요. 일단 지금 내가 급하니까요. 근데 이런 건 있어요. 내가 1등으로 달리는데 갑자기 함성소리가 커지는 경우. 누군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거죠. 좀 잠잠하면 내가 여유 있게 들어오는 거고요.


갑자기 함성 커지면 우선 긴장이 되겠네요.

그렇죠. 말소리가 이미 들리는데 함성소리까지 이어지면 ‘잡혔구나’ 싶죠.


보통 기수가 처음 시작해서 활동하는 기간이 몇 년 정도인가요?

오래하는 분들은 중간에 나가지 않는 이상 한 20년 하시는 것 같아요. 아직까지 은퇴해 본 여자기수는 없는데 제 계획은 한 10년에서 15년 채우는 거예요.


그러면 조금 더 먼 미래의 계획이 있는 건가요?

조교사요. 그것도 아마 처음일 거라 기대감이 많아요.


금녀의 벽을 허물었잖아요. 기수의 꿈을 가지게 될 미래 후배가 많을 텐데. 한마디 해주시죠.

“안 하는 게 좋겠다!” 하하. 솔직하게 얘기해줘야죠. 나도 선배가 있었더라면 와서 조언 좀 들어보고 판단했을 것 같은데 막연히 겉으로 보이는 것만 전부가 아니었어요. 지금으로서는 누가 ‘여자기수 어떠냐’고 묻는다면 다른 거 하라고 얘기해 주고 싶어요.




솔직히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를 듣고 있자니 기수로서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또 다시 스타트라인에 설 것이다. 귀가 먹먹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아득한 모래주로 너머 아무도 가지 않은 그곳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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