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 본 육당 최남선 고택 ‘소원’
다시 가 본 육당 최남선 고택 ‘소원’
  • 김철
  • 승인 2008.05.0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형은 간 곳 없고 역사의 현장은 표지석만 남아 / 김철



[인터뷰365 김철] 친일문제로 세간이 시끄럽다. 해방 이후 좌익과 친일은 이 땅의 끔찍한 화두가 되어 그칠 줄 모르고 있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한 치욕의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의 비극이다. 친일경력이 문제가 되어 지방문화재 지정이 거부된 육당 최남선의 고택 '소원(素園)'이 자취를 감춘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최남선이 누구인가. 신문화와 근대문학을 개척한 선각자로서의 그의 공적은 차치하고 문화재로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고택일지라도 친일이라는 이유로 보존이 거부되고 결국 헐리지 않을 수 없었던 현장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육당이 기거했던 고택 '소원'은 서울 우이동 버스 종점 대로변에 위치해 있었다. 고택이 있던 자리는 저층 아파트형 빌라가 들어서 있다. 1928년에 건립되어 지난 2003년 철거되기까지 76년을 버티던 현장에는 "근대문학을 개척한 육당 최남선 선생이 문학 활동을 했던 터"임을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 있다.





집 앞에는 고인을 기리는 기념비도 있었다. 1959년 육당의 2주기를 맞이해 세운 ‘최남선기념비’가 그것이다. 사학자 이병도가 비문을, 서예가 김충현이 글을 쓴 기념비는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취도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고는 '素園'이라는 한문이 음각된 커다란 바위다. 고택의 정원에 있던 이 바위는 집이 철거되면서 인근 개천에 버려졌던 것을 강북구청에서 노무현 정권 임기 말인 지난해 12월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옆에는 ‘소원바위’와 육당을 소개하는 글이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육당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해 굳이 옮기면 다음과 같다.



<소원은 1928년 건립된 고택의 명칭으로 육당 최남선 선생(1890-1957)이 집필활동에 전념했던 곳이다. 이 바위는 고택에 있던 바위로 ‘素園’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최남선 선생은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신문화 도입과 근대문학을 개척한 선각자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인 “소년”과 시조집 “백팔번뇌”를 발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등 많은 문학적 업적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대로변이라 하지만 아파트가 있는 주변이 비교적 한산해 평소 행인들이 많지 않은 길이다. 어쩌다 지나가는 행인들조차 ‘소원바위’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관광객들이 찾을 만큼 고택의 원형이 보존된 명소도 아니고 저마다 갈 길 바쁜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띌 리도 없다.



'소원'은 대지 463평에 건평 55평의 단층 목조 기와집이었다. 육당이 1941년부터 10여 년간 살았던 집으로 후손에 의해 매각되어 철거되기 전에 강북구청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관내에 있는 육당의 고택을 명소로 보존하기 위해 서울시에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서울시문화재위원회에서는 육당의 고택이 친일장소로 사용한 데다 원형이 크게 훼손됐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논란 끝에 최종적으로 이를 거부했다.



당시 정치사회적 분위기도 친일경력이 있는 육당의 고택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호의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유족들도 원치 않은 일이기도 했다. 문화재로 지정될 경우 사유재산권이 제한되는 데다 고택이 명예보다 불명예스런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되어 두고두고 논쟁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뜻있는 많은 사람들은 서울시문화재위원회의 이 같은 결정을 두고 못 마땅해했다. 친일경력을 가진 그의 과오를 인정하되 부끄러운 과거사도 역사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의 뛰어난 공적을 감안해서라도 고택을 보존토록 했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원형이 훼손되어 보존가치가 없다는 것도 빈약한 논리였다. 고택일수록 관리가 허술할 경우 훼손되는 것은 당연하고 오래된 문화재는 거듭되는 보수를 통해 보존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친일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그것은 친일이라는 이유로 종적을 감춘 육당의 고택이 있던 역사의 현장을 다시 둘러보는 계기가 됐다. 친일은 사람이 한 것이지 고택이 한 것이 아니다. 서울 남현동의 미당 서정주가 거처했던 가옥도 이런저런 이유로 방치된 상태라는 것은 알려진 대로다.


최근 민간기구인 민족문제연구소측이 ‘국민의 힘으로’라는 기치 아래 편찬을 추진 중인 이른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대상인물 4천776여명을 공개하면서 논란이 분분하다. 지난 2005년 8월 1차 발표 때의 3천90명에서 새로 1천686명을 추가로 발표하면서 친일논쟁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정치꾼들이 상투적으로 써먹는 것처럼 ‘국민’을 앞세우는 명분과 기대와는 달리 절대다수의 국민은 이 사업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적 동의 없이 민간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일 뿐이다. 물론 과거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민간주도의 편찬사업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국민들의 관심은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오로지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나라경제가 잘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것이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표로 연결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대상자 가운데는 ‘설마 그럴 리가’할 정도로 각계의 기라성 같은 저명인사들이 수두룩하다. 그 가운데서 교과서를 통해 배웠거나 또는 일상적으로 업적을 대하는 문화예술계의 몇몇 저명인사들만 예로 들어보자. 김기진 남인수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안익태 이광수 이원수 주요한 채만식 홍난파 등이 그들이다. 세인들은 자율적이든 타율적이든 이들의 친일행위에 따른 과오는 잘 몰라도 문화예술계에 기여한 공로는 알고 있다. 그 이면에는 이들의 친일경력이 부각되지 않은 점도 물론 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문화재적 보존 가치가 있는 선각자들이 살던 집이 더 이상 사라지는 것은 국가적 손실일 수 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없는 역사도 날조하고 조작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른바 ‘동북공정’을 추진한 중국이 그렇고 이웃나라 일본도 그렇다. 서구에서는 심지어 명사들이 묵고 간 여관방까지 관광 상품으로 개발해 관광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나칠 일이 아니다.



뚜렷한 업적을 남긴 명사들의 연고지를 명소로 만들거나 이벤트화하여 관광객 유치를 도모하던 지자체들 가운데는 불거진 친일논쟁으로 입장이 난처해진 경우도 있다고 전해진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육당의 고택 ‘소원’이 서울시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면 강북의 또 다른 역사적 관광 명소가 되었을 것은 불문가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원바위’ 옆에는 육당의 생전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고목 뽕나무가 말없이 ‘소원’의 옛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김철
김철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